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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단돈 100원에 '엿바꿔 먹은' 범학리 삼층석탑의 '77년 걸린 귀환'

국립진주박물관은 요즘 아주 희귀한 국보 석탑의 전시를 위해 터파기 공사에 여념이 없다. 주인공은 국보 제105호인 경남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다. 

통일 신라 양식을 계승한 범학리 석탑은 탑 외면에 부조상이 새겨져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상층 기단에는 신장상(神將像·무력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 8구, 탑신에는 보살상 4구가 정교한 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당대의 뛰어난 조각기술과 경남 지역의 불교 미술 수준을 보여주는 걸작이어서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1946년 미군공병대가 경복궁내에 복원한 범학리 삼층석탑(국보 제105호).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그러나 이 석탑 만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하나 있으니 바로 섬장암을 깎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찬희 공주대 교수(문화재보존학과)에 따르면 한국 석탑의 70% 가량이 화강암 재질이고, 나머지는 대리석과 편마암, 사암 등의 재질로 제작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사된 석탑 중 섬장암으로 만들어진 것은 한 점도 없다. 알칼리 장석인 정장석 등이 주성분인 섬장암은 석영을 거의 함유하지 않은 유색광물이다. ‘반짝이는 장석으로 된 암석’이라는 뜻에서 섬장암(閃長岩)이라 한다. 

화강암에 비해 부드러운 특징을 갖고 있다. 전세계적으로도 분포지가 넓지 않고, 국내에서도 산출량이 거의 없다. 희귀하게도 산청 범학리 인근에 분포된 섬장암으로 이 삼층석탑을 만들었으니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희귀암석 섬장암으로 제작된 이 ‘범학리 삼층석탑’의 팔자는 기구했다. 제자리(범학리)를 벗어나 떠돌다가 급기야 17조각으로 분해된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묻혀있다가 77년 만에 재조립되어 고향(국립진주박물관)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문화유산의 보호·관리에 무관심했고, 심지어는 푼돈을 받고 석탑의 반출을 방조했던 낯부끄러운 자화상을 되돌아 볼 수 있다.

1941년 경상북도 지사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게 보낸 ‘신라시대 석탑(범학리 삼층석탑)’ 보고문과 이 석탑을 조사한 조선총독부 기수(技手)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의 복명서(조사결과 보고서)를 토대로 그 전말을 살펴보자.  

일본 골동품상이 사들여 대구 제면공장에 보관해놓은 삼층석탑 부재들(1942년 5월)|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때는 바야흐로 1940년 11월 무렵이었다. 경남 진주에 살던 정정도라는 인물이 범학리 일대를 찾았다. 수 백 년 전부터 무너져 일부는 땅 속에, 일부는 지면에 노출된 석탑을 살폈다. 정정도는 땅 소유자와 마을 주민들을 찾아가 “무너진 석탑을 팔라”고 요구했다. 

처음에는 마을 주민들이 “그럴 수 없다”며 반대했다. 정정도는 포기하지 않고 마을 주민과 땅 소유주를 설득했다. 

정정도는 “부락동사(마을회관)를 건립하는데 기부금을 내겠다”면서 100원(엔)을 건네며 여러 차례 “주민들이 매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석탑의 반출에 대해 그저 묵인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꾀었다. 

마을 주민들과 땅 소유주는 솔깃했다. 주민들은 그렇지않아도 무너져내린 석탑을 귀찮게 여겼고, 소유주도 “농사를 짓는데 불편하기만 한 방해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석조물의 거래는 당시 불법에 해당됐다. 조선총독부가 이미 1911년부터 개인간 석조물 매매를 금지하는 문건을 각 지방에 내려보낸 바 있다. 정원을 꾸미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조선의 폐사지에 서있는 탑과 불상에 군침을 흘렸기 때문에 만든 문건이었다. 

범학리 삼층석탑은 1994년 경복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17개 조각으로 해체된 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들어갔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문건의 내용은 “조선 각지의 석조물들은 일반 백성의 사유물이 아니므로 사적으로 팔거나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폐사지의 탑·불상은 국유물이라는 것이었다. 

범학리 삼층석탑도 정식으로 매매하기는 꺼림직했던 마을 주민과 땅 소유주가 ‘마을회관 건설비’의 기부형식으로 돈을 받고 반출을 방조·묵인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정씨가 마을회관 건립비조로 건낸 100원(엔)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940년 쌀 한가마니(80㎏) 가격은 22.68원(한국은행 자료)이었다. 그렇다면 마을회관 건립 기부금 100원은 단순하게 환산할 때 쌀 5가마니(4.4가마니)도 안되는 푼돈을 받고 ‘모른채 넘겼다’는 것이다.   

범학리 삼층석탑은 이렇게 마을주민의 방조 묵인아래 이듬해인 1941년 1월 반출됐다. 반출은 원 모라는 자가 약 한 달 동안 마을주민 500명을 동원해서 현장에서 도로변까지 운반했다고 한다. 그렇게 반출한 석탑 부재들은 진주까지는 화물자동차 6대(대형 2대, 소형 4대)로, 진주에서 대구까지는 철도로 각각 운송됐다. 

범학리 삼층 석탑의 탑신 정면 부조상. 신장상 8구, 보살상 4구가 정교한 수법으로 새겨져 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석탑은 대구의 골동품상인 오쿠 지스케(奧治助)에 매각됐다. 경북지사가 조선청독부에 보낸 보고서는 “석탑의 평가액은 1만원이었는데, 실제 매매가격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을 푼돈 100원에 꼬드겨 석탑을 확보한 정정도라는 인물이 골동품상인 오쿠의 거간꾼인지 뭔지 모르겠다. 

여하간에 정정도는 평가액의 100분의 1 가격인 100원에 후려쳐 석탑을 확보한 셈이다. 일본인 골동상 오쿠나 중간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정정도나 백번 욕먹어도 싼 인물들이다. 

그러나 돈 몇푼에 귀중한 문화유산을 팔아넘긴 당시 백성들의 무지몽매가 너무도 안타까울 지경이다. 하기야 범학리 삼층석탑 뿐이랴.

1912년 일본 오사카(大阪)으로 반출됐다가 1~2년 만에 극적으로 돌아온 강원 원주 부론면의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호)도 똑같은 길을 걸었다. 

당시 정주섭의 소유지 폐사에 서있던 탑을 일본인(모리·森)이 사들여 서울로 반출했고, 이 탑은 일본인 실업가 와다 스네이치(和田常市)를 거쳐 일본 오사카의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에게 건너간다. 후지타가 구입한 가격은 3만1500원이었다. 이런 사례를 끄집어낼 때마다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쨌든 대구 골동품상 오쿠의 수중에 들어간 범학리 삼층석탑은 대구 동운정(현 동인동) 이소가이(磯貝) 제면공장 구내 공터에 해체된 채 놓여 있었다. 그러나 4개월 후인 1941년 5월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소속 촉탁인 오사카(大阪)와 고미야(小宮) 등이 석탑의 불법반출소식을 본부(조선총독부)에 보고했다. 총독부는 즉시 고고학자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을 급파, 진상조사를 실시했다. 

사건의 전말은 총독부가 경북지사와 전문가 아리미쓰 등이 보내온 보고서와 복명서에 실렸다.

복원을 위한 실측도. 특히 탐의 하대석 이하 부분은 멸실되고 없으나 인근 폐채석장에서 똑같은 섬장암을 확인해 똑같은 부재로 복원할 수 있었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당시 현장에 급파된 산청군수는 마을주민에게 그나마 남아있던 석탑의 하대석 등 3개를 “제대로 보관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대석 등은 이후 찾을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1942년 대구 이소가이 제면공장에 보관되어 있는 석탑을 회수하여 서울의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옮겨놓았다.

석탑은 해방 이후인 1946년 미군 공병대의 도움으로 경복궁 안에 세워졌지만 1994년 경복궁 정비사업의 하나로 다시 17개 부재로 해체되어 박물관 수장고로 들어갔다.

국립진주박물관은 파란만장한 이력을 갖게 된 국보 범학리 석탑을 인수받아 전시하게 된 것이다.

특기할만한 일은 일제강점기에 석탑이 반출되는 과정 직후에 잃어버린 석탑의 하대석 이하 부분을 ‘똑같은 성질의 부재’로 복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경남 산청군 범학리 일대에 그 희귀하다는 섬장암이 넓게 분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박물관측은 특히 범학리와 인접한 산청군 정곡리에 섬장암 폐채석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찾아냈다. 

허일권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석탑부재와 동일한 섬장암 광산임을 밝혀낸 것”이라면서 “복원재료를 원 석탑부재와 같은 산지의 돌로 복원한 사례는 국내에서 극히 드문 사례”라고 밝혔다.

박물관측은 재건공사를 거쳐 오는 11월30일부터 복원된 석탑을 야외전시장에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범학리 현장은 밭농사를 짓는 개인소유의 땅이고, 물이 차는 지역이라 아쉽지만 그 자리에서의 복원은 어렵다”면서 “박물관 야외전시장에서 고향을 떠난지 77년만에 돌아온 국보를 널리 함께 향유하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