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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때때옷 입고 재롱 떤 선비…부모님을 생각하며

  이번 주 팟 캐스트 주제는 부모님 이야기입니다. 설을 맞이해서 일년에 단 한 번이라도 부모님 생각 해보라는 뜻에서 마련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농암 이현보 선생을 아시는지요. '어부가'로 유명하신 바로 그 분입니다.

  그런 농암 선생은 70살이 넘은 연세에, 90이 넘은 아버지를 위해 색동옷을 입고 재롱잔치를 벌였답니다. 그것도 후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그랬답니다.농암 선생이 꼬까옷을 입고 춤을 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뿐이 아닙니다. 농암 선생은 80이 넘은 고향 어른들을 모두 모아 때때마다 마을잔치를 열었답니다. 그 자리에는 양반은 물론 상인, 심지어는 천민들까지 다 모였답니다.

  자, 설을 맞아 농암 선생이 전해주는 이야기, 즉 부모님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 지를 한번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관련기사입니다.       

   

  ‘이런 생활 속에 근심 걱정 없으니 어부의 생활 최고로다. 조그마한 쪽배 끝없는 바다 위에 띄워 두고, 인간 세사를 잊었거니 세월 가는 줄 알랴.’(이현보의 <어부가>)
 농암 이현보(1467~1555)는 흔히 ‘어부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 때부터 12장의 장가와 10장의 단가로 전해져오던 노래를 9장의 장가와 5장의 단가로 다듬었다. 농암의 어부가는 훗날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어부가’만 떠올리면 그것은 시쳇말로 이현보를 ‘띄엄띄엄’ 아는 것이다. 이현보를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1519년(중종 14년) 안동부사 이현보가 부모아 고을 노인들을 위해 마련한 양로잔치를 그린 <애일당구경첩>(보물 1202호) 중 ‘화산양로연도’. 이현보의 부모가 이 잔치의 주빈이 되었다. 이현보는 양반은 물론 상민, 천민 할 것 없이 80살 이상의 노인들을 모두 초청했다. 이현보는 이때 고을 원님의 신분으로 부모를 위해 색동옷을 입었다. |농암종택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저 낯이 검고 수염 많은 자를 매우 쳐라!”
 예컨대 사헌부 시절 동료들은 이현보를 ‘소주도병(燒酒陶甁·소주를 담은 질그릇)’이라 일컬었다.
 수염이 많고 거무스름한 그의 얼굴을 빗대 ‘겉모습은 질그릇 병처럼 거무튀튀하고 투박하지만 속은 소주처럼 맑다'는 뜻이었다. 그 수염 많고 검은 얼굴 때문에 화를 입는 사건도 있었다.

   즉 새내기 사관이었던 이현보는 서슬퍼런 연산군 시절(1502년) “사관은 정청(政廳·임금의 정사를 보는 곳)에 참석해서 임금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든 일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연산군은 물론 애송이 사관의 말을 일축했다. 하지만 연산군의 뒤끝은 어지간했다.

   풋나기 사관의 일을 ‘꽁’하며 기억하고 있었다. 갑자사화의 광풍이 몰아치던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이 그 일을 기억해냈다.
 “지난 날 사관을 정청에 참여시키도록 요청한 자가 있었는데…. 그 자의 낯이 검고 수염이 많았다. 필시 이현보일 것이다. 신입사관이 감히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 자를 잡아다 장형(杖刑)에 처하라.”(<연산군일기> 1504년 12월 24일)
 연산군은 이듬해에도 눈엣 가시처럼 여긴 이현보를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이 때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현보가 70여 일이나 투옥되어 있었는데 하루 아침에 석방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석방의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훗날 그 이유가 밝혀졌다.

   원래는 죄수명단에서 이현보의 앞에 이름이 기록돼있던 죄수가 석방대상자였다. 연산군의 어필(御筆)이 그 죄수의 이름에 낙점했어야 했다. 그런데 연산군이 실수로 그 죄수가 아닌, 이현보의 이름에 어필(御筆)을 찍은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연산군의 실수가 이현보를 살린 것이다. 

이현보 초상화. <어부가>로 알려진 농암 이현보는 조선에서 손꼽히는 효자로 유명하다.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은 목민관
 이현보는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탁월한 목민관이었다.
 “1516년 충주목사였던 이현보가 어버이 공양을 위해 안동부사로 발령받았다. 그러자 떠나는 이현보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백성들이 길가에 가득했다.”(<퇴계선생문집> ‘이현보 행장’)  
 그 뿐이 아니라 각 문헌을 보면 목민관 이현보를 따르는 백성들이 줄을 잇고 있다.
 “충주 백성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백성들이 기운을 차리도록 이현보를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소서.'”(<중종실록> 1517년 12월 17일)
 “이현보가 영천 군수 시절 선생이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고 규모있게 일을 처리하자 이듬해 본래의 액수를 채우게 됐다. 이에 거두기 어려운 세금은 모두 문서를 불태워버렸다.”(<농암선생연보>)
 <중종실록>을 쓴 사관은 이현보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이현보는 일찍이 늙은 어버이를 위해 외직을 요청해서 무려 여덟 고을을 다스렸는데 모든 곳에서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양로잔치 벌인 사연
 그렇다. 필자가 설을 앞두고 이현보를 특별히 논하는 이유를 <중종실록>를 쓴 사관이 말해주고 있다. 
 이현보가 외직을 자청한 것은 바로 ‘어버이 부양’ 때문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효성이 지극했으면 이현보가 죽은 뒤 받은 시호가 효절공(節公)이었겠는가.
 퇴계 이황이 쓴 이현보의 행장(行狀·죽은 이의 간단한 일대기)과 <해동잡록> ‘이현보’편을 보라.
 “예안 고을에는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현보가 일찍이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당시 아버지가 94세, 숙부가 92세, 장인(권수)이 82세였다. 이 세 사람과 고을 사람 70세 이상의 노인 6명으로 구로회를 만든 것이다. 구로회라 이름 지은 까닭이 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가 향산에 은거해서 주변의 노인 9명과 함께 주연과 시회를 가진 것에 착안했다. 당시 67세였던(1533년) 이현보는 구로회에 참석해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이 구로회는 이현보 집안의 양로잔치가 되어 대대로 전승되었다. 훗날에는 참석자 수가 9명으로 제한되지 않았고, 기로회, 백발회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이어졌다. 양로잔치의 규모도 갈수록 커졌다.
 “안동에서 노인들을 봉양하는 잔치를 크게 베풀었다. 양친을 모셔서 연회의 주빈으로 삼았다. 이현보는 자제(子弟)의 예로 축수하는 잔을 받들어 올렸다. 그 화락한 경사를 지극히 하니, 보는 자가 다 탄복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는 고금에 드문 일이다.”(<퇴계선생문집> ‘이현보 행장’)
 “고을 내 80살 이상의 양반에서 천예(賤隸)까지 남녀 불문하고 찾아가 나이가 맞으면 모두 참석하게 했다 수백명에 이르렀다. 고을 노인들을 모시고 양친도 함께 모시어 즐기시게 한 것은 당연히 흔한 일이 아니며 나(이현보) 역시 후에 이런 모임을 또 가질 수 있을 지 알지 못하겠다.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농암선생문집> 권1 ‘화산양로연시병서’)
 부모와 장인은 물론 고을 사람들을 위한 노인회를 만들고, 기회있을 때마다 양로잔치를 베풀어 자신의 어머니·아버지를 잔치의 주빈으로 모셨다는 뜻이다. 아들이 차려준 동네잔치의 주빈이 된 부모는 얼마나 아들(이현보)을 기특하게 여겼을까.
 그 뿐이 아니었다.
 “이현보는 동네 언덕의 거대한 돌 위에 집을 짓고는 어버이를 모시고 놀며 구경하는 곳으로 삼았다. 이곳이 바로 애일당(愛日堂)이다.”(<퇴계선생문집>)

애일당구경첩>(보물 1202호) 중 ‘분천헌연도’.
 1526년(중종 21년) 경상도 관찰사 김희수가 이현보 부모를 위한 잔치를 주관한 모습이다. 그림 왼족 위에는 이현보 가문의 종택이 보이고, 오른쪽 바위에는 애일당이 눈에 띈다. |농암종택 소장

 ■색동옷 입고 춤 춘 이현보
 그런데 퇴계 이황의 언급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이현보의 효성과 우애는 천성이었다. 항상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을 원하여, 7~8차례나 지방관이 되어 극진하게 봉양했다.  양친이 집에 계실 때에는 자손이 앞에 가득한데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웠다.”
 이현보는 왜 색동옷을 입고 어머니·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피웠다는 걸까. 그것도 어린 자손들이 가득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는 이현보가 춘추시대 때 초나라 은사인 노래자(老萊子)의 고사를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즉 노래자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모셨다. 그는 나이 70살이 넘었음에도 오색찬란한 옷을 입고 딸랑이를 갖고 어린아이처럼 놀면서 부모를 즐겁게 했다. 한번은 부모에게 물을 갖다드리려다 넘어졌다. 노래자는 부모가 걱정할까봐 일부러 물을 더 뿌려 드러누운 뒤 어린아이가 우는 흉내를 냈는데 이를 본 부모가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는 또 새를 희롱하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초학기> 권17 ‘효자전’)

   이렇듯 노래자는 효(孝)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뭇 선비들의 ‘롤모델’로 추앙받았다.

 

 ■효성의 끝판왕
 예컨대 목은 이색의 시 ‘즉사(卽事)’를 보자. 
 “황향의 베개 부채질과 노래자의 채색옷이여.(黃香扇枕老萊衣) 이 사람이 없으면 누구와 함께 한단 말인가.(不有此人誰與歸) 충효는 집안에서 반드시 노력해야 하나니(忠孝家中須努力) 일호라도 미진하면 일이 모두 잘못되리라.(一毫未盡事皆非)”
(<목은시고> 제12권)
 노래자는 앞서 인용한 ‘효의 끝판왕’이다. 황향도 만만치 않은 후한 때의 효자이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섬겼다. 그는 여름이면 아버지의 침상에 부채질해서 서늘하게 했고, 겨울이면 먼저 아버지의 이부자리에 들어가 따뜻하게 만들었다. <목은시고>에는 또 다음과 같은 시가 나온다.
 “저 훌륭했던 노래자는(彼美老萊) 백발에 채색옷을 입고(白髮彩衣) 춤추고 어린애 장난하여(而舞而戱) 늙은 부모 기쁘게 하였네(以樂庭위) 누가 그 덕음을 이어서(孰嗣其音) 모친의 마음 기쁘게 할꼬.(而順母心)”
 이색의 부친인 이곡의 시문집(<가정집> 제18권)에도 노래자의 색동옷이 나온다.
 “초각과 황각은 귀한 점에서 응당 같겠지만(草閣應同黃閣貴) 금의보다는 채의의 새 옷이 훨씬 좋은 걸.(錦衣爭似綵衣新)”
 무슨 뜻이냐. 효(초각)와 출세(황각)는 가치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중요하다는 것. 여기서 초각은 집안, 즉 효를 의미하고, 황각(의정부의 별칭)은 정부에 출사하는 것, 즉 출세를 뜻한다. 그러나 이곡의 입장에서 보면 출세(고관의 옷, 즉 금의)보다는 채의(효성를 뜻함, 즉 노래자의 색동옷), 그러니까 부모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떠는 편이 훨씬 좋다는 뜻이다.

 

 ■색동옷 입고 춤을…
 조선 중기의 문인 정온(1569~1641)의 <동계집>에도 노래자의 고사가 나온다.
 “해마다 이날(어머니 생신)이면 수연을 열고(年年此日壽筵開) 삼 형제가 노래자처럼 춤을 추었지.(兄弟三人舞老萊) 오늘은 머나먼 바다 밖으로 떨어져 있어서(今日飄零滄海外) 마을 어귀에 기대선 어머니 마음을 슬프게 하네.(倚閭空使母心哀)”
 삼형제는 바로 정온과 형(정률)과 동생(정백)을 가리키는 것이다. 전에는 어머니 생신 때마다 잘 모셨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아쉬움을 시로 남겼다. 마을 어귀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심정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이쯤해서 농암 이현보가 부모와 안동 지역 노인들을 위해 마련한 양로잔치에서 읊은 시를 인용한다.
 “관청에서 노인들 모아 잔치 벌이네.(公堂開宴會高年)~청사 안팎에서 악기 소리 그치지 않네.(廳分內外管絃連) 술동이 앞에서 색동옷 입은 것 이상히 여기지 마라.(樽前綵희人休怪) 내 부모님도 자리에 계시니.(太守雙親亦在筵).”(‘화산양로연시’)
 그래, 이번 설엔 색동옷 입고 부모님 앞에서 춤 한 번 추어보면 어떨까. 번드르르한 양로잔치는 벌이지 못하더라도…. 600년 전 농암 이현보 선생처럼….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