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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늘

마오쩌둥에 맞서다 숙청

ㆍ1959년 류사오치(劉少奇) 중국 국가주석 취임

1959년 4월27일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인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에 올랐다. 당시 중국대륙은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자력갱생을 도모하던 마오쩌둥은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우경 보수병에 걸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가고 있다”면서 “대약진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이다. 이를 위해 7만개의 인민공사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5000~6000개의 향(鄕)을 한 단위로 묶은 인민공사는 농·공·상·학·병을 집결한 집체경제의 단위였다.

하지만 이 급작스럽고 과도한 드라이브 정책은 재앙을 낳았다. 인민들은 수확철인데도 ‘영국 따라잡기’를 위한 철강생산에 1억2000만 농가에서 9000만명이 동원됐다. 당 중앙에 잘 보이기 위해 턱도 없는 생산목표를 설정했다. 어떤 인민공사에서는 곡식이 쑥쑥 잘 자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싹을 뽑아버리는 일도 생겼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조장(助長)’이다.

설상가상으로 58~61년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가며 중국대륙을 덮쳤다. 무려 1800만명이 굶어 죽었다. 류사오치는 이때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로 급부상한 것이다. 61~62년 류사오치는 각종 회의에서 “대약진운동 오류의 책임은 마오쩌둥에 있다”고 비판했다. 마오쩌둥도 할 수 없이 자기비판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가만있지 않았다. 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류사오치에게 ‘중국의 흐루시초프’라고 딱지를 붙였다. 마오쩌둥이 ‘사령부(주자파의 소굴)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붙인 이후 류사오치는 ‘주자파(走資派)의 사령관’이 된다. 노혁명가의 운명은 10대 홍위병들에게 맡겨진다. 류사오치는 홍위병 앞에 끌려나와 마오쩌둥 어록으로 무수히 맞고, 암송을 강요당했다. 심지어는 머리를 허리 아래로 숙이고 양팔을 뒤로 뻗치는 이른바 ‘제트기 얼차려’를 2시간 이상 받아야 했다. 류사오치는 2년 뒤인 67년 11월 쓸쓸하게 사망했다. 여기서 한가지. ‘문혁’ 당시 류사오치를 제치고 새롭게 2인자로 급부상한 린뱌오(林彪) 또한 쿠데타 혐의가 적발된 71년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 ‘개인숭배’에 도취된 절대자 밑에서는 ‘목을 내놔야 하는’ 2인자의 딱한 신세를 보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