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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막말, 항명, 풍문' 탄핵도 허하라!

 “그의 살코기를 씹어먹고 싶습니다.(欲食其肉)”
 1497년(연산군 3년) 사간원 정언(정 6품) 조순이 ‘막말’을 해댄다. 갓 서른이 된 사무관(조순)이 칠순을 넘긴 노(老) 재상 ‘노사신’을 겨냥,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그것도 임금 앞에서….
 무슨 사연일까. 사건은 연산군이 신임 고양군수로 ‘채윤공’을 임명하면서 비롯됐다.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고(사간원) 관료들의 비행을 적발하는(사헌부) 대·간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글도 모르는 채윤공이 어찌 고을을 다스리겠느냐’는 것이었다. 채윤공은 노사신의 최측근이었다. 노사신은 “대간이 무슨 공자님도 아니고…. 남의 벼슬길까지 막느냐”고 적극 변호했다.
 “대간이라는 자들은 남을 고자질해서 명성을 얻는 자들”이라는 극언을 퍼부으며…. 그러자 조순 등이 ‘간신 노사신은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인물’이라고 퍼부은 것이다.   

 

 

조선시대 때는 임금이 관리를 임명할 때 사헌부와 사간원의 동의를 거쳐야 비로소 정식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을 서경(署經)이라 한다. 선조 때 청난 및 호성공신이 된  신경행(1559~1623년)은 사후 200여 년 뒤 ‘충익공’으로 추증됐다. 이 문서는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으로 정한다는 순조 임금의 명에 대해 사헌부가 이른바 ‘임명동의’를 해준 것이다. 이것이 <시호서경>(보물 1380호)이다.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씹어먹어도 시원치않을…”
 연산군은 “과인의 면전에서 ‘살코기 운운’은 너무 심한 게 아니냐”며 “저 자(조순)는 임금도 공경하지 않을 것”이라고 화를 벌컥 내며 조순의 국문을 명했다.
 지금의 대통령비서실격인 승정원까지 나서 “대·간관을 국문한다는 것은 좀…”이라고 난색을 표하자 연산군의 꼬집는 한마디가 재미있다.
 “승정원도 대간을 퍽이나 두려워하는구나!”
 임금의 자문기관인 홍문관 관리들까지 나서 노사신의 죄를 청하고 조순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올리자 연산군은 또 한마디 더한다.
 “너희는 앞다퉈 조순을 위해 나서는구나. 너희는 과연 임금에게 일이 생겨도 이렇게 달려와 구하겠느냐.”
 3사(홍문관·사헌부·사간원)에다 승정원까지 나서자 연산군은 타협책을 제시한다. ‘자질 시비’에 휘말린 채윤공을 직접 불러 몇가지 시험을 본 뒤 고양군수직에서 보직해임한 것이다.
 “대간들이 하도 탄핵하기에 채윤공을 불러 시험했더니 과연 <맹자>도 못 읽고, <경국대전>도 이해하지 못했다. 또 칠사(七事·수령의 7가지 덕목)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해임시키노라.”(<연산군일기>)
 다만 “아무리 그래도 원로대신에게 막말을 퍼부은 조순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며 조순의 파직결정은 고수했다. 절묘한 타협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사표
 막강한 왕권을 갖고 있는 서슬퍼런 임금(연산군) 앞에서…. 재상의 살코기를 씹어먹겠다는 극언을 하고, 가열차게 임금을 다그치며 직언을 해댔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대간 및 간관의 참모습이었던 것이다.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사헌부와 임금의 잘못을 따지는 사간원 등 언론기관의 역할은 서거정의 언급에서 잘 알 수 있다.
 “군왕에게 실책이 있을 때는 거침없이 역린을 건드리고…. 임금의 노여움에 저항하며 중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장상대신에게 과오가 있으면 규탄하고 종친 및 외척과 세도가, 그리고 임금의 측근신하 등에게 횡포가 있어도 탄핵하고…. 소인이 조정에 있으면 반드시 내보내고. 탐관이 벼슬에 있으면 기어이 내쫓아야 하고 곧은 자를 천거하고 굽은 자를 버리며 탁한 것을 배격하고 맑은 것을 찬양해서 얼굴색을 바로 하고 조정에 서면 백관이 떨고 두려워 하는 바이니….”(<연려실기술> ‘관직서고·사헌부’)
 이렇게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사표였던만큼 한치의 흠결도 허락되지 않았다.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는 사간원 관리들의 친목모임을 그린 <미원계회도>(보물868호). 1540년 열린 이 계모임에는 이황, 유인숙, 이명기, 나세찬, 이영현 등이 참석했고 성세창의 시문이 적혀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근저지 투쟁
 태종 말기와 세종 초기에 일어난 ‘이발 사건’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1417년(태종 17년),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 금릉(남경)을 다녀온 이발(李潑)이 탄핵됐다.
 사사로이 대량으로 싣고간 포물(布物)을 중국현지에서 팔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에서도 큰 물의를 빚었다. 명 조정에 진상할 물건은 별로 없는데, 개인적으로 가져온 물건이 한가득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중국의 예부가 나서 백성들에게 “명조정에 진상할 물건은 조선인들과 매매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을까. 심지어는 명 예부상서가 이발 등에게 “포물은 좀 팔았냐”고 비아냥 거렸다. 웃음거리가 된 사절단…. 외교적인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다. 이 추문은 조선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태종 임금이 지탄의 대상이 된 이발을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사헌부 관리들은 이발의 첫 출근을 가로막고 나섰다. 임금이 임명한 대사헌의 출근을, 그것도 사헌부 관리들이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사헌부의 주장은 분명했다. “마음 씀이 간사하고 탐욕이 있는 인물이 풍헌(風憲·사헌부)의 수장으로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태종도 어쩔 수 없이 이발의 임명을 취소하고 말았다.

 

 ■태종·세종에 항명한 4급 관리
 한바탕 인사파동을 겪은 지 3년 뒤인 1420년 3월16일.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이 또 이발을 대사헌으로 임명하는 무리수를 둔다.
 원래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이 출근하면 모든 사헌부 관리들이 청사의 뜰 아래 도열해서 정중히 영접하는 것이 법도였다. 신임 대사헌이 첫 출근한 3월22일,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다.
 세종이 사헌부 장령 송인산에게 “이발을 마중하라”고 직접 명했다. 그러나 송인산은 국왕의 명을 거부한다.
 “이발을 욕심을 품어 어명을 욕되게 한 자입니다. 사헌부의 장관이 될 수는 없사옵니다.”
 세종이 “이발이 고의로 범한 것이 아니니 어서 마중하도록 하라”고 제차 명을 내렸다. 그러나 송인산의 한마디는 짧지만 단호했다.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감히 정4품의 관리가 국왕의 명을 단칼에 거부한다? 사상 초유의 항명이자 하극상이 아닌가. 그러나 세종은 손을 들고 만다. 이발의 대사헌 임명을 취소하고 형조참판으로 바꿔 제수한 것이다. 대사헌 임명 13일만에, 또 장령 송인산이 항명파동을 일으킨 지 일주일 만(3월29일)이었다. 태종과 세종이라는 큰 임금 앞에서 당당히 항명파동을 일으켜 결국 항복을 받아낸 사정기관 공무원들이었다.

 

  ■‘작불납’의 거부권
 대간들에 부여된 중요한 권한이 있었으니 바로 서경(署經)이었다. 
 조선초만 해도 임금이 관리를 임명할 때 대간(사헌부 및 사간원)이 50일 이내에 서명을 해야 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을 대간의 ‘서경권’이라 한다. 일종의 인사적부심 제도라 할까. 대간은 관리의 인사자료를 바탕으로 개개인의 문벌과 품행, 경력을 철저하게 분석한 뒤 국왕의 임명장에 서명할 지 여부를 판단했다. 만약 ‘부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리면 ‘작불납(作不納)’이라고 써서 이조에 돌려보냈다.
 1415년(태종 15년). 태종이 장진이라는 인물을 사헌부 헌납에 제수하자 사헌부가 서경을 거부해버렸다.
 “장진이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좇아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잣집의, 그것도 병든 딸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으니 마음과 행실이 청렴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태종은 물의를 빚은 장진의 임명을 취소하고 예조정랑으로 고쳐 제수했다.
 이쯤해서 만고의 성군이신 세종대왕이 또 등장한다. 앞서 두 번이나 대사헌 임명이 좌절됐던 이발이라는 인물과 함께….
 앞서의 사헌부 항명파동과 임명취소 사건이 벌어진 지 6년 뒤인 1426년, 세종은 이발을 병조판서에 슬그머니 임명한다. 대·간관들이 가만 있을리 없었다.
 좌사간 허성이 득달같이 나서 ‘염치없는 이발’를 탄핵하고 나선다. 좌사간은 이발의 예전의 허물에다 “태종의 승하 때 중국에 부음장을 올리러 갈 때 육포(마른고기)를 싸가지고 갔으니 신하로서 조금도 슬픈 표정이 없었다”는 흠결까지 더해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사간원은 아예 고유의 서경권을 발동, 거부권을 행사해버렸다. 세종이 “이발은 과인이 꼭 필요한 인물이니 빨리 임명장에 서경하라”고 재촉했지만, 사간원은 “법에 따른 정당한 거부권 행사”라며 버텼다. 그러자 세종은 결국 모든 관직(1~9품)에 걸쳐 서경권을 행사했던 대간들의 권한을 5품 이하로 축소시켜 버렸다.
 그렇게 되자 5품 이상 고위직의 임명 때는 대·간관들이 목숨을 건 탄핵으로 맞서게 됐다. 성종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영정조시대 학자 정덕필을 사헌부 장령에 임명한다는 영조 임금의 교지(1788년)

■“내 교지가 탄핵 한마디 보다 못하단 말인가”
 1481~82년(성종 12~13년) 사이 성종이 송영이라는 인물을 사헌부 장령과 지평에 고집스럽게 임명했다.
 대간들이 들끓었다. ‘난신의 조카’인 송영을 청요직 중의 청요직인 사헌부에 그토록 중용하느냐는 것이었다. 문제의 송영은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의 조카였다. 단종의 복위에 연루되어 교형에 처해진 이(송현수)의 조카이므로 난신에 연좌된 자라는 것이었다. 성종은 그런 송영을 첫 해(1481년)에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됐다가 대간들의 반발로 무산됐는데 1년 뒤 다시 사헌부 지평으로 재임명한 것이다.
 성종이 고집을 피운 속내가 있었다. 송영의 숙모가 세종대왕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대·간관들이 ‘송영은 절대 안된다’도 아우성쳤다. 그러자 성종은 “송영이 무슨 배우냐, 도적이냐? 왜 이리 난리냐”고 짜증을 부렸다.
 그래도 대간들이 들끓자 성종은 “내 교지가 대간의 탄핵 한마디보다 못하다는 거냐”며 “너희들이 난리를 피우는 것은 너희들 마음대도 조정의 기강을 잡으려는 게 아니냐”고 날카롭게 반응했다.
 ‘너희(대간)들이 정권을 장악하려 하는게 아니냐’는 무시무시한 힐난이었던 것이다.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조정의 중론은 “송영과 대간들 가운데 어느 한 편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대간을 자르면 임금이 간언을 거절해서 갈았다 할 것이고, 송영을 자르면 훗날 대간들이 또다시 아우성을 칠 테니 둘 다 교체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나름의 타협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카더라’ 통신도 탄핵의 자료
 오죽했으면 이른바 ‘풍문탄핵’도 허용됐을까.
 ‘풍문탄핵’이란 요즘 말로 증권가 찌라시에 나오는 ‘카더라 통신’으로 고위공직자들을 탄핵했다는 뜻이다. 그것도 직속상관으로 임명된 대사헌을 4급 공무원인 사헌부 장령이 ‘풍문탄핵’ 했다니….
 1477년(성종 8년)의 일이다. 사헌부 장령 김제신이 수장인 대사헌 양성지를 공격한다.
 “양성지는 본래 재화만을 탐하여…. 일찍이 이조판서 시절, 문전성시를 이뤄 자못 ‘보궤불식(보궤不飾)’이라는 비난과 함께 ‘오마판서(五馬判書)’라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더러운 소문이 있는데, 그에게 규찰의 지위를 더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가 한 짓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어도 사람들의 입에 퍼진 소문이 이와 같으니 빨리 파면하심이….”
 김제신의 표현 중 ‘보궤불식’은 ‘청렴하지 못한 대신이 나라의 제사그릇을 더럽한다’는 말이다. ‘오마판서’는 ‘수레를 끄는 4마리 말 외에 부정축재용 말 한마리를 더 데리고 다닌다’는 말이다. 그아말로 탐욕스런 부정축재의 전형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비록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소문에….’라는 단서였다. 전형적인 ‘카더라 통신’이었던 것이다.   

세조의 최측근이면서 훗날 정조의 정신적 지주였던 양상지의 글씨. 그러나 그는 대사헌 재직시절 이른바 '풍문탄핵'의 희생양이 되어 곤욕을 치렀다. 

■“죽고싶은 심정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양성지로서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 아닌가. 게다가 직속부하에게 그런 풍문탄핵을 받다니…. 양성지는 즉각 “억울해 미치겠다”는 상소문을 계속 올린다.
 “제가 이조판서가 된 것은 갑신년(1464년)입니다. 14년 전 길거리에서 들은 애매한 이야기로 노신에게 뒤집어 씌우고…. ~신은 논두렁에서 목을 매어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구천에서도 원통함을 달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당사자(김제신)과 대질이라도 하게 해주십시요.”
 이것은 조정에 큰 파문이 일었다. 성종은 풍문탄핵의 당사자인 김제신 등을 불러 ‘소문의 진위 여부’를 캐물었다. 김제신 등은 “예전에 들었지만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찌 지어낸 말이겠냐”며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소문이 그러니 사헌부 수장으로는 마땅치 않다”는 주장을 뒤풀이했다. 사헌부가 한꺼번에 나서 “대간이 사책(史冊)에 쓰여진 것만으로 말한다면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풍문을 거론하여 탄핵한 뒤 폐단을 언급해야 할 것”이라고 고집했다. 이에 정창손 등 고위관리들은 “말도 안되는 풍문탄핵의 죄를 묻지않는다면 국가의 체모가 어찌 되겠느냐”며 김제신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래도 대간을 죄 줄 수는 없다”
 성종은 의정부와 육조의 대신들을 모두 불러 이 문제를 두고 ‘대토론회’를 열었다.
 “아무리 대간이라도 사실도 아닌 일로 탄핵하는 것은 잘못이니 김제신 등에 죄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과, “대간이 대신을 탄핵하다가 되레 처벌당하면 앞으로의 언로가 막힐 수밖에 없으니 둘 다 죄를 주줘서는 안된다”는 주장 등이 팽팽하게 맞섰다. 어떤 이들은 “옳고 그른 것은 양립하지 못하니 두 사람을 대질심문이라도 해서 잘잘못을 끝까지 가려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성종은 분명했다.
 “대간의 말을 두고 ‘소종래(所從來·말의 출처)’를 가린다면 대간이 어찌 말하겠는가. 양성지도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충분히 소명한 만큼 혐의가 없어지지 않았느냐. 둘다 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풍문탄핵’은 시간이 흐를수록 당쟁의 도구로 악용되는 폐단을 낳았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그만큼 조선의 관리되는 자라면 결벽에 가까울 정도의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준엄한 가르침일 수도 있었다.
 대단한 사정기관에, 대단한 임금이다. 이것이 500년 이상 버틴 조선의 건강한 정신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요즘의 사정기관은 어떤가.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