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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몽골 쿠빌라이는 왜 “고려만큼은 특별대우하라!”고 명했을까

2018년 강화 옥림리 주택신축부지를 조사하던 한백문화재연구원 발굴단은 의미심장한 유구를 확인했습니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강화중성(길이 8.1㎞)의 한 지점이었는데, 그곳에서 9기의 목책구덩이가 보인 겁니다. 열을 이룬 목책구덩이는 성벽 외부로 돌출된 능선에서 치(雉)와 마른 도랑을 조성한 흔적이었는데요. 치와 마른도랑은 아시다시피 외부의 침입을 막는 방어시설이죠.

강화도에서 확인된 강화중성의 흔적. 1259년(고종 46) 몽골에 항복한 후 몽골사신은 “강화섬에 성이 남아있는 한 고려가 복종했다고 할 수 없다”면서 “강회 외성까지 더 허물고 돌아가겠다”고 압박했다. 이에 “성의 해체에 동원된 백성들이 괴로움을 이기지 못했고, 성이 무너지는 소리에 거리의 아이들과 여염의 부녀자들까지 슬피 울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울부짖으며 성을 헐었던 강화백성들 
그런데 목책구덩이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목책에 사용된 나무기둥을 뽑아내려고 인위적으로 기둥자리를 파내고 흙을 다시 메운 흔적이었는데요. 한마디로 인위적으로 성을 헐어버렸다는 얘기죠.
이 대목에서 <고려사>를 한번 들춰볼까요.
“1259년(고종 49) 6월 18일 강도(강화도)의 내성을 헐었다. 몽골 사신(주고)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외성이 남아있는 한 고려가 진심으로 복종했다 할 수 없다. 외성까지 다 허물고 돌아가겠다’고 재촉했다.”
<고려사>는 “몽골군의 겁박에 내·외성 해체에 동원된 백성들이 괴로움을 이기지 못했고, 성이 무너지는 소리에 거리의 아이들과 여염의 부녀자들까지 슬피 울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왜 몽골 사신이 남의 나라 성(城)을 그렇게 철저히 해체·파괴하고 돌아갔을까요. 

확인된 강화중성에는 목책구덩이가 9곳 보였다. 열을 이룬 목책구덩이는 성벽 외부로 돌출된 능선에서 치(雉)와 마른 도랑을 조성한 흔적이었다. 그런데 목책에 사용된 나무기둥을 뽑아내려고 인위적으로 기둥자리를 파내고 흙을 다시 메운 흔적이 보였다. 한마디로 인위적으로 성을 헐어버렸다는 얘기다.한백문화재연구원 제공


■물에 젬병이었던 몽골군
아시다시피 몽골은 고려와 28년간(1231~59년) 6차례의 전쟁을 벌인 끝에 강화협정을 맺었죠. 그런데 강화협정의 핵심 조건 중 하나가 바로 강화도성을 허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발굴지점은 몽골과의 강화협정 후 몽골 사신의 감시아래 주민들이 흐느끼며 성을 허물고 그 자리를 흙으로 메운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던 겁니다.  
여전히 의문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몽골군이라면 전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무서운 군대였죠. 그런 군대가 그 조그마한 섬(강화도)에 쌓은 성벽이 뭐 그리 무섭다고 안절부절 못했던 걸까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물이 무서웠기 때문’이랍니다. 초원·사막지대에 사는 몽골의 물 공포증이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답니다. 하다못해 ‘비바람 속의 전투’는 몽골군대가 가장 두려워 했습니다. 
<고려사>는 “1254년(고종 41) 몽골군이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갑자기 비바람이 불었다. 고려군이 반격하자 적이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고 했고, “1256년(고종 43) 고려관리와 노약자들이 월악산으로 피신했다.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불자 몽골군은 ‘신령이 고려를 돕는다’면서 퇴각했다”고 했습니다.
유명한 얘기지만 몽골의 일본 원정도 실패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강화도와 김포 사이에는 강화해협이 있다. 강화해협은 길이 20km지만 폭은 400~1000m에 불과하다. 강화해협의 폭은 좁지만 물살이 빠르기로 악명높다. 조석간만의 차이가 9m 정도가 된다. 조차가 크고 해협이 좁을수록 유속이 더욱 빨라진다. 밀물 때의 유속이 1초에 3~4m에 달한다.


■몽골에게는 수렁이었던 강화해협
강화도는 어떻습니까.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바다를 강화해협이라 하죠. 길이 20㎞지만 폭은 400~1000m에 불과합니다. 너무 좁죠. 그렇다면 아무리 물에 젬병인 몽골군이라도 상륙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강화해협은 조석간만의 차이가 9m 정도나 됩니다. 
물살이 험하기로 악명이 높죠. 좁은 해역에 조수가 오르내릴 때는 바닷물의 수평운동인 조류가 발생하는데 좁은 만이나 해협에서는 왕복성 조류가 흐르죠. 조차가 크고 해협이 좁을수록 유속이 더욱 빨라지겠죠. 밀물 때 강화해협의 유속이 1초에 3~4m라니 참 어마어마한 속도죠.
또하나의 이유는 갯벌입니다. 강화갯벌은 함수량이 높은 펄갯벌이라 빠지면 허벅지까지 차오르거든요. 몽골군이 밀물을 이용해서 물살 빠른 강화해협을 건넜다해도 조금만 지체되면 갯벌에 빠져 전투력을 잃게 되겠죠. 가뜩이나 물공포증에 시달리는 몽골군으로서는 ‘패닉’이었겠죠. 여기에 겨울철, 임진강·한강·예성강에서 떠내려오는 얼음덩어리, 즉 유빙(流氷)도 골치거리였을 겁니다. 뱃길이 아예 끊기죠. 
더구나 유목민족인 몽골군이 1년 내내 전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봄·여름에 최소한의 목축활동 등 생업에 종사할 필요가 있었죠. 봄·여름에는 모든 말들을 풀어 키워서 강하고 튼튼하게 만든 뒤 가을 무렵부터 전쟁에 투입해야 했죠. 막 추수가 시작될 무렵 점령지를 약탈할 수 있게….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하면 어찌 됐겠습니까.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되겠죠. 조수간만의 차에 따른 빠른 물살과 갯벌, 그리고 겨울철 유빙까지…. 몽골군으로서는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전쟁이었을 겁니다.

고려는 내성과 중성, 외성 등 임시수도인 강화도를 지킬 이중삼중의 성을 쌓았다.


■신의 한수였던 강화천도
그랬으니 고려 조정이 몽골의 침략(1231년)에 맞서 강화도를 피란처로 삼은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던 겁니다. 물론 강화도의 자연환경만이 고려를 지켜준 것은 아닙니다.
고려는 천혜의 요새인 강화섬에 이중삼중의 성을 쌓았는데요. 궁성에 해당되는 내성과, 도성에 해당되는 중성, 강화도 전체를 아우르는 외성까지 철통방위 태세를 갖췄습니다. 
몽골군의 공성전은 육지에서도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예컨대 1231년(고종 18) 귀주성 전투에서 몽골군은 누거·평상·대포차 등 다양한 공정무기를 동원하고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죠. 이에 70대 노익장 몽골장수는 “이렇게 작은 성이 대군을 맞아 싸우는 것을 보니 하늘이 돕는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하죠.(<고려사> ‘박서 열전’)
1232년(고종 19) 처인성 전투 때는 승려 김윤후가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撒禮塔)를 살해하는 등 충격적인 전과를 올리기도 했죠. 만약 몽골군이 강화해협을 건넜다 해도 경군 1만명과 특수부대인 삼별초,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 버티고 있던 강화도를 단기간내에 점령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1232년(고종 19) 7월 단행한 강화천도는 결과적으로 고려의 사직을 지키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이후 강화는 39년간 고려의 임시수도로 기능했다. 몽골군은 물살이 빠른 강화해협을 끝내 건널 수 없었다.(출처:문화컨텐츠닷컴)


■몽골을 쥐락펴락한 고려외교 
또 빼놓을 수 없는 고려만의 장점이 있었죠. 노련한 외교술이죠. 거란의 침입 때 세치혀로 강동6주를 차지한 서희(942~998)의 예가 있죠. 고려는 거란(요)~금에 이어 몽골(원)까지 강대국을 쥐락펴락했답니다. 오죽하면 조선의 광해군(1608~1623)은 다쓰러져가는 명나라만 주야장천 섬기던 신료들에게 “제발 고려 외교 좀 배우라”고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고려 외교가 대단했는지 한번 볼까요.
예컨대 몽골이 고려의 강화 천도를 질책하자 고종은 천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유민이 흩어지면 누가 해마다 공물을 마련해 상국(몽골)을 섬기겠습니까. 차라리 섬으로 들어가서 변변치않은 토산물이나마 상국에 올리는 게 낫습니다. 그것이 신하의 명분을 잃지 않는 상책입니다.”
고종은 “어디에 있건 간에 정성을 바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면서 “신하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몽골을 달랬습니다.(<고려사> 1232년 11월)
1256년(고종 43) 9월 고려 사신 김수강이 “몽골 군대를 철수시켜 달라”고 몽골 황제인 몽케(헌종·1251~1259)에게 요구합니다. 황제는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면 몽골군도 철수하겠다”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김수강의 언변이 기막힙니다. “사냥꾼에게 쫓긴 짐승(고려 조정)이 굴 안으로 들어갔는데, 사냥꾼(몽골)이 굴 앞에서 지키고 있으면 무서워서 나오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김수강의 기막힌 비유에 감탄한 몽케는 “네가 참 사신이다. 마땅히 두 나라의 화친을 맺어야 한다”며 군사를 돌렸습니다.

1256년 몽골황제가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면 몽골군도 철수하겠다”고 조건부로 거절했다. 그러자 김수강은 “사냥꾼에게 쫓긴 짐승(고려 조정)이 굴 안으로 들어갔는데, 사냥꾼(몽골)이 굴 앞에서 지키고 있으면 무서워서 나오겠느냐”고 대답한다. 몽골황제는 “네가 진짜 사신이구나”라면서 군사를 돌렸다.(<고려사> ‘열전 김수강전’)


■쿠빌라이의 극진한 환대
고려는 때로는 항전으로, 때로는 줄타기 외교로 몽골의 6차례 침입을 만 28년간이나 버텼습니다. 
그러나 오랜 전란으로 지쳐갔습니다. 고려 고종(1213~1259)은 급기야 1259년(고종 46) 태자인 전(원종)을 항복사절로 보냅니다. 그런데 도중에 변수가 생깁니다. 몽골의 황제인 몽케(헌종)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죠.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고려 태자(원종)는 강남에서 작전을 펼치다 북상 중이던 쿠빌라이(훗날 원 세조·재위 1260~1294)에게 뵙기를 청합니다. 이때 몽골 조정의 강회선무사 조양필이 쿠빌라이에게 “제발로 찾아온 고려 태자를 홀대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합니다.
“고려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산과 바다로 막혀있어 군사를 동원한지 20여 년이 되었는 데도 신하로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고려 태자가 조회했으니 후히 대접하소서. 일단 돌아가면 오지 않을 겁니다.”
쿠빌라이 역시 ‘불감청이언정고소원’을 외치며 기뻐합니다.
“고려는 예전에 당태종도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세자가 제발로 걸어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구나.”(<고려사절요>)
마침 고려 고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이 당도했습니다. 쿠빌라이는 “제발로 찾아온 고려 세자를 고려왕으로 세워 귀국시키면 군사를 동원하지도 않고 한 나라를 얻는 셈”이라고 기뻐했습니다. 
“지금 넓은 하늘 아래 신하로 복종하지 않은 나라는 고려와 송나라 뿐이었는데…. 이제 송나라도…멸망 직전이다. 고려도 이제 (몽골에) 조회하고 부왕(고종)의 상을 당해 처분을 기다리니….”(<고려사절요>)
원나라로서는 그야말로 ‘기화(奇貨)’를 얻은 셈이었죠. 20여 년 동안 그토록 원나라를 괴롭혔던 고려가 제발로 화의를 청한거니까요. 쿠빌라이가 고려를 위해 선심공세에 나섭니다.
“의관은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 개경 환도 시기는 고려의 형편대로 하라….”(<원고려기사> 1260년 6월)
한마디로 고려의 제도와 풍속은 존중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를 ‘불개토풍(不改土風)’ 혹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 하는데요. 쿠빌라이는 고려에 큰 선심을 베풀었다면서 두고두고 공치사합니다. 
“원나라에 조회하는 나라가 80여 개국인데, 짐이 그대 나라처럼 예로 대접하는 것을 보았는가.”
그러나 쿠빌라이의 선심이 몽골(원나라)의 발목을 잡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몽골의 5대 황제가 된 쿠빌라이(원 세조)는 고려가 항복해오자 “예전에 당태종도 정벌하지 못한 나라(고구려를 지칭)가 아니냐. 그런 나라 세자가 제 발로 걸어왔으니 하늘의 뜻이다!”라고 기뻐했다.


■‘세조의 유훈을 어찌 하시려구요?’
고려는 훗날 몽골(원나라)이 내정 간섭을 강화할 때마다 이 쿠빌라이(세조)의 유훈, 즉 ‘세조구제’를 들먹이며 번번이 좌절시킵니다. 고려는 항복한지(1259년) 11년이 지난 1270년이 되어서야 개경으로 환도합니다. ‘개경 환도 시기를 고려 형편대로 하라’는 쿠빌라이의 약속을 들먹거리며 차일피일 미뤘던 겁니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몽골은 1269년(원종 10년) 고려 재침을 진지하게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원나라 조정의 공론은 반대였습니다.  
“승리할 수는 있으나 최선은 아닙니다. 이기지 못하면 국가의 위엄이 땅에 떨어집니다. 저들이 강과 산의 험함을 믿고 바다에 식량을 쌓아 가만히 지키기만 하면 무슨 계책으로 취할 수 있겠습니까. 100만 군대라도 금세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원고려기사>)
쿠빌라이, 즉 원 세조가 유훈을 남긴지 60여년이 지난 뒤에도 그랬습니다.
1323년(충숙왕 10년) 몽골(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설치, 사실상 흡수통합을 강행하려 합니다. 그러자 이제현(1287~1367)은 몽골 조정에 기막힌 상소문을 올립니다.
“일찍이 세조(쿠빌라이) 황제께서 고려 고유의 풍속과 제도를 유지하라 했는데…. 그런데도 성(省)을 설치하려 한다면 세조 황제의 유훈은 어찌할 것입니까. 세조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세조의 ‘유훈’을 들먹거리니 어쩌겠습니까. 원나라는 ‘성의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죠.
물론 어떤 이들은 달리 말하죠. 몽골(원나라)이 고려를 주 공격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또 공격에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다구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몽골이 고려를 특별히 봐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런저런 사례를 살펴봤듯이 ‘20여 년 간의 공격에서 끄덕없는 나라’ ‘과거 당나라 태종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 ‘세계제국 가운데 굴복하지 않은 유이(唯二)의 나라’로 표현했지 않았습니까. 경향신문 선임기자
(이 기사는 ‘이경수의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못했나>, 푸른역사, 2014년’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