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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무령왕 부부 위로 황금 꽃비가 내렸습니다…무령왕릉 2715개 연꽃·원형장식의 비밀

무령왕릉 발굴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 발굴 50주년을 맞아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무령왕릉 발굴 50주년-1971~2021)을 찾은 필자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선 출토된 묘지석에 따라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주인공(무령왕 부부)과 축조연대(523~529년)를 알 수 있는 무덤이라는 것이 떠오를 법하다. 5232점의 출토품 가운데 무려 12건(17점)이 국보로 지정되었을만큼 유물의 가치가 뛰어나다는 점도 관전포인트이다. 즉 왕과 왕비가 착용한 금제관식과 금귀고리, 금목걸이, 금제뒤꽂이, 은제허리띠, 금동신발, 용과 봉황무늬 둥근고리큰칼, 금·은 팔찌, 금·은장도, 베개, 발받침 등이 모조리 국보로 지정됐다. 

무령왕릉 안에서 확인된 황금 연꽃 모양의 장식. 금함유량은 93.4~94.1%(큰 것)과 98.8~99.5%(작은 것)로 순금(24K)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금 연꽃 668점, 은연꽃 137점 등 805점의 연꽃 장식이 수습됐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릉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 또하나의 ‘졸속발굴’이다. 발굴기사를 낙종한 기자가 “왜 나한테 알리지 않았냐”며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 직원의 뺨을 때린 것은 정말 기막힌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된 발굴 경험이 없던 조사단의 우왕좌왕과, 역시나 발굴의 취재경험이 없던 기자들의 무리한 경쟁이 어우러져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는 것, 그래서 조사단이 ‘하룻밤(8일 밤 10~9일 아침 9시) 사이에’ 무덤 안 바닥에 놓인 유물을 큰삽으로 쓸어담아 쌀 포대 2자루에 넣어 서둘러 싣고 나갔다는 것 등은 ‘한국 고고학의 흑역사’로 운위되고 있다.

금 혹은 은으로 제작됐고, 달개가 있고 없고, 구멍이 있고 없고, 크기가 크고 작고한 다양한 형식의 연꽃장식이 무덤 안에서 수습됐다. 왕과 왕비의 장례의식과 관련된 장식으로 보인다. 일부는 왕과 왕비의 옷과 베개, 발받침을 장식하는 데 쓰였을 것이지만 대부분은 장례를 위해 쳐놓은 휘장이나 관을 덮은 천에 붙였거나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러다 휘장이나 천, 관이 썩었을 때 우수수 떨어져 흩날렸을 것이다. 무령왕과 왕비는 연꽃비를 맞은 것이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순금 연꽃잎 668개는 왜 만들었을까
하지만 국보 유물 이야기와 졸속 발굴 이야기는 수십년간 단골메뉴로 다뤄온 기삿거리가 아닌가. 새로운 뉴스를 기다리는 독자들에게는 식상한 아이템이 아닐까. 특별전을 관람하기 위한 좀 새로운 관전포인트는 없을까.
필자의 무릎을 치게 만든 아이템이 보였다. 바로 수백개의 ‘연꽃 모양 장식’(화형장식)을 배열해놓은 장면이었다.
국립공주박물관이 세어본 금제와 은제, 동제 등 다양한 연꽃장식의 수는 805점에 달했다. 이중 금제 연꽃은 668점, 은제 연꽃은 137점이었다. 금제의 경우 지름이 3.8~4㎝ 되는 큰 것도, 1.2~2㎝ 정도인 작은 것도 있었다. 금제 연꽃장식의 금함유량은 93.4~94.1%(큰 것)과 98.8~99.5%(작은 것)이었다.

순금(24K)에 가까운 금은제 장식을 668개나 제작했다는 것이다. 지름이 6㎝ 정도되는 은제(137점)의 순도도 90%를 훌쩍 넘겼다. 

연꽃장식 말고도 금·은·동 원형장식이 1910점이나 쏟아졌다. 이 가운데 순금제만 1039점에 이른다. 역시 연꽃장식처럼 옷이나 천, 휘장 등에 붙어있다가 나중에 흩날리듯 떨어졌을 것이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그 중 달개 달린 대형 연꽃장식은 왕비의 팔찌 부분과 굽은옥 부근, 그리고 왕비의 머리 쪽에 있던 탁잔 근처에 밀집되어 있었다. 장식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왕비의 복식과 장신구에 꿰매어서 치장했을 것이다. 작은 쪽에 속하는 연꽃장식은 무령왕의 베개와 발받침의 표면장식에 쓰인 것과 똑같다. 무령왕의 허리띠와 큰 칼 부근에서도 달개가 없는 연꽃장식이 출토됐는데, 이 또한 왕의 옷과 장신구를 꾸미는데 썼을 것이다. 
하지만 왕과 왕비의 치장에 800점이 넘는 연꽃장식을 전부 붙였을까. 연꽃장식 가운데는 구멍이 없는 것들도 있다. 또 무덤 바닥에서 마치 흩뿌려진 것처럼 확인된 연꽃장식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무덤에서는 이런 ‘연꽃장식’ 뿐 아니라 1.4~1.9㎝ 직경의 금·은·동제 ‘원형 장식’도 1910점 수습됐다. 원형장식은 금제(1039점)·은제(629점)·청동제(242점)로 구분된다.
연구자들은 이런 연꽃과 원형 장식이 무령왕과 왕비의 장례의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분석한다. 연꽃 장식을 붙이거나 꿰맨 휘장을 목관에 덮었을 수도 있고, 벽에 걸고 마지막 의식을 치렀을 수도 있다. 실제로 목관과 벽면에 뭔가를 걸었던 못의 흔적들이 보인다.

금과 은, 동제로 제작한 원형장식. 무령왕 부부의 장례의식과 관련된 장식일 것이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벽면과 천장의 전돌에 찍어놓은 연꽃무늬는?
또 전돌로 쌓은 무령왕릉의 벽과 천장은 어떤가. 무수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필자가 세어보기에 도전했다가 1000개 쯤에서 포기했다. 얼핏 보아 7000개는 물론이고 1만개도 넘을 것 같다. 이뿐이 아니다. 또한 무령왕 부부의 관장식에도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잠깐 언급했지만 왕과 왕비의 베개와 발받침에도, 청동잔과 동탁은잔에도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가히 연꽃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령왕릉에서 수습된 금은제 연꽃장식과 금은동 원형장식을 합하면 2710점이나 된다. 훗날 무령왕과 왕비의 몸에 꽃비가 내리듯 흩뜨려졌을 것이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필자는 상상해본다. 무령왕과 왕비의 장례 때 연꽃과 원형장식을 단 옷과 베개를 준비했을 것이다. 
여기에 벽에 달아놓은 휘장과 목관을 덮은 천에도 수많은 ‘연꽃과 원형 장식’을 달았거나 붙였을 것이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옷과 휘장, 관덮개 천 등이 썩으면서 수많은 연꽃과 원형 장식들이 후드득 흩날렸을 것이다. 언젠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방에서 연꽃비가 내렸던 것이다. 연꽃과 원형 장식 등 모두 2715개가 흩날리는…. 물론 왕과 왕비의 시신 위에 뿌려주는 의식을 치렀을 수도 있다. 
무령왕 부부는 왜 이렇게 연꽃으로 도배된 무덤에 묻혔을까. 인도가 원산지인 연꽃은 불교와 인연이 깊은 꽃이다. 
부처님의 탄생을 알린 것이 연꽃이었다고 한다. 또 극락세계에서는 모든 신자가 연꽃 위에서 신으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때문에 연꽃은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하는 극락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령왕릉은 서거한 무령왕 부부가 괴로움이 없으며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인 극락세계에서 살기를 기원하며 조성한 연꽃 무덤이 아닐까.

무령왕릉의 북벽.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전돌에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다. 필자가 이 무늬의 수를 세다가 포기했다. 연꽃은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하는 극락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령왕릉은 서거한 무령왕 부부가 괴로움이 없으며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인 극락세계에서 살기를 기원하며 조성한 연꽃 무덤이었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왕비의 이빨, 장인의 이름 새긴 팔찌, 그리고 비단덧신
필자의 눈을 잡아 끈 또하나의 유물은 바로 무령왕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 즉 이빨이다.   
자루에 담긴 유물더미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됐다. 지름이 1㎝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내기 힘들었다. 
처음엔 30대 여인 쯤으로 추정됐지만 연령은 확실치 않다. 치아의 장단폭을 고려한다면 아래쪽 어금니(혹은 사랑니)로 추정된다. DNA 분석에는 실패했지만 1500년 전 서거한 무령왕비의 치아로 추정되니만큼 허투루 넘길 유물이 아니다.  

왕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가 발견됐다. 지름이 1㎝ 정도밖에 안되는 치아는 삽으로 쓸어담은 자루 속에서 기적적으로 확인됐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관심을 끌 부분은 무령왕비가 착용했던 ‘용무늬 은팔찌’(국보)의 안쪽에 새겨진 명문이다.
“다리라는 장인이 경자년 2월(520년) 대부인(왕비)에게 230주이(主耳·단위)를 들여 만들었다”(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삽主耳)는 내용이다. 백제 최고의 장인이었을 ‘다리’가 왕비, 한 분을 위한 팔찌를 제작한 뒤 자신의 사인을 새겨넣었을 것이다. 
장인의 자부심이 대단했고, 그런 장인이 바친 팔찌를 무령왕비가 생전에 끼고 다녔을 것이다.    
여기서 ‘230주이’라는 대목이 흥미롭다. 이 팔찌의 무게는 167g이었다. 그렇다면 1주이는 0.72~0.73g일까. 이것이 백제의 무게단위라면 1g도 채 안되는 무게를 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2715개나 되는 금은동제 연꽃판 및 원형장식판은 어떻게 제작했을까. 아마도 대량으로 마련해놓은 일정 규격(일백주이 혹은 이백주이)의 금·은·동판을 선택해서 국화빵 찍듯이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무령왕비가 착용했던 ‘용무늬 은팔찌’(국보). 안쪽에 “다리라는 장인이 경자년 2월(520년) 대부인(왕비)에게 230주이(主耳·단위)를 들여 만들었다(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삽主耳)”는 명문이 새겨져있다. 백제 최고의 장인이었을 ‘다리’가 왕비, 한 분을 위한 팔찌를 제작한 뒤 자신의 사인을 새겨넣었을 것이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제사상에 올린 은어, 태국산 구슬
또하나 관심을 끌만한 유물은 왕과 왕비가 금동신발 속에 덧신었던 ‘비단(금·錦) 신발’이다.
금(錦), 즉 비단은 여러 색실을 사용하여 무늬를 넣어 짠 직물이다. 후한 시대에 편찬된 <석명>(자전의 일종)은 “금(錦)은 금(金)과 같은 비단(帛)이라 해서 금(錦)이라 했다”고 기록했다. 황금과도 같은 직물이라는 뜻이다.
이 비단신발의 흔적이 무령왕과 왕비가 신었던 금동신발 속에서 확인됐다. 특히 왕비의 금동신발 안에서 발견된 직물덩어리는 비단 신발의 신바닥과 신울·신코·뒤축 부분이었음을 확인했다. 왕의 신발에서도 비단 덧신이 보였는데, 촘촘한 바느질 흔적이 역력했다.

무령왕비의 금동신발 속에서 확인된 비단신발의 흔적. 왕비의 금동신발 안에서 발견된 직물덩어리는 비단 신발의 신바닥과 신울·신코·뒤축 부분이었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또하나의 유물조합은 무령왕과 왕비를 위한 제사상이다. 애초에는 무덤방과 접한 무덤길에서 발견된 흑칠 나무판의 용도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나무판의 표면에 백색의 둥근테가 그려져 있다는 정도로만 보고됐다. 그런 탓에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둥근테의 흔적이 그릇의 밑바닥 굽이 놓여있던 흔적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해서 무덤방과 무덤길에 널브러져 있던 청동그릇의 밑바닥을 그 둥근 흔적과 맞춰보니 꼭 맞았다. 이 나무판은 왕과 왕비를 위한 제사상이었던 것이다.
맨 앞쪽에는 청동접시 2점이, 그 뒤로는 청동그릇과 청동잔이 2점씩 배치됐다. 무덤방과 무덤길에 흩어져있던 청동숫가락 및 젓가락 1벌씩도 제사상과 관련된 유물인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제사상에 놓인 청동그릇에서 세마리분의 은어뼈 등이 청색으로 변색된채 확인됐다. 무령왕과 왕비의 제사상에 은어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무덤방과 접한 무덤길에서 발견된 제사상. 세마리 분의 은어뼈가 청색으로 변색된채 청동그릇 안에서 확인됐다. 무령왕과 왕비의 제삿상에 은어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 부부는 왜 거꾸로 누웠을까
또하나 허투루 넘길만한 ‘소소한’ 관심거리가 있다. 무령왕릉에서는 무려 1279점의 못과 꺾쇠가 확인됐다. 그중 123점은 왕과 왕비의 목관에 사용된 못이었다. 목관에 사용된 못의 머리에는 직물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널방 내부나 혹은 목관을 직물로 장식했음(덮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 나머지 1156점의 못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연구자들은 왕과 왕비의 목관 외에도 여러 목재편이 무덤방 입구 쪽에서 널브러져 있는채 확인된 것이 주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목재와 못은 무덤길과 무덤방 사이에 설치된 출입문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그밖에도 나무로 만든 구조물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무덤 안에서 여러 목재편이 무덤방 입구 쪽에서 확인됐다. 목재편은 무덤길과 무덤방 사이에 설치된 출입문의 흔적으로 추정된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덤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있던 구슬을 세어보니 무려 3만1210점이었다. 금과 은, 옥, 흑옥, 유리 등 다양했지만, 유리구슬이 3만741점에 이르렀다. 구슬의 지름은 0.1~0.6㎝ 정도 되었다. 납유리, 소다유리, 포타쉬 유리 등 산지분석 결과 원료에 포함된 납의 산지가 태국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백제가 중국 남조는 물론 동남아시아와도 교역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을 앞두고 왕과 왕비의 목관이 완벽하게 복원됐는데, 그 가운데 왕의 관에만 부착된 마구리 장식이 눈길을 끈다.
이 마구리장식은 편백나무를 깎아 다듬고 그 위에 은판을 씌워 금판을 단 못으로 고정했다. 장식에 사용된 은판(99.1~99.8%)과 못머리 금판(91.3~94.1%)의 순도는 높았다. 그런데 출토 당시에는 이들 두고 현금(거문고·고구려에서 발생한 6줄로 된 현악기)의 마구리 장식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이번 복원과정에서 무령왕 목관의 전·후면에 부착된 마구리 장식으로 밝혀졌다. 

무령왕과 왕비가 누운 방향은 남쪽이다. 당시 중국 남조와 고구려 고분에서도 그런 예가 보인다. 왜 머리를 남쪽으로 두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반면 왕비의 목관에는 그러한 마구리장식이 보이지 않았다.     
유물의 출토 지점으로 미루어본 왕과 왕비가 누운 방향도 참 특이했다. 왕과 왕비가 무덤방의 긴 축과 평행하게 안치되었고, 무엇보다 무덤문의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다. 
보통 매장할 때 ‘죽은 자는 북쪽에 머리를 두고, 산 자는 남쪽을 향한다’는 관념에 따라 머리를 북쪽으로 둔다. 그런데 왜 무령왕 부부의 방향은 남쪽일까. 그렇지만 무렵 중국 남조(420~589년)의 귀족묘와 고구려에서도 그렇게 남쪽으로 머리를 둔 사례가 심심치않게 보인다. 이런 방향이었을까. 해가 비치는 남쪽에 두면 부활할 수 있다는 염원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아직도 명확하게 연구된 바가 없다.

이번 특별전을 앞두고 왕과 왕비의 목관이 완벽하게 복원됐는데, 그 가운데 왕의 관에만 부착된 마구리 장식이 눈길을 끈다. 이 마구리 장식은 출토당시에는 현금(거문고)의 부속품으로 오인됐지만 왕의 관장식인 것으로 밝혀졌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백제의 중흥군주가 외친 ‘누파구려 갱위강국!’
무령왕(501~523)은 어떤 분일까. 사실 누구의 아들인지는 확실치 않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동성왕(479~501)의 둘째아들이라 했다. 그러나 <일본서기> 본문에는 개로왕(455~475)의 아들이라 했고, <일본서기>의 주석으로 인용된 <백제신찬>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477)의 아들(동성왕의 배다른 형제)이라 했다.  40세의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무령왕의 앞날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백제는 풍전등화에 놓여있었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475년)으로 한성이 함락된 후 쫓겨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비명횡사한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475~477)과 삼근왕(477~479)이 피살(문주왕)되거나 일찍 죽고(삼근왕)만다. 그나마 동성왕이 권토중래를 노렸지만 그 역시 귀족세력인 백가에게 살해된다. 무령왕은 이렇게 국력이 쇠잔해진데다 귀족간 세력다툼으로 혼란했던 그 때에 왕위에 올랐다.

무덤 바닥에 떨어져있던 구슬 3만1210점이 수습됐다. 이중 유리구슬이 3만741점에 이르렀다. 구슬의 지름은 0.1~0.6㎝ 정도 되었다. 일부 유리구슬의 산지는 태국으로 밝혀졌다. 백제가 중국 남조는 물론 동남아시아와도 교역했음을 웅변하고 있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은 눈 앞의 난제들을 하나하나 풀었다. 창고를 열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휼했고, 제방 등 수리시설을 확대했다. 526∼536년 사이의 중국(양나라) 자료인 <양직공도>에는 백제가 반파·탁·다라·전라(이상 가야)와 사라(신라), 지미·마련·상기문·하침라(섬진강 유역) 등까지 세력을 떨쳤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숙적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오히려 우세를 점했다. 502~512년 사이 백제가 고구려군을 물리친 기록이 <삼국사기>에 여러차례 등장한다.
드디어 무령왕은 재위 말년인 521년(무령왕 21)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당하게 밝힌다. 이것이 “여러차례 고구려를 깨뜨려…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누파구려(累破句麗) 갱위강국(更爲强國)’의 선언이다.
누란의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고 중흥의 발판을 마련한 무령왕은 2년 뒤인 523년(무령왕 23년) 서거한다. 무령왕은 3년 뒤(526년) 서거한 부인과 함께 송산리 야산에 합장된다(529년). 

1933년 가루베가 일본 <고고학잡지>(23-9호)에 게재한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전경과 고분의 위치. 5호분과 6호분 사이의 봉분에 ‘현무’라고 표기해놓았다. 가루베는 또다른 전돌무덤인 6호분을 무령왕릉이라고 단정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가루베의 오인 덕분에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무령왕 부부의 합장묘가 어느 곳에 있는 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공주 일대의 고분을 닥치는대로 조사(도굴)하러 돌아다니던 일본인이 있었다. 공주고보 교사였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이었다. 그런 그 자의 시선을 잡아끈 고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송산리 6호분이었다. 가루베는 당국(조선총독부)에 알리지도 않고 이 고분을 무단으로 파헤쳤다.(1931~33년)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루베는 6호분 뒤에도 고분의 봉분 같은 둔덕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무령왕은 누란의 위기에 빠진 백제를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중흥군주였다. 무령왕은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제 백제는 고구려를 여러차례 꺾었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누파구려 갱위강국’을 선언했다.

그러나 가루베는 자신이 무단발굴(도굴)한 6호분을 무령왕릉으로 단정짓고, 그 뒤의 둔덕은 6호분(무령왕릉)의 수호신으로 조성된 이른바 현무릉으로 여겼다.
만약 가루베가 무령왕릉의 존재를 확인하고 무단발굴(도굴)을 자행했다면 어땠을까.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렇게 무령왕 부부의 합장릉은 선무당(가루베)의 눈길을 가까스로 피했다. 
그로부터 다시 40년이 지난 1971년 7월 5일이었다. 여름철만 되면 물이 새거나 습기에 찼던 6호분을 위한 배수공사 도중이었다. 그런데 6호분 봉토의 북쪽을 파고 들어가던 인부의 삽이 뭔가 단단한 물체에 ‘깡’하고 부딪쳤다. 그것은 전돌(벽돌)이었다. 
무령왕 부부의 합장묘가 1442년 만에 현현하는 순간이었다. 이후의 발굴과정은 앞어 밝힌대로 ‘흑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1971년 7월8~9일 사이. 유물들이 무덤 바닥에 나무뿌리에 엉킨채 널브러져 있다. 그중 연꽃모양 장식도 보인다. 취재진과 조사단이 한데 엉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자루에 쓸어담은 유물의 가치
그러나 ‘흑역사’만을 강조하면 곤란하다. 자루에 담겨진 유물은 서둘러 짠 상자에 옮겼고, 그후 수십년의 세월을 거치며 하나하나 분류하여 도시락통 같은 밀폐용기에 담았다. 그렇게해서 발굴현장에서는 보이지 않던 무령왕비의 금동신발 뒷꿈치와 신발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름 1㎝에 불과한 무령왕비의 치아도 확인됐다.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2715점에 이르는 금·은·동의 연꽃 및 원형장식도, 3만점이 넘는 구슬도, 1200점이 넘는 못도 그렇게 찾아냈다.
또한 기자들의 무리한 취재 경쟁 또한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엔 기자들도 무령왕릉 같은 엄청난 발굴의 취재경험이 없었다. 고고학 발굴단이 자행한 시행착오를 기자들도 똑같이 공유한 것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도리어 사진기자들이 당시로서는 첨단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 경황이 없어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현장 상황을 보완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내년(2022년) 3월 6일까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에는 발굴유물 5232점이 선보이고 있다. 발굴된지 50년이 지나 상당한 연구가 진행됐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직도 규명하지 못한 부분이 너무도 많다. 
특별전이 열리는 기획전시실 앞에 붙여놓은 나태주 시인의 시 한편이 가슴에 와닿는다.
“옛다 이거 받아라 한꺼번에 주신 5000개의 선물, 그러나 한꺼번에 받기 두손이 너무 모자라 아, 작은 가슴이 너무도 모자라 어찌할까요?”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이 기사를 위해 한수 관장, 최장열 학예연구실장, 곽홍인·윤지연 학예연구사 등 국립공주박물관 관계자와 권오영 서울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 이장웅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사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