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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미인박명인가. 지광국사현묘탑의 팔자

미인박명인가.

지광국사현묘탑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인’이란 우리나라 부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뜻이고, ‘박명’은 그만큼 탑의 팔자가 기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절이 완전히 불타는 수모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탑은 한일합병 직후인 1912년 산산이 분해 되어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돌아온다.

그런데 연구자 이순우가 발굴공개한 자료, 즉 후지무라 토쿠이치라는 일본인이 쓴 ‘현묘탑 강탈시말’이라는 글을 보면 90년간 베일에 쌓였던 현묘탑 반출의 이력이 낱낱이 드러난다.(이순우의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하늘재)

경복궁 내에 서있는 지광국사현묘탑. 지금 해체 복원작업 중이다. 

이 글은 후지무라가 편찬한 ‘거류민지석물어(居留民之昔物語·1927년간)’에 들어있다. 

그가 밝힌 전말은 이렇다.1911년 9월쯤 모리라는 인물이 원주 부론면 정주섭 소유지 폐사에서 현묘탑을 발견하고 이를 매수한 뒤 서울로 반출한다.

“정의 소유지에 버려져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매각하고 나서 경작하는 데도 편리하고, 반출 때는 마을 사람들이 운반 등 기타 잡역에 종사하는 바람에 때 아닌 수입이 생겨 모리씨를 고맙게 생각할 정도”(후지무라 자료)였다는 것이다.

일본인 실업가 와다 쓰네이치는 모리에게 이 탑을 사서 자기 집(원래 오성 이항복의 집)에 둔다. 그런데 오사카에 사는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는 대리인을 통해 이 탑을 3만1천5백원에 구입한다. 이 때가 1912년 5월31일. 탑은 오사카로 반출된다. 

하지만 문제가 생긴다. 당시 총독 데라우치가 그해 10월쯤 현묘탑 문제를 제기한다. 조선총독부가 모리와 와다 등 탑 구입 관련자들을 구류에 처하고 소환하는 등 수사에 나선 것이다. 총독부는 “현묘탑은 국유지에 있던 것”이라며 이같은 강경책을 썼다.

이순우는 “당시 데라우치의 관할(조선)에 있던 문화재가 내지(일본)로 허락 없이 반출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총독부의 서슬에 놀란 와다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이 후지다에게 팔았던 현묘탑을 되사서 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이 때가 1912년 12월 6일. 이순우는 “이런 과정을 볼 때 일본에 반출된 탑이 국내로 돌아와 경복궁 경내에 세워진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1915년이 아니라 1912~13년 사이일 것”이라고 보았다. 후지무라가 이 ‘강탈시말’을 쓴 이유도 웃긴다.

일찍이 통감부 이사청(理事廳)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은 전력이 있는 후지무라는 테라우치 총독에 대한 극심한 반감으로 이 글을 썼다.

후지무라는 데라우치를 겨냥, “사유물(정씨의 소유)인 현묘탑을 국유물이라고 해서 강탈해간 것은 위법난폭한 일”이라고 맹비난하고 있다.

그가 붙인 ‘현묘탑 강탈시말’의 소제목도 ‘관헌의 횡포와 관리의 비상식’이다.

후지무라가 얼마나 테라우치와 조선총독부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는지 알 수 있다.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졌던 사자상. 그러나 실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었다.

그런데 데라우치는 현재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고, 특별전까지 연 이른바 ‘서역미술품’들을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또 일본으로 이미 반출됐던 경천사 10층 석탑도 직접 교섭에 나서 다시 반입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총독 데라우치는 조선을 끔찍이 생각했던 인물인가.

“조선의 역사상 또는 미술상 중요한 물건은 모조리 반도에 보존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한 총독”이라는 평가(후지타 료우사쿠)도 일본인 사이에 있는 건 사실이다.

당시 데라우치는 일본에 합병된 조선의 지도자(총독). 따라서 당시로서는 조선의 문화재가 굳이 사사로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다스리는 조선에도그 같은 문화재가 소장돼 있어야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닌가.

전적으로 개인적인 욕심이었다는 얘기다. 어쨌든 후지무라의 이 글로 우리는 자칫 영원히 묻힐 수 있었던 지광국사 현묘탑의 유출과 반입 사연을 알게 된 것이다.

법천사를 발굴조사했던 정영호 전 단국대 교수의 분석이 재미있다.

“왜 일본인들이 이 현묘탑을 탐냈을까. 탑도 아름다웠고 운반하기도 좋았을 거예요. 이 탑의 세부구조를 보면 분해하기 너무 쉽게 만들어졌거든요. 게다가 탑이 해상(남한강)으로 운반하기 좋은 곳에 있었던 측면도 있고….”

그런데 최근 현묘탑의 수난 사례가 하나 더 확인됐다. 

오래전부터 도난당해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현묘탑 네 귀퉁이의 사자상이 알고보니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엄연히 존재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현묘탑을 전면해체 및 보존처리하면서 자료를 뒤지는 과정에서 확인한 것이다. 1957년 현묘탑 복원공사를 마치면서 도난의 가능성이 짙은 사자상 4개를 수장고에 보관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1957년 당시 탑 복원에 참여했던 정영호 교수조차 "지광국사탑이 박물관에 있다는 게 정말이냐”고 반문하며 “이제까지 사자상은 도난, 반출돼 없어진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다른 연구자도 사자상이 박물관에 수장됐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라 했다니 참 어이없는 일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