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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바이칼 원주민 문화는 어디로 갔나?

2007 11/06ㅣ뉴스메이커 748호

소수 종족 시베리아인 전통은 간 데 없고 러시아 주류문화 일색으로 변모


탈치 야외 목조민속박물관. 오늘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신동호 기자>


알혼 섬에는 대도시에서 보기 힘든 통나무집 바냐가 있다. 러시아식 사우나인 바냐 이용법은 필자의 전공이나 마찬가지다. 2년 전 이르쿠츠크외국어대 박근우 교수가 찾아낸 바이칼 호숫가의 바냐에서 정재승 소장과 함께 바이칼식 사우나를 하며 꼬박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그날 밤, 바이칼에는 평소보다 열 배나 커 보이는 보름달이 떴다. 물위에 비친 달빛은 한 줄기 은빛 카펫처럼 반짝이며 호수를 가로질러 사우나까지 연결되었다. 어디엔가 몸만 숨기면 누구나 나무꾼이 되고, 금방이라도 선녀가 목욕하러 내려올 듯한 분위기였다.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답사단이 알혼 섬에서 하룻밤 묵은 후지르 마을의 통나무집. 대도시에서 볼 수 없는 통나무집 바냐를 즐길 수 있다. <신동호 기자>
 
바이칼의 호리도리 나무꾼과 하늘 신 쿠르부스탄의 셋째 딸인 백조 공주의 연애담이 언제라도 재현될 것 같은 마법의 시간이었고, 이방인들은 바이칼의 보름달, 달빛 길, 바냐에 매혹되었다. 무릉도원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곳이었다. 정 소장은 바이칼의 무릉도원을 ‘반야만월’이라고 불렀고, 박 교수는 바냐의 보름달을 반야만월로 해석한 그의 재치에 감탄했다. 

바냐를 100% 즐기는 법이 있다. 우선 주먹만한 자갈이 가득 담긴 페치카를 자작나무·통나무 장작으로 두세 시간 달군다. 그 다음 사우나 도크에 들어가 자갈 페치카 위에 계속 물을 부으며 온도를 거의 100도 가까이 올리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바냐에서 뜨겁게 몸을 달구고, 뜨거워진 나무 판에 누운 다음 싸리비처럼 생긴 회초리 베닉으로 온 몸을 마구 두드리면 러시아식 사우나는 절정에 이른다. 용감한 사람들은 데워진 몸이 식기 전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이칼 물에 뛰어든다. 

뜨거운 증기가 가득한 사우나에서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 고깔모자를 쓰면 더 좋다. 조금 아쉬움이 남으면 뜨거운 물을 베닉에 적셔서 어깨부터 엉덩이까지 지긋하게 눌러주면 뜸의 효과를 내는 훌륭한 마무리가 된다. 전신에 베닉 세례를 받는 김문석 기자와 시미즈 교수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알혼 밤하늘에 가득했고, 윤명철 교수는 베닉을 더 세게 내리쳐달라고 주문하며 싸리나무 회초리가 몸에 떨어질 때마다 기합을 외쳤다. 그 덕분에 필자의 손가락에는 커다란 물집이 잡혔다.

알혼 여행을 마치고 밤늦게 이르쿠츠크로 돌아올 때는 야성에서 문명 세계로 복귀하는 느낌이었다. 들판에 연필로 줄을 그어놓은 듯한 어둑한 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불빛의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극작가 체호프가 사할린 여행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길에서 이르쿠츠크를 보고서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실감났다. 거친 타이가와 황량한 스텝이 끝없이 이어지고, 길을 따라 도열한 자작나무가 바람에 따라 물결치듯 몸을 뒤척이는 시베리아 황야 한가운데서 러시아정교회와 유럽문명을 보았으니 체호프의 감격이 어떠하였을지 짐작된다. 

시내 곳곳에는 문필가의 동상과 연극극장과 오페라, 영화관, 대학들이 들어서 있다. 인구 60만 남짓한 소도시에 대학이 무려 20개나 된다. 드라마센터와 레퍼토리 극단까지 있다. 레닌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밤필로프와 현대 산문의 대가 라스푸틴을 비롯한 다수의 소비에트 예술가들이 수도를 마다하고 이르쿠츠크에 살기를 고집한 데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다. 

푸슈킨과 동시대인들이었던 문인재사들이 유형수 신분으로 시베리아에 와서 건설한 이상향이 이르쿠츠크가 아니던가. 제카브리스트 박물관에는 정치범이 되어 유랑했던 남정네들을 따라 시베리아에 온 여인들의 삶이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다.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의 전제정치에 반기를 든 12월 당원인 제카브리스트 혁명가들이 차르정부 전복에 실패한 뒤 검거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언도받았다. 광산지대인 치타를 비롯한 노역장에서 형기를 마친 러시아 인텔리겐차들이 하나둘 약속이나 한 듯이 모여서 독특한 문화를 일군 곳이 바로 이르쿠츠크다. 이르쿠츠크에는 12월당 혁명가들의 반항하는 지성과 자유로운 영혼이 서려 있다.

한여름에도 차가운 바이칼호수

이르쿠츠크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이기환 선임기자 일행을 박근우 교수와 함께 레나 강 상류의 고대 암각화 단지인 카축 취재를 위해 떠나보내고 필자는 신동호 단장 팀에 묻어 바이칼 인근의 어촌인 리스트비양카로 출발했다. 취재할 곳이 많아 답사팀을 두 개로 나눠서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필자는 몇 해 전의 답사에서 카축 암각화 단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강강술래, 우주인의 이미지, 고대 용의 모습, 마소가 끄는 고대 전차, 다양한 동식물, 샤먼의식으로 추정되는 광경 등이 선명한 암각화단지가 무려 1.2㎞에 걸쳐 펼쳐져 있는 장관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러시아작가연맹 소속 시인 예브게니 할아버지가 카축 암각화단지의 공식 명칭인 ‘시슈킨스크 문화재’의 관리인이었는데, 그에 따르면, 카축에는 AD 700년에서 BC 6000년 사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들이 어울려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편년은 고고학자들의 몫이다.


정재승 소장이 바이칼 호수에 발을 담갔다. 한여름인데도 물 속에 10여 초 남짓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물이 차갑다. <신동호 기자>
 
리스트비앙카 방문팀은 바이칼에 유람 온 관광객들이 한 번쯤 찾는 바이칼호수박물관에 들러 십 년쯤 공부해야 알 만한 내용을 단 한시간 만에 상세하게 학습했다. 우리는 박물관을 나와서 바이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배를 타고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오는 길목의 샤먼바위를 돌아볼 예정이었는데, 예약한 배가 나타나지 않았다. 빡빡하던 일정에 예기치 않은 공백이 생겼다. 내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두어 시간 남짓한 호사였지만, 얼른 바이칼에 발목을 담근 다음 햇볕으로 따끈해진 호숫가 바위에 올라 한가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일광욕 모드로 들어갔다. 


알혼 섬과 바이칼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한 후지르 마을의 민속박물관 내부. <김문석 기자>
문득 고향인 부산 앞바다가 눈앞에 삼삼했다. 아기자기한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있는 해운대와 광안리에 가고 싶었다. 다들 바이칼의 풍광을 칭송하지만 필자에게는 해운대가 바이칼보다 못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바위에 눕기 전 바이칼 명물이라는 훈제 생선 ‘오물(Omul)’을 먹을 때도 자갈치의 싱싱한 회가 간절했고, 투박하면서도 간드러지는 경상도 사투리가 귀에 맴돌았다. 

해운대와 다른 바이칼의 진면목은 물속에 발을 담그면 비로소 알게 된다. 한여름인데도 물속에 10여 초 남짓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바이칼 호수는 차갑다. 물에서 한기가 인다. 중앙아시아의 내륙오지 천산산맥 자락의 해발 2000m 고지에 있는 이식쿨 호수와 바이칼은 여러모로 닮았다. 이식쿨은 키르기즈 말로 ‘따뜻한 호수’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만년설이 녹아내린 것처럼 차다. 중앙아시아 소설가 칭기스 아이트마토프는 ‘따뜻한 호수’라는 이름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 대비는 신화적인 상징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신화 생성 과정을 다룬 소설 ‘하얀 배’를 이식쿨 배경으로 썼다. 바이칼 역시 ‘불이 멈춘 곳’이라는 뜻을 가졌으면서 한여름에 발을 담그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운 것을 보면 여행객이 눈을 뜨고서도 볼 수 없는 신화와 설화들이 호수 주변에 가득 서려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바이칼 할아버지와 앙가라 공주 그리고 예니세이 왕자 이야기, 나무꾼과 선녀를 닮은 호리도리 이야기, 게르만인들의 지그프리드 왕자와 닮은꼴인 황금복사뼈 알탄샤가이 전설 등 현지인 이야기꾼이 보따리를 풀면 바이칼의 이야기 세계는 멈출 수 없을 만큼 풍부하다. 

고유 언어 사라지고 의식주도 변화

바이칼 호수 유람을 마치고 이르쿠츠크로 돌아오는 길에 탈치 야외 목조박물관에 들렀다. 용인 민속촌과 비슷한 곳인데, 전시품들만 가득하고 사람 사는 냄새는 우리의 민속촌과 비교해서 덜하다. 이르쿠츠크 인근에 있던 옛날 가옥들을 이곳으로 옮겨와 박물관을 만들었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에 진출하기 전에는 원주민들이 주인이었는데도, 건물들은 대부분 러시아식 목조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에벵키와 부리야트를 비롯한 원주민 건축물이 탈치의 남쪽과 북쪽 변경에 몇 점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탈치 박물관은 시베리아의 역사를 보여주면서 오늘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오늘날의 바이칼 지역 문화를 에벵키나 부리야트를 비롯한 원주민 문화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바이칼 문화가 소수 종족 시베리아인들의 문화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막연한 추정이거나 선입견이라는 게 더 정답에 가깝다. 실제로 현지에 와서 보면 원주민의 문화 전통은 간 데 없고, 주류 문화가 러시아 일색이다. 이 글 앞부분에 시간 순으로 열거된 체험들도 사실 러시아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신들의 고향 알혼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통나무 주택도 러시아식이고 여행자의 피로를 풀게 해준 사우나 바냐 역시 러시아 전통이다. 음식, 의복, 교통수단, 언어 등 그 어디에서도 원주민 문화를 찾기 어렵다. 

원주민 문화는 인디언보호구역처럼 일정한 지역에 한정된 문화재와 유물유구, 연극배우처럼 공연을 하는 샤먼과의 인터뷰에서 찾아보는 것이 고작이다. 고대 유물인 암각화의 관리자도 러시아 시인이었고, 이르쿠츠크 공대의 고고학자들도 대부분 러시아인들이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소수 종족 현지인들도 대부분 종족 고유의 말을 잊은 채 러시아인에 동화되어 살고 있었다. 대도시뿐 아니라 농촌지역에도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는다.

말없이 흐르는 앙가라 강은 과거를 기억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소비에트가 폐업하던 시절의 인구조사를 인용한 포사이드의 저서 ‘시베리아의 제종족’에는 시베리아 주민의 수가 2100만 정도이고, 그 가운데 95%가 러시아를 포함한 슬라브인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원주민들의 수가 정말 미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시베리아를 두고 소수 종족 문화가 꽃피고 전통이 숨쉬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낭만적인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시베리아 문화를 러시아 문화와 시베리아 고유문화가 만난 하이브리드 형태로 보는 연구자들은 직접 시베리아를 견문할 필요가 있다. 막연하게 시베리아 문화를 복합적이라고 추정하는 연구자들은 전체 인구의 5% 남짓한 시베리아 원주민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원주민의 문화만 떼어놓고 보면 잡종문화다. 원주민들은 고유 언어를 버리고 러시아어를 택했다. 주거와 의복을 러시아식으로 바꾸었고, 음식과 연애 방식마저 러시아풍을 따라간다. 샤먼들의 의식에조차 러시아식 사고와 원주민 사고가 복합되어 있다.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점하는 러시아인 커뮤니티의 주류 문화는 원주민 문화를 배제한 러시아 방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시베리아를 개척한 초기 러시아 이민자들을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의 옛 사람(Starye Sibiryaki)’이라고 부른다. 이를 보면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 텅 빈 시베리아에 들어와 문명을 일군 주인들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의 과거와 원주민의 문화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후원 : 대순진리회>
양민종<부산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신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