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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베프'를 위한 마지막 선물?…국보 '인왕제색도'를 둘러싼 치명적인 억측

근자에 지난해 이건희 전 삼성회장의 유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인왕제색도(국보)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돌고 있습니다. 인왕제색도를 소유했던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2~1981)의 장손이 “이 그림이 조부의 뜻과 상관없이 숙부들과 삼성 사이에 담합으로 의심되는 부당한 거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는데요. 이 그림은 지금까지 정치에 뛰어든 소전이 선거자금을 마련하려고 삼성가에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인왕제색도’와 관련해서 소전의 가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떤 경위로 삼성가에 넘어갔는지 뭐라 언급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구요. 다만 이 ‘인왕제색도’가 어떤 작품인지, 그 작품 속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1751년 윤 5월25일)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겸재 정선(1676~1759)의 76세 작품이죠.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의 인왕산 풍경을 묵중한 필체와 대담한 배치를 통해 사실적으로 그려냈고요. ‘금강전도’와 함께 겸재의 대표적인 진경산수화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두고 두 분의 전설적인 스토리가 전하죠. 바로 ‘영혼의 브로맨스’라 할만한 두 분의 ‘지독한’ 우정이 담긴 그림이라는 겁니다. 두 분은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1671~1751)을 가리킵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등 몇몇 미술사학자들의 견해인데요. 겸재가 죽음을 앞둔 절친(사천 이병연)을 위해 그린 작품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사실 ‘인왕제색도’에는 ‘사천’이니 ‘이병연’이니 하는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 여백에 ‘인왕제색 신미윤월하완(仁王霽色 辛未閏月下浣)’이라는 글이 적혀있을 뿐입니다. 

그럼 무슨 근거로 ‘위독한 절친을 위해 그린’ 작품으로 해석할까요.
사천 이병연이 사망한 날짜(1751년 5월 29일)와, 그림의 제발(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에 주목한 건데요.
신미년 간지에 해당되는 해는 1751년이고, 그 해의 윤월(달)은 5월입니다. 또 ‘하완(下浣)’은 ‘하순’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1751년 윤 5월 하순’(신미윤월하완)에 그린 작품이라 하는데요. 
마침 <영조실록>에 “이병연이 1751년(영조 27년) 윤 5월 29일 사망했다”는 부음기사가 보이구요. 
그래서 겸재가 그림을 그린 ‘윤 5월 하순’과 사천이 죽은 ‘윤 5월29일’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영조실록>에 기록된 이병연의 사망날짜(1751년 윤5월29일)와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린 ‘1751년 윤5월 하순’을 연관짓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이와 관계된 자료가 또 있답니다. 미술사학자인 오주석(1956~2005)은 1751년 윤 5월 말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날씨란’에 주목했는데요. 즉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음력 5월 19일부터 24일까지 매일 비가 내렸습니다. 날씨란에 6일 연속 ‘우(雨)’라 했습니다. 그런데 25일자 ‘오늘의 날씨란’을 보니 ‘조우석청(朝雨夕晴)’, 즉 ‘아침(朝)까지 비가 내렸다가(雨) 저녁(夕)에 갰다(晴)’고 했습니다. 사천 이병연이 사망한 날짜는 4일 뒤인 29일이었구요. 그래서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1751년 5월 19~24일 사이 6일동안 지루한 장맛비가 내렸구요. 그 비가 25일 저녁 무렵에 그쳤을 때 겸재가 특유의 일필휘쇄(一筆揮灑·쓸어내리듯이 휘두르는 빠른 붓질로 단번에 그리는 필법)로 인왕제색도를 그린 것이라구요.
일부 연구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인왕제색도’의 오른쪽에 그려진 기와집을 육상궁(지금의 청와대 옆 칠궁) 뒷담쪽에 있던 이병연의 집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래서 지루한 장맛비 끝에 맑게 갠 인왕산의 바위 모습처럼 죽어가던 절친의 극적인 쾌차를 기원한 그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거죠.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51년 윤 5월19일부터 24일까지 연일 장맛비가 내렸다. 비는 25일 오전까지 내렸다가 저녁에 갰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겸재 정선의 ‘베프’ 사천 이병연은 그로부터 4일 뒤인 29일 사망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런 기록들을 근거로 정선이 죽음을 앞둔 친구 이병연의 쾌차를 위해 ‘인왕제색도’를 그려준 것이라고 해석했다.

■조우석청(朝雨夕晴)
그럴듯한 해석이죠. 그래서 ‘인왕제색도’를 설명한 글이나 영상에는 ‘(겸재와 사천의) 우정을 담은 화폭’ 등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맞는 이야기일까요. 물론 겸재가 이 그림을 1751년(영조 27) 윤 5월 25일 저녁, 비온 뒤의 인왕산을 그렸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절친을 위해 그렸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겸재를 숭배하는 일부 미술사학자들의 집착이 빚은 억측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장진성 서울대 교수의 논문(‘애정의 오류-정선에 대한 평가와 서술의 문제’, <미술사논단> 제33호, 한국미술연구소, 2011’) 등이 있는데요. 만약 죽음을 앞둔 절친을 위해 그린 매우 특별한 작품이라면 어떻습니까. 
그림의 제발에 절친인 ‘사천 이병연’을 언급하는게 상식이겠죠. 그러나 ‘인왕제색도’에는 이병연의 ‘이’자도 없습니다.
또 그림 오른쪽의 기와집도 이병연의 집일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겁니다. 그림의 구도상 육상궁(칠궁) 옆에 있었다는 이병연의 집과, ‘인왕제색도’의 구도와는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과거의 인물을 지나치게 존경(혹은 숭배)함으로써 ‘무결점의 위인’으로 여기고, 더 나아가 입증되지도 않은 가상의 스토리를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일리있는 견해입니다.

‘인왕제색도’의 오른쪽 밑에 그려진 기와집은 육상궁(칠궁)의 뒷담쪽에 있던 이병연의 집일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정선이 이병연을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설명을 위해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

■‘좌사천 우겸재(左차川 右謙齋)’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겸재와 사천의 브로맨스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겸재가 사천을 만난 것은 북악산 밑에서 글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김창흡(1653~1722)의 집이었습니다. 
사천(1671년생)과 겸재(1676년생)는 5살 차이였지만 평생지기를 자처했습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은 두 말할 것도 없죠. 
18세기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은 이규상(1727~1799)의 <병세재언록>은 “정겸재(정선)은 그림의 거장이다. 생동감이 넘치고 원기가 있었으며 붓놀림은 거친듯 해도 화폭 가득찬 그림이라 해도 한 점의 붓 흔적이나 먹자국도 없었다.”고 평했습니다. 

‘인왕제색도’와 청와대 입구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영조실록>의 이병연 사망기사와 ‘인왕제색도’의 제작시기(‘윤오월하순’), <승정원일기>의 날씨 기사 등을 종합하면 인왕제색도는 1751년 윤5월 25일 저녁에 그렸을 가능성은 짙다

겸재에 비해 사천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천 이병연도 당대에 ‘시의 천재’, ‘시의 화신(化身)’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분입니다. <병세재언록>은 겸재 정선을 극찬한 뒤 사천 이병연 이야기를 끼워놓는데요.
“당시에 시로는 이사천, 그림으로는 정겸재 아니면 쳐주지도 않았다”면서 “어린아이들이나 종들조차 시에 관한 한 천성인 이병연을 알고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중국의 문사들이 이병연의 시를 두고 ‘당·송대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극찬했다.”(<청장관전서> ‘청비록’)고 했습니다. 
문인 이우신(1670~1744)은 “이병연의 시골(詩骨·시인의 골격)은 흠 하나 없는 옥과 같아서 머리 털 한 올 수염 한 터럭(一髮一毛摠是詩)이 모두 시”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병연이 평생 지은 시가 1만3000~3만수에 달한다는 데요. 
“시 한 구절을 만들 때마다 수염을 잡아당겼다”면서 “수십일 동안 끙끙대며 시를 짓고 난 사천의 수염이 남아나지 않았다”(신정하·1680~1715의 <서암집>)는 기록도 있습니다. 수염을 다 뽑을 정도로 치열하게 시를 지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세간의 평가가 ‘그림은 겸재(정선), 시는 사천(이병연)’이니 ‘좌사천 우겸재’니 하는 찬사였습니다. 김창업(1658~1721)과 조현명(1691~1752)의 시를 보십시요.
“정선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 금강산이 있고부터 이런 기이함은 없었네.”(김창업의 <노가재집>)
“이병연의 아름다운 시와 정선의 그림, 좌우에서 맞아주며 주인노릇하네.”(조현명의 <귀록집>)

사천 이병연은 치열하게 시를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수십일 동안 방문을 닫고 시를 지으면서 골똘히 생각하느라 수염을 계속 잡아당겼다. 작품을 다 쓰고 나올 때에는 수염이 뽑혀서 짧아졌지만 지은 시는 상자에 가득 찼다. 그가 평생 지은 시는 1만3000~3만수 정도였다고 한다.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두 분의 콜라보가 어땠는지 한 번 볼까요. 1712년(숙종 38) 금강산 길목인 강원도 금화 현감이었던 이병연의 권유로 ‘금강산 여행’에 동반하는 데요. 겸재는 여행 뒤 금강산의 모습을 30여폭의 그림에 담아 이병연에게 줍니다. 이것이 조선판 ‘콜라보 화첩’인 <해악전신첩>입니다. 금강산 여행 중 겸재가 비로봉을 그릴 때를 묘사한 사천의 시는 두 분의 우정을 생생한 필치로 전합니다.
“나의 벗 정선은 붓이 없을 때 그림 그리는 흥취가 솟으면 내 손에서 붓을 빼앗아가네. 금강산에 들어와 쓸어내리듯 휘두른 붓질…백옥같은 만이천봉 하나하나 점찍어 그리고, 놀랍도록 꿈틀거리는 구룡폭 어지러운 비바람 일어나네….”
‘정선이 비로봉을 보자 마침 붓이 없어서 나(이병연)에게서 붓을 빼앗아 일필휘쇄로 쓱쓱 비로봉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사천의 다음 시를 볼까요. “자네와 나는 합쳐야 왕망천이 될텐데, 그림 날고 시(詩)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는 보이는구나. 강서에 지는 저 노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이병연과 정선은 시와 그림을 주고 받으면서 ‘천금을 주어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뜻인 ‘천금물전(千金勿傳)’을 새긴 도장을 찍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 장면을 보는 것 같죠. 그러나 1740년(영조 16) 이병연이 정선에게 보내는 시였습니다. 양천 현감에 제수된 정선이 임지로 떠날 때인데요. 아니 아무리 교통이 불편했다 해도 양천(지금의 서울 양천구)으로 떠나는 벗에게 ‘이별이 아쉬우니, 어쩌니’하는 시를 지었으니 좀 유별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나 이해는 갑니다.
앞서 인용한 시 중 ‘자네와 내가 합쳐야 왕망천이 된다’는 구절을 보십시요.
왕망천은 당나라 시인이자 문인화의 창시자인 왕유(699?~759?)를 가리키는데요.

소동파(1037~1101)는 시와 그림이 모두 능한 왕유를 두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고 극찬했는데요.
이병연은 바로 소동파의 표현대로 ‘겸재 자네의 그림과 나(사천 이병연)의 시를 합쳐야 비로소 완전체로 거듭난다’고 한 겁니다. 헤어질 때의 나이가 70살(이병연)과 65살(정선)이었으니 단순한 호들갑은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두 분 다 고령이었으니 한번 헤어지면 영영 못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이때 두 분은 ‘몸은 비록 떨어졌지만 작품으로는 하나가 되자’고 약속합니다. 시(이병연)와 그림(정선)을 주고받아 ‘시화첩’을 만들자는 건데요. 겸재가 양천현감으로 떠난 지 1년 뒤(1741년)에 이병연이 쓴 편지를 봅시다.
“나와 겸재 사이에 시와 그림을 주고받자는 약속을 했는데, 약속대로 왕복을 시작한다.(與鄭謙齋 有詩去畵來之約).”
그렇게 만들어진 ‘콜라보’ 작품이 바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입니다. 서울과 서울 근교 한강 일대 이름다운 경치를 화첩으로 꾸민 건데요. 배를 타고 양천 10경을 비롯한 한강 주변의 명승을 그리고(겸재), 이 그림에 붙인 시(사천)를 담았습니다. 
이중 두 노인(사천과 겸재)이 소나무 아래서 완성한 작품을 보는 그림(‘시화환상간’)이 있습니다. 
‘자네의 그림과 나의 시를 바꾸자’(詩畵換相看)’는 사천의 편지글이 적힌 그림인데요. 그 옆에 ‘천금을 준다 해도 남에게 넘기지 않는다’는 ‘천금물전(千金勿傳)’이라는 도장까지 찍혀있습니다. 평생 나눠온 ‘우정을 결코 돈으로 바꿀 수 없다’고 다짐한 거죠.
제자 박사해(1711~?)가 두 분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데요.
“소리울림은 고요한데 글의 꾸밈과 생각이 그윽하고 묘한 것은 겸재 노인의 ‘그림시’요, 쇠와 돌이 쨍그렁하듯 핍진한 것은 사천선생의 ‘시그림’이다… 사천이 바라보면 겸재의 그림이 바로 시이고, 겸재가 살펴보면 사천의 시가 바로 그림이다.”
박사해는 “두 노인 중에 어느 분이 시인이고 어느 분이 화가인지 정말 모르겠다”면서 “두 분을 한쪽으로 치우치치 않게 ‘시화주인(詩畵主人)’이라 불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내가 나비가 된 것일까. 나비가 내가 된 것일까”라 했던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떠올립니다. ‘시인(사천)이 변해 화가(겸재)가 되었는지, 화가(겸재)가 변해 시인(사천)이 되었는지….’
그러고보면 ‘인왕제색도’를 굳이 겸재가 죽음을 앞둔 평생지기 벗(사천)을 위해 그린 작품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인왕제색도’가 아니어도 두 분의 우정은 앞으로도 인구에 회자될 영혼의 브로맨스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