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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보물 제2000호가 된 김홍도의 작품은?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국보와 보물이 지정되기 시작한 이래 56년만에 보물 제2000호가 탄생했다.
문화재청이 4일 보물로 지정한 유형문화재 4건의 등재번호는 제1998~2001호이다.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과 대구 동화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이 보물 제1998호와 제1999호이고, ‘김홍도 필 삼공불환도’는 보물 제2000호, ‘자치통감 권129~132’는 보물 제2001호가 됐다.

 

보물 제2000호로 지정된 김홍도의 ‘삼공불환도’. 4m가 넘는 김홍도의 말년 대작이다. 순조 임금의 천연두 쾌차를 기념해서 ‘유후 한공’의 의뢰를 받은 김홍도가 그린 병풍 4점 중 하나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이중 보물 제2000호의 ‘행운’을 누린 김홍도(1745~1806 이후)의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는 4m가 넘는 8폭 병풍(세로 133㎝, 가로 418㎝)이다. 작품의 왼쪽 상단에 남긴 홍의영(1750~1815)의 발문을 보면 이 그림은 ‘수두(천연두)를 앓은 순조 임금의 완쾌’를 기념하여 그린 4점의 병풍 중 한 작품이다.
“1801년 12월 임금(순조)이 수두를 앓았으나 다음날로 나으니 온 나라가 기뻐했다. ‘임금의 쾌차를 기념하여’ 이때 유후 한공이 병풍을 만들어 요속(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공과 나(홍의영)는 ‘신우치수도’를, 총제(벼슬이름)는 ‘화훼영모’를, 주판(벼슬)은 ‘삼공불환도’를 가졌다.”

 

‘삼공불환도’ 중 기옥풍경.  기와집을 에워싼 산세는 속세를 떠난 선비의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집안에는 다양한 사대부가의 생활 정경이 자못 서정적인 분위기로 묘사되어 있다. 삼공불환은 제 아무리 3공,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같은 3정승의 벼슬이 높다해도 전원생활과는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당시 홍의영은 사간원 정언(정 6품)이었다. 발문에 함께 등장하는 유수(留守·정 2품 벼슬) 한공은 강화부 유수인 한만유(1746~1812) 혹은 수원부 유수인 한용구(1747~1828) 등 두사람 중 한사람으로 추정된다.  요속 즉 부하들인 ‘총제’와 ‘주판’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한만유 혹은 한용구가 순조 임금의 ‘천연두 쾌차’를 기념하여 홍의영의 주선으로 김홍도에게 8폭 병풍 4점을 의뢰한 것으로 보인다.

 

전원생활의 낙을 그린 삼공불환도의 세부모습.  김매는 장면과 새참을 들고 오는 장면은 김홍도의 1795년작 ‘풍속도팔첩병’에서 보이는 장면이다.

이중 ‘신우치수도’ 2점은 한만유(혹은 한용구)와 홍의영이 나눠 가졌고, ‘화훼영모’와 ‘삼공불환도’는 이른바 요속들인 ‘총재’와 ‘주판’에게 돌아갔다. 홍의영은 “(작품을 배분한 것은 계급별이 아니라) 제각각의 취향이었다”고 전했다.
‘삼공불환’은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삼공(영의정·좌우정·우의정)의 높은 벼슬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송나라 시인인 대복고(1167~미상)의 시(‘조대’)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김홍도가 그린 ‘신우치수도(神禹治水圖)’ 2점과 ‘화훼영모도’ 1점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문화재의 종류는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문화재로 나뉜다.
유형문화재 중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유물을 ‘보물’로 지정한다. 그 보물 중에서 제작연대가 오래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 유례가 드물고 우수하며 특이하거나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유물은 ‘국보’로 대접한다.

1934년 8월27일자 총독부 관보에 오른 보물 목록. 보물 고적 천연기념물 등 169건의 지정문화재가 목록에 올랐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국보란 있을 수 없다면서 국보없이 보물만 지정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지금까지 336건 국보와 총 2132건의 보물이 지정됐다. 실제 지정 건수가 호수(제2001호)보다 많은 이유가 있다. 같은 판본에서 인쇄한 <삼국유사>의 경우 여러 책이 국보 및 보물로, 에컨대 국보 306호, 306-1호, 306-2호, 보물 419-2호, 419-3호, 419-4호 등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 보물 제도가 도입된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조선총독부는 1933년 12월 5일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하는 법(‘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했다. ‘역사의 증징(證徵) 혹은 미술의 모범이 되고 학술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을 영구보전한다는 뜻’이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6일)
이 법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를 만든다.(12월14일) 지금의 문화재위원회 처럼 문화재 보전과 지정 등을 심의하는 조직이었다. 보존회는 총독부 내무국장 우시지마(牛島省三)를 비롯, 25명으로 구성했다.
한국인은 5명이 들어갔다. 총독부 사무관이던 유만겸과 중추원 참의 류정수가 포함됐고, 학계에서는 이능화·김용진·최남선이 포함됐다. 일본인으로서는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과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들어 있었다.
총독부는 이듬해인 1934년 8월27일자 <관보>의 고시를 통해 1차 지정문화재를 발표한다.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로 시작된 관보는 지정번호와 문화재의 명칭, 소재지, 소재지역, 토지소유자 순으로 이날 지정된 표로 정리해놓았다. ‘보물 1호 경성 남대문, 보물 2호 경성 동대문…. 고적 1호 경주 포석정지, 천연기념물 1호 달성 측백나무 숲….’
이날 관보에 게재된 문화재는 보물 153건,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 등 모두 169건이었다.
중요한 착안점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국보’는 따로 없이 보물과 고적. 천연기념물만 지정했다는 점이다. 일제의 논리는 명확했다. 내선일체라는 것.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며, 따라서 일본의 국보가 식민지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권을 상실한 조선에 ‘국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방이 되고 10년이 지난 1955년이 되어서야 한국 정부는 일제강점기에 지정한 보물 419건을 일괄로 ‘국보’로 승격했다. 일제의 ‘한국 문화재 격하’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다. 1962년 1월 10일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비로소 국보와 보물로 분류하여 지정하게 되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