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부인, 신하, 백성을 이렇게까지 죽게한 임금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숙종대왕 호시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조선조 숙종의 서거 300주년을 맞아 6월28일까지 개최하는 테마 특별전의 제목이다. ‘호시절(好時節)’은 말 그대로 ‘좋은 때’이므로 숙종의 치세가 그만큼 편안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숙종(재위 1674~1720)은 영조(52년·1724~1776년)에 이어 두번째로 긴 만 46년(재위 1674~1720) 조선을 다스린 군주다. 숙종은 특별전에서 소개하듯 교과서적인 의미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1719년(숙종 45)에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계첩(契帖). 원래 기소로는 ‘정2품 이상의 문관에 70세는 넘어야 입소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태조(이성계)께서도 60에 기로소에 들어갔다’는 이유를 대며 기로소 입소를 강행했다. 이 계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인 뒤 제작한 화첩이다. 1720년 완성됐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대동법, 백두산정계비, 상평통보…

숙종은 새롭게 개발된 농토 등 변화상을 반영하는 토지대장을 작성해서 국가재정을 확충했다. 또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대동법의 범위를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넓혔다. 대동법은 국가에 납부할 세금을 쌀(혹은 무명이나 면포)로 통일한 제도다. 대동법에 따라 쌀로 일괄 납부하다보니 국가는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서 사들였고, 그에따라 상품유통이 활발해졌다. 

보다 편리한 유통을 위해 화폐가 필요했고, 1678년(숙종 4년) 상평통보를 찍어냈다. 북한산성을 새로 쌓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워(1712년·숙종 38년) 조선-청나라 양국 국경을 명문화한 것도 특기할만 하다. 또 울릉도를 조선의 실질적인 영토 관리영역으로 포함시켰다. 숙종대에 설정된 국토경계는 지금까지도 강역의 기본틀이 됐다. 

그러한 점을 평가한 것일까. 이번 테마전에서는 태조를 ‘창업의 군주’로, 숙종을 ‘중흥의 군주’로 꼽았다. 전란(임진왜란~병자호란)의 후유증을 실질적으로 치유하고 시대적 변화를 이끌어 조선 후기 중흥의 시대를 연 임금이라는 것이다.

제갈량을 그린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 숙종은 1695년 중국의 명재상 제갈량(184~234)을 주제로한 ‘제갈무후도’를 그릴 것을 지시한 뒤 이 그림에 직접 글을 지었다. 숙종은 이 글에서 제갈량과 유비의 만남을 현신과 명군의 만남으로 묘사하면서 신하들에게 충성심을 독려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41만명이 떼죽음 당했다

그러나 숙종은 과연 중흥군주였으며, 숙종이 지배한 조선의 46년이 ‘호시절’이었을까. 필자는 못내 마음에 걸린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소빙하기는 17세기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냉해와 가뭄, 홍수, 전염병이 끊임없이 백성들을 괴롭혔다. 현종 때의 경신대기근(1670~71년)에 이어 숙종 연간인 1695(을해년)~1696년(병자년) 사이에 덮친 ‘을병대기근’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1699년 전국의 인구는 577만 2300명으로 집계됐다. 계유년(1693년)과 비교하면 141만 6274명이 줄었다. 을해년(1695년) 이후 기근과 전염병이 참혹했기 때문이다.”(<숙종실록> 1699년 11월16일)

1695년부터 99년까지 4년간 조선 인구의 20% 정도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얘기다. 배가 고파 인육까지 먹는 비참한 상황이 연출됐다. 민심이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1697년(숙종 23년) 경기 광주의 백성 수백명이 점거폭력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광주 백성들이 대궐 앞서 관리들의 출근을 막고 ‘먹을 것을 달라’고 호소했다…수어사(남한산성을 지키는 관리) 이세화(1630~1701)의 집에서 밤샘 점거농성을 벌이며 군관을 집단구타하고….”(<숙종실록>)


■요승 여환, 장길산, 검계, 명화적까지

요승 여환과 장길산, 명화적(떼강도), 검계(폭력조직)이 나타났거나 극성을 부린 것도 숙종 때였다. 

“요사스러온 자(여환)가 자칭 ‘신령(神靈)’이라 일컫고 도당(徒黨)을 모아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고 있는데….”(<숙종실록> 1688년 8월1일) 

여환에 퍼뜨렸다는 괴서에는 “9~10월 쯤 군사를 일으켜 도성에 들어가면 대궐 가운데 앉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1697년(숙종 23년) 장길산이라는 도적이 중국인 승려 무리와 결탁해서 조선과 중국에서 반역을 일으킨다는 소문도 횡행했다.

1712년 숙종의 명에 따라 축성된 북한산성을 그린 ‘북한지’(1745년). 수도방위를 위해 도성 인근에 쌓은 성이다. 천혜의 요새라는 명성에 걸맞게 북한산 깊숙한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운부라는 중국인 중이 장길산의 무리와 결탁해서…조선과 중국을 평정하여 정씨 성(조선)과 최씨 성(중국으로 왕을 세우겠다고 했답니다.”(<숙종실록> 1697년)

폭력조직인 검계가 들끓었고, 그들 가운데는 포도청 수감 중 칼로 가슴을 베는 등 자해공갈의 패악을 저지르는 이들도 있었다.(<숙종실록> 1684년) 

지금의 떼강도 격인 명화적 때문에 “장사꾼의 발길조차 끊어졌다”(<숙종실록> 1703년)고 토로하는 기사도 여럿 등장한다.

특별전에서 ‘숙종의 치적’으로 지목한 북한산성 축조도 달리 봐야 한다. 숙종은 1712년(숙종 38년) 4월 북한산성 수축 후 “이제 도적과 비도(匪徒)가 감히 다가올 수 없다”는 내용의 시를 읊었다. 여기서 ‘도적’과 ‘비도’라는 표현이 심상치 않다. ‘외부의 적’ 보다는 ‘내부의 적’을 근심한 나머지 북한산성을 축조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도그럴 것이 당시 외침(外侵)의 우려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17세기 후반 청나라 강희제(재위 1661~1722)의 치세가 안정적이었고, 조선과도 우호관계도 유지했다. 

그런 정세를 반영해서 1702년(숙종 28년) 좌의정 이세백(1635~1703)은 “지금 남북에 근심이 없지만 도적이 치성하고 있으며, 천재가 심해 흉년이 들어 민심이 불안하다”(<비변사등록>)고 언급했다. 이상이변과 전염병, 사람고기까지 먹어야 했던 굶주림, 점거 농성 폭력 시위, 폭력조직인 검계와 떼강도인 명화적, 그리고 장길산까지…. 

단 4년 만(1695~99년)에 무려 141만명이 떼죽음을 당했으니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였다. 

1678년(숙종 4년) 주조한 상평통보. 늘 똑같은 가치를 지니라는 뜻에서 ‘상평통보(常平通寶)’라 이름 붙였다.

■3번의 친위쿠데타…죽어나간 관리·선비들

그렇다면 숙종의 정치술은 어떨까.

“주상(숙종)은 평소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나라의 화가 됨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

이것은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현종비·1642~1683)가 중전(인현왕후·1667~1701)에게 귀띔해준 아들의 들쭉날쭉한 성격이다. 과연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걸핏하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3번이나 정권을 바꿨으니 말이다. 요약하자면 1680년 경신환국(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교체)→1689년 기사환국(희빈 장씨의 중전 책봉과 남인정권 재등장)→1694년 갑술환국(인현왕후의 복위와 서인 정권 재등장) 등…. 이 3번의 친위쿠데타, 즉 ‘환국’ 정치를 두고 혹자는 숙종의 노련한 정치전략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명성왕후의 말마따나 ‘희로의 감정이 느닷없이 분출되는’ 죽끓는듯한 성격 때문에 얼마나 많은 학자·정치인·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했는가. 과연 이 시대를 ‘호시절’이라 할 수 있을까.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명문화하면서 세운 백두산정계비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놓고 부인 흉 본 못된 남편    

그 뿐인가. 못된 남편(숙종) 때문에 부인들이 줄줄이 핍박 당했다. 남편 때문에 먼저 피눈물을 흘린 이는 인현왕후와 귀인 김씨(영빈 김씨·1669~1735)이다. 만 14살의 나이로 숙종의 두번째 정부인이 된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서인 민유중(1630~1687)의 딸이었다. 자연히 서인 정권의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 남편인 숙종이 궁인 장옥정(희빈 장씨·1659~1701)와 사이에 아들을 낳자 상황이 급변했다. 

9년간 계속된 서인정권에 슬슬 염증을 느낀 차에 남인의 후원을 받던 장씨가 귀한 왕자를 생산했으니 시쳇말로 눈이 뒤집힌 것이다. 기사년인 1689년(숙종 15년) 새해 벽두부터 숙종은 갓 태어난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려고 혈안이 됐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 등은 “정비(인현왕후)의 춘추가 아직 젊으니 더 기다려서 적자를 계승자로 삼아야 한다”고 반대했다. 숙종은 이때 정권을 서인에서 남인으로 전격 교체한다. 

이 무렵 숙종은 군주의 자질을 의심케하는 언행을 일삼는다. 대놓고 부인을 흉본 것이다.

“희빈(장씨)이 처음 숙원(내명부 종4품)이 되자…중전(인현왕후)이 나에게 꿈 이야기를 말했다네. 꿈에 선왕(현종)과 선후(명성왕후)를 뵈었는데…두 분이 ‘숙원(장씨)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래 궁중에 두었다가는 반드시 경신년(1680년 경신환국) 뒤에 뜻을 잃은 사람(남인)들과 결탁해서 망측한 일을 만들어낼 것’이라 했다는군.”(<숙종실록> 1689년 4월21일)

숙종은 이어 “중전이 질투하는 마음에 나를 공갈하니…그 간교하고 앙큼함은 폐간(肺肝)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했다. 이에 서인 정권을 쫓아내고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되찾은 남인계 신하들마저 숙종의 ‘부인 험담’에는 반기를 들었다. “부부의 불화를 자식같은 신하들에게 털어놓는 이유가 뭐냐” “중전께서 국모로 계신지 10년이 되도록 무슨 실덕(失德) 있었기에 이런 하교(험담)를 내리시느냐”는 것이었다. 

1667년(현종 8년) 숙종을 왕세자로 임명할 때 제작한 옥인과 죽책, 죽책을 담은 함이다.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유일한 적장자로서 임금이 됐다. 숙종은 조선조 27명의 임금 가운데 적장자로 왕위를 이은 7명 중 한사람이다. 숙종은 이러한 완전한 정통성을 바탕으로 철권을 휘둘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버선발로 쫓겨난 부인

그러나 숙종은 중전과 가까운 귀인 김씨(서인 김수항의 종손녀·1690~1735)마저 ‘험담의 도마’에 올렸다.

“아 글쎄. 내가 대신들과 나눈 이야기를 적은 쪽지를 놓아두었는데, 귀인이 그것을 소매 속에 감추었다가 들켰다네. 내가 ‘왜 그랬냐’고 하니까 귀인이 ‘버리는 휴지인줄 알았다’고 변명하더라구.”

숙종은 “이번 일이 우연이 아니며 국가에 반드시 화난이 있을 것”이라고 침소봉대했다. 숙종은 일사천리로 중전의 폐위절차를 진행했다. 4월22일 중전과 친한 귀인 김씨를 우선 폐출시켰다. 마침 23일인 중전(인현왕후)의 탄신일이었는데, 숙종은 중궁전에 들어온 생일선물까지 “내치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루라도 국모의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페출 전교를 내렸다. 3일 뒤인 26일에는 날마다 중전에게 들이던 음식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굶으라는 얘기였다. 뭐 이런 박정한 남편이 있단 말인가. 

1689년(숙종 14년) 5월4일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친정으로 쫓겨났다. 민씨가 친정으로 돌아갈 때 유생 수백 명이 길 아래에 엎드려 통곡했다. 중전 민씨의 폐출 장면을 생생한 필치로 소개한 <인현왕후전>은 “상감이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흰 명주보로 덮은 보통의 가마가 서둘러 내전에 들어갔는데, 왕후께서 벌써 내려와 걸어왔다”고 기록했다. 가마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버선발로 부인을 내쫓은 못된 남편이었던 것이다. 숙종은 폐위교서에서 “왕비 민씨는 원래 화순한 성품이 부족하고 조신한 덕이 적었다”면서 “책봉되던 때부터 조심하고 삼가지 않았고, 질투하는 허물이 많았다”고 했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짓기로 결정한 뒤 지은 시와 이듬해 북한산성에 행차하여 완성된 성곽을 둘러보며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북한산성은 숙종이 구상한 도성중심 방어체제의 핵심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남편 탓에 평생 속이 썩어 문드러진 인현왕후

폐비의 생활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1690년(숙종 16년) 9월 정언 송정규(1656~1710)는 상소문에서 폐서인이 되어 쫓겨난 인현왕후의 불쌍한 하루하루를 고발한다.

“폐비가 집으로 돌아간 뒤로 친척과 이웃에서도 감히 문안하고 왕래하지 못합니다. 문을 잠가서 뜰에 풀이 가득하고 적막하며 양식과 땔나무가 군색한 것은 참으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숙종실록>) 

남인 정권의 실세들조차 “민씨를 별궁에 모시고, 달마다 녹봉 형식의 쌀을 주면 성상의 덕이 빛날 것”이라고 간청했다. 여기서 못된 남편의 면모가 다시 유감없이 발휘된다. 

처음엔 “그러자”고 허락했다가 곧 그 명을 취소한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안되겠다. 죄악이 가득차서 폐출한 지 반 년도 안되는 폐비를 대우했다가는 뜻을 잃은 무리(서인)가…‘옳다구나’ 하면서 변란을 일으킬 것이다.”(<숙종실록> 1689년 9월24일, 10월18일)

이 정도로 박정한 남편이었으니 인현왕후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인현왕후는 폐위 5년 만인 1694년(숙종 20년)에 복위의 꿈을 이뤘지만, 변덕스런 남편을 향한 분노의 마음을 쉬이 풀지 않았다. 그해 4월9일 숙종은 폐출된 중궁(인현왕후)의 무죄를 밝히며 별궁으로 모시라는 비망기를 내린다. 숙종은 자신의 어찰을 인현왕후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죄인이 어찌 외부 사람을 만나 어찰을 받겠느냐” “죄를 지은 아내가 답장을 올릴 수 없다”면서 거듭 복위를 사양했다. 

인현왕후가 고집을 꺾고 대궐로 돌아와 임금을 알현할 때도 “죄인이 무슨 낯으로 전하를 뵙겠느냐”고 가마에서 내리지 않았다. 숙종이 친히 가마문을 열어 주렴을 걷은 뒤에야 왕후가 내려왔다. 왕후의 예절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달리보면 남편을 향한 분노감과 복수심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현왕후는 시름시름 앓다가 복위된지 7년 만에 승하하고 만다. <숙종실록>은 숙종의 말을 빌어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탓에 죽었다는 뉘앙스로 기록한다.

하지만 과연 희빈 장씨의 책임이 100%일까. <승정원 일기>등에 따르면 승하한 인현왕후의 병명은 옹저였다. <동의보감>은 “기가 막혀 생기는 옹저는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생기는 병”이라 풀이했다. 

돌이켜보면 만 14살에 왕비가 된 이후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고, 22살에 폐위됐으며 27살에 복위된 이후 불과 7년을 더 살았다. 궁궐로 들어온 14살 이후 20년 내내 느꼈을 불안감, 분노, 억울함 등이 겹쳐 발병했고, 그 때문에 승하한 것으로 여겨진다. 

‘팔춘도첩’, 태조가 타던 말 여덟 마리를 그린 그림과 관련된 글가 소실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 그리게 하고, 직접 글을 지어 태조의 업적을 되새겼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반대파들까지 “너무하십니다” 동정 

그렇다면 희빈 장씨의 삶은 어떨까. 장씨는 인현왕후가 쫓겨난지 불과 4일만인 1689년(숙종 15년) 5월6일 꿈에 그리던 중전이 된다. 그러나 희빈 장씨, 즉 새로운 중전을 향한 숙종의 사랑은 5년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1693년(숙종 19년) 숙원 최씨(훗날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책봉된 것이다. 숙종의 마음은 이제 최씨 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1694년(숙종 20년) 3월29일 숙종은 “중전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고변을 듣게 된다.(<숙종실록>) 숙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남인들을 쫓아내고 서인들을 복관시킨다. 이것이 남인정권에서 다시 서인정권으로 복귀시킨 이른바 ‘갑술환국’이다.

중전 장씨도 급전직하한다. 고변 사건(3월29일) 이후 10여 일이 지난 4월12일 사가로 쫓겨났던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의 자리로 복귀시킨다.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아무리 임금이 제멋대로 하는 지존이라지만 5년 전 본부인을 무자비하게 내쫓고 서둘러 중전으로 올린 여인을 불과 5년 만에 다시 내쫓다니…. 

“왕비 민씨는 단장(端莊)하여 예법을 지키고 정정(貞靜)하여 아름다움을 지녔다.”(<숙종실록> 1694년 6월1일)

인현왕후를 복위시킨 숙종의 반성문을 보면 기가 찬 노릇이다. 언제는 ‘부덕하고 질투심이 많은 칠거지악의 여인’이라며 쫓아냈다가 이제와서는 ‘예법을 잘 지키고 아름다움을 지닌 왕비’라고 치켜세우다니…. 

여기서 다시 숙종의 못된 버릇이 또 나온다. 5년전 인현왕후를 험담하던 숙종이 이번에는 희빈 장씨를 천하의 몹쓸 여자로 폄훼한 것이다. 1701년(숙종 27년) 9월 25일 숙종이 ‘희빈 장씨의 자진(自盡)’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그러자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 중 대부분의 대소신료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결정한 뒤) 끝없는 후회가 있었는데 지금 전하의 처분도 순간적으로 격분한 감정에서 나온 명령이 아니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대부분의 신료들은 “세자의 어머니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국왕의 글씨를 모은 <열성어역필> 중 숙종의 어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희빈 장씨의 일갈, “정치 똑바로 하세요.”

그러자 숙종의 못된 버릇이 나온다. 이번에는 희빈 장씨의 흉을 보기 시작한다.

“이 사람(장씨)은 (희빈으로 강등된 후) 한번도 중전(인현왕후)에게 문안을 올리지 않았다네. 왕후에게 ‘민씨(閔氏)’, ‘민가(閔哥)’, 혹은 ‘요사스런 사람’으로 일컫기도 했네.”

신료들은 “그렇다고 이런 깊은 밤중에 ‘종이 한 장’(비망기)으로 세자의 어머니(희반 장씨)를 죽이려 하느냐”고 ‘워~워~’를 당부했다. 

그러나 숙종은 “그 뿐이냐.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할 목적으로) 신당(神堂)을 대궐 안팎에 몰래 설치하고 흉악한 물건들을 묻고는 2월부터 기도했다”고 험담을 이어간다.

어찌 그렇게 5년전 인현왕후의 폐출 때와 똑같은 장면이란 말인가. 그런데 인현왕후는 폐서인으로 끝났지만 희빈 장씨는 끝내 자진하고 만다. 

인현왕후의 일대기인 <인현왕후전>을 보면 사약을 내동댕이 친 희빈 장씨에게 전 남편(숙종)의 한마디는 모질기 이를데 없었다.   

“네 얼굴을 보기가 더러워 약을 보내니…. 이 약은 네게는 상인줄 알고….”

그러면서 숙종은 희빈의 입을 강제로 벌린 채 세 사발이나 되는 사약을 들어부었다. 숙종은 본부인마저 버선발로 쫓아내면서까지 그토록 사랑했던 새 부인(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먹이면서 이렇게 재촉했다.

“빨리 먹이라!”

희빈 장씨의 마지막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전하께서 밝은 정치를 펼치지 않으니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인현왕후전>의 필자는 “장씨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불쌍한 감정을 갖게됐지만 주상(숙종)께서는 조금도 측은한 마음도 갖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참으로 비정한 남편이 아닌가,


■중전이 될 수 없었던 숙빈 최씨와 귀인 김씨

따지고보면 어디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뿐인가. 인현왕후와 함께 폐출됐다가 갑술환국으로 복위된 귀인 김씨(훗날 영빈 김씨) 역시 더는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는 “인현왕후가 승하하기 전 숙종에게 ‘내가 죽거든 희빈 장씨를 복위시키지 말고 귀인 김씨를 왕비로 세우라’는 청을 올렸다”고 전한다. 

숙종의 총애를 얻어 연잉군(훗날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1670~1718) 역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죄를 물으면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숙종실록> 1701년)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놓고는 1702년(숙종 28년) 당시 15살의 인원왕후(1687~1757)를 세번째 정부인으로 맞이했다. 이 무슨 억하심정인가. 숙종은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그리고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려 했던 여인들 모두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사실 문헌자료와 역사서의 한 부분만 보고 전체 역사를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국립고궁박물관의 태마전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전체 조선의 역사를 정리하는 측면이라면 숙종 치세의 평가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법 확대실시와 백두산정계비 등과 같은 숙종의 업적은 당연히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각종 문헌자료와 <숙종실록>에서 정리되지 않은 당대의 생생한 이야기들도 있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쯤에서 다시한번 묻고싶다. 숙종은 조선의 중흥군주인가, 숙종의 치세는 호시절이었는가.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