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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블랙코미디' 휴전회담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고려하는 토의는 끝났다. 앞으로는 협의하지 않겠다.”
 1951년 8월10일, 한국전쟁 종식을 위한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판문점. 유엔군측 수석대표 터너 C 조이 중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30분간이나 성명서를 낭독했다.
 조이 중장은 휴전회담의 핵심내용이 되는 군사분계선을 ‘현재의 양측 접촉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유엔측의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은 한 달 전(7월10일) 정전회담을 시작하면서 그때까지 군사분계선 설정 등 핵심의제를 두고 팽팽한 접전을 벌여왔다. 공산군측은 전쟁 이전의 상태인 38도선을, 유엔군측은 현재의 양측 접촉선(현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획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조이는 이날 “더는 공산군측의 의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면서 “앞으로는 현 접촉선에 대해서만 협의할 것”이라며 최후통첩 한 것이다. 이날 조이 중장은 선수를 쳤다고 자못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공산군측 대표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공산군측 수석대표인 남일 중장이 입술을 꽉 깨물고 팔짱을 끼는 것이 아닌가.
 다른 공산측 대표들도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동안 핵심사안을 두고 지긋지긋한 장광설로 유엔군측을 자극했던 공산측이 이번에는 ‘침묵’ 작전을 선택한 것이다.       
 공산군 측은 일제히 유엔군측 대표들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잠시 당황하던 유엔군 측도 이에 질세라 공산측과 눈싸움을 벌였다. 눈싸움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회담장엔 살벌한 침묵이 흘렀다.

 

2년 1개월 여의 지루한 휴전회담 끝에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공산 양측이 군사분계선(휴전선)을 긋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상갓집 개만도 못한...”
 그 사이, 북한군 소장 이상조가 암일 수석대표에게 한 장의 종이를 보여주는 순간이 있었다. 한국어로 쓴 종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제국주의자들의 심부름꾼(사자)은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
 춘추전국 시대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거리며 갈피를 잡지못하던 공자가 불우했던 스스로를 ‘상갓집 개(喪家之狗)’로 표현한 바 있다. 공산군측은 <사기> ‘공자세가’까지 인용하면서 유엔군을 ‘세상 어디에도 기댈 때 없는 주인 잃은 개’ 취급하며 자극한 것이다. 공산군측의 ‘째려보기’에 유엔군측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장광설을 좋아하는 그들이 설마 그런 태도(눈싸움)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에게 오직 상대방의 얼굴만 지켜보며 여러 시간을 즐기는 풍습은 없다. 눈을 부릅뜨고 한 군데만 지켜본다는 것은 피곤한 노릇이다.”(조이의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수법>에서)
 결국 항복을 선언한 것은 유엔군 측이었다. 무려 2시간 11분 간의 눈싸움을 견디다 못한 조이 중장은 심호흡을 내쉰 뒤 눈을 부비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는 다음에 논의하기로 하자. 휴전 실현의 구체적인 협의에 나서자.”
 하지만 눈싸움에서 승리한 남일은 단 한미디의 한국말로 그 제안을 싹둑 잘라버린다.
 “안된다.”
 협상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8월22일 공산측이 “유엔군 공군이 개성의 중립지역을 폭격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입씨름 끝에 회담은 중단되고 만다.
 정전회담 중에 벌어진 이 2시간 11분간의 눈싸움은 2년1개월간 ‘블랙 코미디’로 점철된 휴전회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1951년 7월10일 지프에 백기를 달고 회담장에 들어서는 유엔군측 대표단.

■남면·북면 싸움
 처음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그랬다. 1951년 7월8일 양측은 처음으로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1년 여에 걸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양측의 처지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접촉은 본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었다. 하지만 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심리전은 불꽃 튀겼다. 예비회담 장소는 개성 북쪽의 광문동에 자리잡은 민가였다.  
 그런데 회담장에 들어서는 유엔군측의 발걸음이 매우 빨랐다.   
 “회담장에 들어선 유엔군측 연락장교단은 공산군측보다 먼저 남쪽을 향하고 자리에 앉았다. 공산측은 적잖은 동요를 일으켰다.”
 왜 유엔군 측은 남쪽을 향해 앉으려 했을까.
 동양에서 남쪽을 향해 앉는다는 것, 즉 ‘남면(南面)’은 천자가 제후를 거느리고 않을 때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주나라 성왕 7년(기원전 1035년), (성왕의 삼촌인) 주공은 어린 성왕이 성장하자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주고 북쪽을 향해(北面)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주공이 섭정했을 때는 남쪽을 향하고(南面) 병풍을 둘러 제후를 접견했다.”(<사기> ‘주본기’· ‘노주공세가’ 등)
 주공은 은(상)을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재위 기원전 1046~1043)의 동생이다. 그런데 천하통일 3년 만에 무왕이 죽었고 무왕의 아들인 성왕이 즉위했다. 성왕은 아직 강보에 싸인 어린 아이였으므로. 삼촌인 주공이 정권을 대행했다. 그랬던 주공이 7년의 섭정을 마치고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천자나 왕이 ‘남면’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예기(禮記)>‘교특생(郊特牲)’은 “임금이 남쪽을 향함은 양(陽)에 답하는 뜻이고, 신하가 북쪽을 향함은 임금에 답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만물이 햇볕을 받아 무성하게 되는데, 임금이 남면하는 까닭은 햇볕을 받기 때문”(<선조실록>)인 것이다.
 당연히 전쟁에서 이긴 승자는 패배자를 대할 때도 남면했다. 동양의 풍습을 대체 유엔군 연락장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자못 신기할 따름이다.
 이렇게 유엔군 측에 허를 찔린 공산군측도 가만 있지 않았다. 보드카와 맥주, 과일 캔디 등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유엔군측 연락장교단이 이를 거절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동양에서 음식을 권하는 것은 승자가 패자를 위해 베푸는 자비이자 위로의 표현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황제나 임금이 베푸는 ‘하사품’의 의미가 짙다.
 그래서 유엔군측이 손사래를 친 것이다. 첫날의 예비회담에서는 유엔군 측의 심리전이 승리를 거둔 셈이 됐다.   

 

휴전회담 장소로 출발하는 유엔군 대표단을 안내하기 위해 나온 공산군측 실무자들. 회담은 첫발부터 난항을 거듭했다. 

■백기 단 지프
 공산군 측은 이틀 뒤인 10일 개성 내봉장에서 열린 역사적인 본회담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꾀한다.
 물론 유엔군 측도 각자 작은 손거을을 호주머니에 놓고 회담에 임했다. 안전보장을 장담할 수 없는 개성이었으므로 여차하면 손거울로 유엔군 전투기에 신호를 보낼 참이었다. 그러나….
 공산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더러운 지프를 유엔군 대표에게 할당한 것이었다. 어떤 지프에는 유리창에 총알자국과 핏자국이 남아있기도 했다.
 유엔군측 대표단이 탄 지프에는 커다란 백기가 걸려 있었다. 원래 백기게양은 예비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이었다. 유엔군측의 안전보장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백기 걸린 유엔군 행렬은 마치 ‘항복사절’ 같았다. 공산군측은 이것을 백분 활용했다. 깔끔한 제복을 입은 북한군 장병을 태운 트럭 3대가 유엔군 대표단 행렬을 개성으로 인도했다.
 트럭은 개성 시내를 천천히 돌았다. 트럭 위에서 ‘만세’의 몸짓을 하는 북한군과, 백기를 게양한 채 그 뒤를 따라는 유엔군 지프의 행렬…. 여기에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는 공산측 카메라맨의 모습….
 공산측은 포로들을 이끌고 개선장군처럼 시내를 퍼레이드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유엔군 측이 ‘뭔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때는 늦었다.

 

  ■자리싸움 의자싸움
 유엔군 대표들이 우여곡절 끝에 회담장에 들어섰다.
 공산측 대표들은 아주 정중한 태도로 유엔군 대표들을 남쪽 테이블로 모셨다. 즉 항복사절, 혹은 신하의 자리를 뜻하는 ‘북면(北面)’으로 모신 것이다. 공산측의 심리전 2연승이었다. 3번째 심리전이 이어졌다.
 원래 회담은 서로 기립한채 신임장을 교환한 뒤 자리에 앉음으로써 개막된다. 이 때 유엔군 조이 중장이 꾀를 쓴다. 그는 기립한채 공산측에 유엔측의 신임장을 넘겨 주었다.
 곧바로 남일 공산측 수석대표가 공산측 신임장을 전달하자 조이가 머뭇거렸다. 남일이 이상하다는 조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남일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조이는 잽싸게 신임장을 받았다. 조이의 이상한 행동에 집중력을 빼앗긴 남일이 무심코 자리에 앉았다. 그 때였다. 공산측 신임장을 받느라 자리에 선 채 있었던 조이는 잽싸게 개회사를 읽어 내려갔다. 
 조이는 바로 ‘승자가 먼저 발언한다’는 동양의 관습에 따라 발언순서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꼼수를 부린 것이다. 조이 중장은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한방 먹였다’고 여겼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조이 중장이 ‘승자의 미소’를 흘리고, 흐뭇한 표정으로 공산측의 반응을 살폈다. 한데 이상했다.
 싸늘한 표정으로 유엔군측을 쏘아보는 남일의 앉은 키가 매우 커보였다. 남일 뿐이 아니었다.
 작은 키의 공산측 대표들이 유엔군 측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특히 남일은 등을 한껏 곧추 세운 뒤 조이 중장을 내려다 보았다. 무슨 일이었을까. 공산측은 유엔군 대표단 자리에 4인치(10㎝ 정도)나 낮은 의자를 놓았던 것이다. 유엔군 대표단이 “무슨 짓이냐. 의자를 빨리 바꾸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공산측은 “알았다”며 ‘쿨’하게 의자를 바꿨다.
 하지만 이미 공산측 사진기자가 ‘남면(南面)의 높은 의자에 앉아 ’북면‘하고 있는 패배자를 한껏 깔보는 사진을 충분히 찍은 뒤였다. 오후 회담에서도 신경전이 이어졌다. 공산군 측이 유엔군측의 탁상용 유앤기보다 2~3인치나 더 큰 깃발을 테이블에 꽂아놓은 것이다. 

 

 ■“전쟁이 여행인가”
 이렇게 아이들 싸움처럼 유치한, 그러나 결코 질 수는 없었던 힘겨루기로 시작된 휴전회담은 금방 난관에 봉착했다.
 공산측의 요구는 분명했다. 앞서 밝혔듯 전쟁 이전, 즉 38도선 분단 상태의 원상회복을 주장했다. 38도선을 양측의 군사분계선으로 획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38도선은 전쟁 이전에 이미 모든 국가가 알고 있는 경계선이다. 이 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공산측은 유엔군 측을 한껏 자극했다.
 “전쟁이 여행인가. 부대가 관광객인가. 휴전이 성립되고도 그 자리에 부대를 그냥 둔다?  조선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라고 그 부대를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의도는 뻔하다.”
 유엔군 측은 공산측의 주장을 일축했다.
 “공산측은 이미 38도선을 4번이나 침범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38도선은 군사분계선으로서 적합치 않다.” 

1951년 7월의 전선. 당시 공산측은 전쟁 이전의 분단선인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엔군측은 당시의 전선 보다도 훨씬 북쪽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역사논쟁으로 비화
 유엔군은 한술 떠 뜬다. 오히려 휴전회담 당시(1951년 7월)의 전선보다 30~50㎞ 북쪽에 군사분계선을 설치한 군사지도를 공산측에 제시한 것이다.
 “유엔군 측은 지금 육상에서는 한정된 지상진지를 점령하고 있다. 하지만 공군과 해군은 전 한반도의 제공·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 순간 휴전한다면 유엔군은 도리어 공군과 해군력을 제한받게 된다. 그러나 공산측은 (휴전 덕분에 유엔군의 압도적인 공군·해군력을 피하게 되므로) 좀 더 자유롭게 육상의 전투력을 증강할 수 있게 된다. 공산측은 지상에서 마땅히 더 양보해야 한다.”
 즉 유엔군은 육·해·공군을 통합한 군사력의 우세로 협상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러면서 유엔군은 태평양 전쟁 때의 일본을 예로 든다.
 “미국이 일본을 패전시킬 때 단 한 사람의 미군도 일본 본토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을 점령했다.”
 그러나 공산측은 ‘가소로운 제안’이라며 일축했다.
 “미군이 일본을 패망시켰다고? 일본을 굴복시킨 것은 조선인의 투쟁과 중국인의 인민전쟁, 소련의 저항이었다. 소련이 가담하기까지 미국은 3년이나 패전을 거듭했다. 어찌 역사를 부인하는가”
 회담은 ‘역사인식’의 차이까지 드러냈다. 급기야 회담은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2시간 11분간의 눈싸움으로 비화된 것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의 <한국전쟁 휴전사>)

 

 ■코미디 회담의 대가
 협상은 역시 지루한 힘겨루기를 계속하면서 이후에도 1년 9개월을 더 끌었다.
 판문점에서는 159회의 회담과 575회의 공식회의를 열었고, 1800만 단어를 주고받은 끝에 휴전협정에 서명했다.(1953년 7월27일) ‘코미디 휴전회담의 대가는 엄청났다. 회담이 시작된 1951년 7월부터 전선은 지금의 군사분계선(휴전선)을 오르내리는 교착전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한국전쟁 발발(1950년 6월25일)~휴전(1953년 7월27일)까지 전쟁의 전 기간(1127일) 가운데 무려 764일을 지금의 휴전선 근방에서 싸웠다.
 모두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국지적인 고지쟁탈전으로 전쟁 전 기간의 2/3를 소모한 것이다. 회담 기간 중 전선의 변화는 종심 20㎞ 정도에 불과했다. 전투는 소모적이고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저 장병들에게 화약냄새를 맡게 하여 부대의 전투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의도로, 혹은 “네가 치니 나도 친다”는 보복의 양상으로 치렀다. 그 사이 양측의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예컨대 미군은 모두 6만 여 명이 휴전회담의 와중에서 희생됐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고, 누구를 위한 회담이었는가.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한국전쟁 휴전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9
 <지울 수 없는 이미지 -8·15해방부터 한국전쟁 종전까지>, 박도 엮음,  눈빛출판사, 2004
 <그들이 본 한국전쟁 1, 항미원조-중국인민지원군>, 중국해방군화보사. 노동환 외 번역, 눈빛출판사, 2005
 <분단의 섬 민통선-비무장지대 역사기행>, 이기환, 책문, 2009
 <한국전쟁 하권>, 고지마 노보루, 김민성 옮김, 종로서적, 1981
 <판문점 700일-상 (누구를 위한 휴전인가)>, 이원복, 대림기획,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