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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사라진 일진회, 그리고 국정교과서

“4000년 역사 이래 단 하루도 완전한 독립이 없었다고? 무슨 소리냐. 단군·광개토대왕 이래 독립정신은 하루도 없어지지 않았다. 우리 힘으로는 자주독립을 못한다고? 미국의 힘을 빌어 독립하면 미국의 노예가 된다…. 송병준·이완용도 한때 영웅이라고? 2000만 인민의 생명을 끊고 어찌 무사하겠는가.”(<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12일)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진회(一進會)에 가입한 벗(友人)의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절교통보서를 쓴다.

 

단재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일본과 친해야 일본을 배척할 수 있다’ ‘일본을 맹주로 진보해야 서로 보전할 수 있다’는 등의 해괴한 논리를 편 일진회의 가면을 벗기고자 했던 것이다.

1904년 송병준·이용구가 결성한 일진회는 고비 때마다 일제의 침략정책 수행에 앞잡이 노릇을 자처했다.

 

함경도~간도 일대에서 러시아군 동태를 파악한 것도, 경의선 부설공사에 20만명의 회원을 거의 무보수로 동원한 것도 일진회였다.

 

친일파 이용구 집에서 단체사진을 쯕인 일진회 자영단원호대.

을사늑약을 불과 10여일 앞두고는 “일본의 보호 지도를 받기 위해 내치, 외교권을 일본에 일임해야 된다”는 ‘일진회 선언서’를 공표하기도 했다.

 

송병준이 1907년 고종의 퇴위를 주도하면서 일진회는 백성들의 타도대상이 되었다.

 

1907년 7월부터 1년 남짓동안 무려 9260명에 이르는 일진회원들이 분노한 의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일제의 이른바 ‘합방 유도’에 나팔수 노릇을 자처했다. 일진회는 1909년 12월 이른바 합방 촉구 성명서를 발표한다.

 

‘일본이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켰는데…외교권을 넘겨준 것도 조선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다.… 따라서 한일병합이 (대한제국 백성이) 한번 살아남을 길이며…. 이 기회를 잃으면 죄를 줄 것이기에….’

 

일진회의 성명은 일제의 국권탈취 야욕에 주단을 깔아주었다.

정부가 날림으로 제작한 한국사 국정교과서의 최종본에서 ‘일진회’ 관련 서술이 빠진 것으로 드러났다.

 

고비 때마다 한일병합의 앞잡이가 된 ‘일진회’ 같은 친일단체를 누락시킨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과거 왜곡·편향기술로 논란을 빚었던 교학사까지 8종의 검정교과서가 포함시킨 명백한 팩트인데 말이다. 국정교과서를 배우는 학생들은 ‘일진회’라면 폭력서클 ‘일진회(一陣會)’로 알아들을 것이다. 블랙코미디 아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