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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사람 얼굴 모양' 출토된 무덤에서 알아보는 흉노역사

몽골 연구기관과의 협약으로 몽골 현지의 흉노유적을 발굴중인 국립중앙박물관 조사팀이 사람 얼굴 모양의 은제 허리띠 장식 등 흉노유물을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학고고학연구소 등과의 협약으로 몽골 헨티 아이막의 도르딕 나르스 유적의 흉노무덤 200여기 중 가장 큰 제160호 무덤과 그 무덤에 딸린 배장묘를 조사한 결과 사람얼굴모양의 은제허리띠를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은제 허리띠 장식의 경우 비슷한 형태를 한 2점이 피장자의 허리부분에서 출토됐다. 이런 형태의 유물은 러시아내 몽골자치공화국인 부랴트 공화국의 차람 고분군 등 몽골 동북부 지역의 흉노무덤 등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 유물의 연대는 기원후 1세기 쯤으로 편년된다. 

기원후 1세기 흉노족 무덤에서 발굴된 사람 얼굴 모양의 은제 허리띠 장식.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기원후 1세기 쯤이라면 욱일승천하며 한나라를 쥐락펴락했던 흉노가 한무제의 반격을 받고 북으로 북으로 쫓겨난 시기였다. 흉노의 전성기는 기원전 200년~기원전 100년 사이였다. 흉노는 특유의 기마전법으로 진나라 말~한나라 초 어지러운 중원의 상황에 힘입어 강성해졌다. 특히 두만 선우(?~기원전 209)에 이어 정권을 잡은 묵특(돌) 선우(기원전 209~174)가 흉노를 강대국으로 키웠다.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 고조도 묵돌선우에게 무릎을 꿇고만다. 즉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기원전 202년 겨울, 한고조 유방은 흉노 묵돌선우의 계략에 말려 평성(산서성 대동시·山西省 大同市)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당했다가 겨우 목숨을 보전한다. 

이것이 중국역사가 일컫는 ‘평성의 치욕’이다. 한나라는 흉노의 계속된 침략에 ‘한나라 공주를 선우의 연지로 보내고, 해마다 일정량의 무명과 비단, 술, 쌀 등을 바치며, 형제의 맹약을 맺어 화친한다’는 내용의 불평등 조약을 맺는다. 한나라는 흉노 왕에게 종실여인과 조공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 형제의 연, 아니 사실상 동생이 되기를 약속한 것이다. 흉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한고조가 죽고. 그의 부인 여태후(?~기원전 180)가 정권을 잡자 묵돌은 일종의 연애편지까지 보내 한나라를 한껏 조롱했다. 

“당신도 홀로 됐고, 나도 혼자이고…. 뭐 둘 다 즐거운 일도 없고…. 어떠신가요. 있는 걸로 없는 것을 바꿔보심이….”(陛下獨立 孤분獨居 兩主不樂 無以自娛 願以所有 易其所無)”

당시 한나라의 ‘사실상’ 황제인 여태후(?~기원전 180)가 흉노의 묵돌 선우(왕)로부터 받은 이 외교서한은 곧 “당신도 과부, 나도 홀아비이니 함께 만나 즐겨보자”는 것이었다. 한나라 조정은 흉노족이 안긴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여태후는 지금으로 치면 장수들을 총동원,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었다. 일각에서는 이참에 흉노족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진나라 역시 흉노 때문에 망했는데, 이제 갓 개국한 한나라는 더욱 감당할 수 없다”는 신중론이 개진됐다. 그 무렵 흉노는 누란과 오손, 호계 등 26개 인접국까지 모조리 병합하면서 더욱 기세를 떨쳤다.

흉노 무덤 위쪽에 조성된 13~14세기 무덤에서 확인된 백화수피제 모자가 출토되고 있는 모습. 이 모자는 당시 여인들 사이에 유행된 아이템이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때 한나라는 흉노의 적수가 아니었다. 묵돌의 뒤를 이은 노상계죽 선우(재위 기원전 174~160)는 한나라에 국서를 보내 “나는 하늘이 세운 흉노 대선우(天所立匈奴大單于)다. 천지가 생겨난 곳, 해와 달이 머무는 곳의 흉노 대선우(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가 삼가 한 황제에게 묻노니 안녕하신가? 그리고 보내줘야 할 물건은~용건은~”하는 서신을 보내 “빨리 조공물을 보내라”고 독촉하는 외교문서를 보낸다. 

이같은 도발에도 한나라는 꿈쩍도 못했다. 흉노는 한발 더 나아가 “한나라는 해마다 보내기로 한 비단, 무명, 쌀, 술을 차질없이 보내주기만 해라. 쓸데없는 말 지껄이지 말고…. 만약 나쁜 물건을 보낸다면 각오하라. 곡식이 익는 가을을 기다렸다가 기마병으로 농작물을 확 짓밟아 놓을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협박했다.

그러나 욱일승천하던 흉노의 기세는 한 무제(기원전 141~기원전 87)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꺾인다. 한나라는 기원전 115~기원전 73년 사이 무위, 장액, 주천, 돈황에 이르는 이른바 하서 4군을 획득한다. 흉노는 고비사막 북쪽으로 후퇴한다. “우리는 기련산을 잃었네. 이제 가축을 먹일 수 없네. 우리는 연지산을 잃었네. 여인들의 얼굴을 물들일 수 없네.(失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失我燕支山 使我嫁婦無顔色)”

<사기>의 주석서인 ‘색은(索隱)’에 실린 흉노 민요이다. 흉노가 요충지인 기련산(祁連山)과 연지산(燕支山·감숙성 하서주랑)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여인들이 얼굴에 찍는 연지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이후 부침을 계속하던 흉노는 한나라의 공격과. 천재지변, 그리고 내분이 이어지면서 쇠퇴일로를 겪는다. 

흉노의 서쪽 지방을 지배한 일축왕이 한나라에 투항(기원전 60)한 뒤 동서로 분열된다. 기원후 48년에는 지금의 내몽골과 화북 일부에 사는 남흉노와 외몽골에서 패권을 잡은 북흉노로 나뉜다. 남흉노는 중국의 속국이 됐다.

이번에 발굴된 사람 얼굴 모양의 허리띠 장식은 바로 이 무렵 완연한 쇠퇴기에 접어든 북흉노의 유물이다. 

발굴품 중에는 흉노 무덤인 제160호 고분 위에 조성된 13~14세기 후대의 무덤에서 인골과 함께 원통형의 백화수피제 모자를 확인했다. 

이 모자는 당시 여성들의 ‘잇 아이템’이었다. 

여담이지만 발굴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북흉노는 기원후 151년 이후 선비족의 추격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 학계에서는 북흉노를 4~5세기 동유럽 석권하고 로마제국의 쇠망에 영향을 끼친 훈족과 결부시키고 있다. 

훈족은 375년 발라미르의 지휘 아래 동유럽으로 침입했던 유목민이다. 훈족의 침략으로 유럽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결국 동유럽에 거주하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야기시켰고, 로마제국을 흔들었다. 훈족의 침략은 유럽세계를 형성시킨 민족대이동의 발단이 됐다. 볼가강과 판노니아 평원에서 발견되는 흉노식 유물들이 증거자료로 거론된다. 특히 삶고 끓이는 조리용기인 동복(구리로 만든 솥)은 대표적인 흉노식 유물이다.

이처럼 몽골 동북부 초원의 대형 흉노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을 단서로 흉노족의 흥망성쇠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이나경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학예연구사는 “출토된 유물의 보존처리와 인골의 DNA 분석 및 동물유체 분석 등을 통해 흉노를 비롯해 동시기 한반도에 위치했던 국가 및 정치세력과의 비교연구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