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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사형장 풍경…인간백정의 역사


 “옛날 요임금은 천하를 다스릴 때 한 사람 죽이고 두 사람에게만 형벌을 내렸는 데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사기> ‘서(書)’)
 “순임금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삼가야한다. 삼가야한다. 형벌을 행할 때는 가엾게 여겨야 한다.(欽哉欽哉 惟刑之恤哉)’”(<사기> ‘오제본기’) 
 백성들이 고복격양가를 불렀다는 요순시대의 이야기다. 한마디로 형벌을 가볍게 해야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후대의 군주들도 요순을 따르려 무진 애를 썼다. 예컨대 한나라 효문제는 사람의 몸을 훼손하는 이른바 육형(肉刑)을 없애면서(기원전 168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윤보의 <형정도첩>에 묘사된 조선시대 참형 모습.참형은 사지를 찢어죽이는 능지처참에 이어 두번째로 혹독한 형벌이었다.

“육형이 있어도 간악함이 멈추지 않으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교화를 베풀지 못하고 형벌부터 먼저 가하니…. 무릇 형벌이란 사지를 잘라버리고 피부와 근육을 도려내 죽을 때까지 고통이 그치지 않으니 얼마나 아프고 괴로우며 부덕한 것인가. 육형을 없애도록 하라.”(<사기> ‘효문제 본기’)
 효문제는 그러면서 “다정하고 자상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는 <시경>의 내용을 인용했다.
 <사기> ‘혹리열전’은 “백성을 법으로 다스리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면서 “도덕으로 다스릴 때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 길로 간다”고 충고했다.
 어디 중국의 군주들 뿐인가. ‘해동의 요순’이라는 칭송을 받던 세종은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1432년(세종 14년) 지방관 부임인사차 찾아온 정사와 양서적에게 신신당부한다.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라. 형벌은 중대한 일이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득이 형벌을 쓰더라도 구휼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억울하게 죽는 자는 없게 될 것이다.”

 

 ■‘공자님 말씀일뿐’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요순시대에나 있을 ‘공자님 말씀’이다.
 예를 들면 공자도 “형벌 대신 도덕으로 다스리라”고 강조하긴 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공자님 말씀’이시다.
 그런 공자였지만 한비자가 “옛날 상나라의 법도엔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손목을 잘랐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단다.
 “그것이 곧 치국의 도리(此治道也)이니라.”
 공자 뿐인가. 주문공(주희)도 이런 말을 했단다.
 “때때로 형벌을 가벼이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형벌이 가벼울수록 패역(悖逆)하여 작난(作亂)할 마음만 자라게 된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요순을 닮으라면서 뒤에서는 ‘법대로 처단’을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극형 중의 극형이라는 능지처참형을 60번이나 집행했고, 190명에 달하는 사형수로 감옥이 넘쳐났다니….

 

 ■사람을 죽여 포를 뜨고 젓을 담가 조리돌렸다
 그랬다. 역사는 요순의 이상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돌이켜 인간의 역사를 곱씹어보면 그야말로 야만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는 자괴감이 든다. 법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야만의 역사를 일별해보자.
 예컨대 상나라 마지막 군주인 주왕의 만행을 보라.
 “주왕은 충성스런 신하인 구후와 악후를 죽여 포를 뜨고 소금에 절여 젓을 담갔다. 그리곤 그것을 제후들에게 보내 맛보게 했다. 이를 ‘해형(해刑)’이라 한다. 또한 기름 바른 구리 기둥 밑에 불을 지핀 뒤 그 기둥 위에 죄인을 걷게 했다. 미끌어진 죄인들은 불에 떨어져 죽었다. 이를 ‘포락지형(포烙之刑)’이라 했다.”(<사기> ‘은본기’)
 그 뿐이 아니었다. 주왕은 숙부인 비간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하자, “성인은 심장이 7개라 하는데, 한번 보고 싶다”며 비간의 심장을 꺼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상나라를 멸한 주나라에 들면 형벌은 5가지로 요약된다. <상서(尙書)> ‘여형(呂刑)’을 보면 “주나라 시대에는 5가지 형벌, 즉 묵(墨)·의(의)·비(비)·궁(宮)·대(大)가 있었다”고 했다. ‘묵’은 이마에 먹물로 문신하는 형벌이다. ‘경(경)’이라고도 한다. 요즘 성범죄자에게 발찌를 채우는 형벌과 비견할 수 있겠다. ‘의’는 코를, ‘비’는 다리나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이다.
 ‘궁’은 성기를 자르거나(남성) 메우는(여성) 형벌이고, ‘대(大劈)’는 참수를 뜻한다. 그런데 이 5가지 형벌에 해당되는 죄는 무려 3000여 가지에 달했다.
 주나라 때 형법을 제정한 목왕(976~922)은 “경형(묵형)과 의형에 속하는 죄가 각각 1000가지, 비형에 속하는 죄가 500가지, 궁형에 속하는 죄가 300가지, 대벽에 속하는 죄가 200가지이다. 그러니 오형에 속하는 법조항은 모두 3000가지이다.”(<사기> ‘주본기’)

갑신정변 이후 망명한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살해당했지만, 그의 시신은 다시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고 목이 효수되었다.

■3600회의 칼질로 사형시키다
 이 가운데 짐승보다 더 극악한 극형은 능지처참(사)이 아닌가 싶다.
 ‘능지(凌遲)’란 무엇인가. 그대로 산이나 구릉의 완만한 경사이다. 그러니까 능지처사는 되도록이면 천천히 고통을 극대화하면서 사형에 처하는 극형인 것이다.
 능지처사의 역사는 깊다. 역시 3300~3000년 전 상나라 말기의 갑골문에 등장한다.
 “폭동을 일으킨 강족(羌族) 한 사람의 사지를 찢어죽였다.(책)” “강족 사람 15명을 찢어 죽일까요.(책)”  
 사지를 찢어죽이는 형벌, 즉 책형(책刑)은 능지처참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칼로 차례차례 베어 죽이는 능지처사는 10세기, 요나라 때부터 시작됐다. 이후 송·원·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됐다. 능지처사는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극형이었다. 죽을 때까지 칼로 살을 베는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1510년 명나라 환관 유근은 반역음모를 꾸민 죄로 무려 3357회의 절개형을 받았다. 1639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패륜을 저지른 정만이라는 자는 무려 3600회의 절개명령을 받았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물을 뿌려가며 죽을 먹여가며 칼질을 해댔다니 얼마나 끔찍한가. 칼질이 아니더라도 죄인의 팔과 다리를 먼저 자르고 목을 치는 형태로도 이어졌다.

 

 ■저잣거리의 칼춤
 중요한 착안점이 있다.   
 참형이나 능지처참 같은 잔인한 형벌이 사람들이 부적대는 저잣거리에서 만 백성이 보는 앞에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일벌백계, 혹은 ‘시범케이스’라 할까. 
 예컨대 중국 한나라 때의 사형장은 수도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의 남문 안에 있는 고가(藁街)였다. 그런데 이곳은 제후국(속국) 사절들이 머무는 만이저(蠻夷邸) 인근에 있었다.
 이런 곳에 사형장을 설치한 이유는 명백하다. 한나라의 위엄에 복종하지 않으면 저 사형수와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실제로 한나라는 기원전 47년(한 원제 3년) 한나라를 괴롭혔던 흉노왕 질지 선우의 목을 잘라 만이저의 문에 그 머리를 내걸었다.(<한서> ‘원제기’)
 이후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고가’는 바로 사형장의 상징어가 됐다. 예를 들어 송나라 충신 호전은 1138년 “(금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왕륜·손근·진회 등 세사람의 목을 베어 고가에 달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린 적이 있다.
 또 <동문선>의 ‘조칙·인종사부식약합조(仁宗賜富軾藥合詔)’를 보면 “묘청의 난을 진압, 괴수의 머리를 베어와서 고가에 매달았다”는 표현이 보인다.
 수괴의 머리를 베어 만백성들에게 경계를 삼으려 보였다는 것이다.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국여도>에 그려진 도성과 서대문 일대의 모습. 조선시대 사형장은 주로 도성에서 서쪽으로 10리 안팎 떨어진 당고개, 양화, 새남터와 서소문 밖 등에 자리잡고 있었다.|서소문순교성지 전시관 전시 사진

■“시신 몸뚱아리를 시장바닥에 전시하라”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1407년(태종 6년) 충청도 연산에서 내연남과 짜고 남편을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남녀가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당시 반역죄와 강상죄 등은 능지처참 가운데서도 거열, 즉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죄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을 받았던 것이다. 이 때의 <태종실록>을 읽어보라.
 “태종이 ‘법에 능지의 조항이 있느냐’고 묻자 황희는 ‘이전에 거열로 능지를 대신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시골에서 사형을 집행한들 누가 알겠는가. 본보기를 위해 서울의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열하고 사지를 나누어 지방의 각 도에 보내라’고 지시했다.”(<태종실록)
 삼강오륜을 해치는 강상죄나 반역죄를 범한 자는 이렇게 공개처형의 방식으로 죽인 것이다.  
 본보기를 위해 목과 사지가 떨어진 시신을 시장 바닥에 3일 혹은 6일간 내버려두는 ‘기시(棄市)의 형’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예컨대 1728년(영조 4년) 전국적으로 20만 명이 가담한 이인좌의 난이 가까스로 진압됐다. 난을 일으킨 이인좌 등이 결국 붙잡혀 현장에서 참수된다. ‘나머지 무리’도 일망타진됐다. 
 영조는 숭례문에 올라 이인좌 등의 수급(머리)를 받는 의식을 ‘자랑스럽게’ 거행했다. 백성들이 앞다퉈 그 장면을 구경하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영조는 나머지 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죄수들의 목을 베 그 시신들을 저잣거리에 내다보이는 기시(棄市)의 법으로 처벌했다.(<영조실록>)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칼로 부모와 형, 그리고 고을 수령까지 상해를 입힌 자에게 ‘기시’의 형을 내렸다.(1438년)
 형조에서 ‘패륜죄지만 범인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자이니 기시형은 과하다’는 의견을 올렸다. 하지만 세종은 강상죄를 범한 죄가 무겁다고 하여 기시형을 허락하고 말았다.(<세종실록>)
 
 ■죽음의 서쪽
 조선시대의 첫번째 공식 처형장은 서소문밖 10리였다.
 “1416년(태종 16년), 예조가 아룄다. ‘사형장을 서소문 밖 성밑 10리 양천 지방, 예전의 공암 북쪽으로 정하소서.’”(<태종실록>)
 아닌게 아니라 서쪽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죽음과 어둠을 의미했다.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서왕모는 죽음과 어둠을 관장하는 반인반수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서쪽 끝 신령스런 산인 곤륜산에 살면서 다양한 재앙을 내리고, 5가지 형벌을 집행했다.
 그러고보니 사형장으로 이용됐던 양화진(마포구 합정동), 당고개(당현·용산구 신계동·문배동), 와현(용산구 한강로), 새남터(노량사장·용산구 이촌동), 서소문밖(중구 의주로 2가) 등은 모두 서쪽에 있다. 그것도 대체로 서소문을 기준으로 10리 안팎에 있다. 잠깐 가만히 보니 일제시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곳이 서대문형무소가 아니던가.
 소년원과 화장터 역시 모두 서쪽에 있었고, 죽음을 상징하는 고태골(은평구 신사동) 역시 서쪽에 있었으니….

 

서소문 밖 형장을 표시해놓은 사진. 서소문밖 형장에서는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 등 천주교 신자들이 줄줄이 참형을 당했고, 홍경래, 김개남 등도 참수형을 당한 뒤 이곳에서 목이 효수되기도 했다. 영조 때 영조를 맹비난했다는 이유로 당고개에서 참형 당한 목호룡도 이곳에서 다시 효수된 뒤 긔의 목과 사지가 전국 8도에 조리돌려졌다.|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전시사진

 ■당고개에선 참형
 각설하고 사형장에서 벌어진 갖가지 살풍경을 일별해보자.
 1613년(선조 33년) <선조실록>은 “평상시 능지처참은 저잣거리에서 시행했고 참형은 당고개에서 행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죄를 지은 왜인 2명을 참형에 처하면서 의금부가 임금에게 아뢰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사형장 가운데 당고개에서는 주로 참형이 집행됐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1532년(중종 27년) 기묘사화를 전후로 자기 생각을 줄기차게 상소한 이종익이 무고 혐의로 당고개에서 참형을 당했다.(<중종실록>)
 1613년(광해군 5년) 궁중 나인과 간음한 임혁 역시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간음한 궁중나인 영생은 역시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나마 임금을 모신 나인이었다는 것 때문에 은전을 받은 것이다.(<광해군일기>) 1681년(숙종 7년) 기우제에서 “가뭄은 부덕한 한 사람(중종) 때문에 일어났으므로 기도해봐야 물리칠 수 없다”는 제문을 쓴 유생이 모역죄로 역시 이곳 당고개에서 참수됐다.(<숙종실록>)
 
 ■능지처참은 군기감 앞에서
 그러나 “능지처참은 저잣거리에서 집행한다”는 원칙대로 반역모반죄의 대역죄인은 주로 성문안 군기감(병기제조청·중구 태평로 1가) 앞길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1824년(영조 2년) “역적은 반드시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하고 수족을 따로 떼어낸 뒤 그 머리는 철물교(종로 2가 사거리에 있던 다리)에 내걸고, 수족은 전국 8도에 조리돌려야 한다”는 의금부의 상소를 보라. 문자 그대로 만백성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뜻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성삼문과 이개 등 사육신 등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인사들의 사형집행이다. 1456년(세조 2년)의 <세조실록>을 보라.
 “백관들을 군기감 앞 길에 모아서 빙 둘러서게 했다. 그런 다음 이개 등을 환열(환裂·수레로 찢어죽임)하고 3일 간 저잣거리에서 효수(梟首·목을 내걸었다는 뜻)했다.”
 성삼문 등은 죽음과 맞섰지만 세조를 ‘전하’라 부르지 않았단다. 그저 “‘나으리’라 하면서 “상왕(단종)이 계신데 어찌 나으리가 나를 신하라 하느냐”고 대들었다니….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다.

 

 ■형장으로 주목받은 서소문 밖
 반면 서소문 밖 형장은 같은 능치처참 중에서도 약간이라도 가벼운 죄목의 사형집행을 담당했다.
 예컨대 1844년(헌종 10년) 모반대역죄로 붙잡힌 권시응과 박순수의 형장이 달랐다.
 ‘대역죄를 저지른’ 권시응은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을 당한 반면, ‘대역부도죄를 알았지만 고하지 않은’ 박순수는 서소문밖에서 참형을 당한 것이다.
 또 1504년(연산군 10년) 영응대군(세종의 여덟번째 아들)의 종인 만수가 서소문밖에서 능지처참 당했다. 반역죄가 아닌만큼 서소문밖이 형장으로 선택된 것이다.
 “만수는 주인 댁(영응대군과 그 부인)의 세력을 믿고 살찐 말을 타고 호사스런 옷을 입고 많은 종을 거느리면서 도성을 달리고 대신들을 만나도 비키지 않았다. 또 교만을 품고 사람들을 위협해서 때리고….”
 만수가 받은 형은 끔찍했다. 사지가 찢긴 뒤 목이 효수되고, 뭇사람들을 모아 시신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연산군은 그것도 모자라 “만수의 목을 영응대군의 부인에게 보이라”는 명을 내렸다. 연산군은 희대의 폭군 답게 말년에 임금의 사냥구역을 만들어 출입금지 표지인 금표(禁標)를 만들었는데, 이 구역을 넘어온 두 사람을 서소문밖에서 참형에 처한 뒤 금표에 목을 효수했다. 백성을 개·돼지로 취급한 것이다.

상나라 시대 갑골문, 목을 자르는 벌형(伐刑)을 내려도 좋을 지를 묻고 있다. 잔인한 형벌의 역사는 이렇게 뿌리깊다.

 ■홍경래·김개남의 목이 효수되다
 서소문밖이 사형장으로 주목받은 이유가 있다.
 도성과 붙어있는 데다 인근에 칠패시장(중구 봉래동)이 있어서 본보기의 형장으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613년(광해군 5년)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 혐의를 뒤집어쓴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이 이곳에서 사사됐다.
 이때 승정원이 사사할 곳을 묻자 광해군은 “서소문밖”이라 지정해주었다.
 서소문밖은 이미 형집행을 당한 죄인들을 조리돌리는 장소로도 활용됐다. 이것을 추형이라 한다.
 홍경래의 난을 간신히 진압한 뒤인 1812년(순조 12년) 5월 7일의 <승정원일기>를 보자.
 “수괴인 홍경래와 그 무리의 수급을 서소문밖에 3일간 내걸어 뭇사람들에게 보인 뒤 전국 8도로 보내라.”
 사실 홍경래는 4월19일 관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뒤 그 자리에서 참형을 당한 바 있다. 그러나 비국(비변사)이 “흉적 홍경래의 무리가 이미 참형을 받았지만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정식재판에 의한 형집행이 이뤄진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태인 접주)인 김개남은 1895년 1월 전주장대에서 참수 당했다.  그러나 그의 목 역시 서소문밖 사거리에 3일간 현수됐다가 농민운동이 일어난 지방에 본보기로 조리 돌렸다.

 

 ■시체의 수족을 다시 자르다
 1724년(영조 즉위년) 능지처참의 극형을 받은 목호룡은 또 어떤 사람인가. 
 목호룡은 “영조가 세자시절에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하려 했다”고 폭로한 인물이다. 그는 이 고변으로 경종 임금으로부터 공신에 올랐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국문장에 끌려오는 신세가 됐다. 그는 뼈와 살이 떨어져나가는 국문장에서 “나의 고변은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므로 한 점 부끄럼 없다”고 고개를 빳빳히 세웠다. 영조는 목호룡을 당고개에서 참형에 처하고 그의 목을 내버려 두었다. 의금부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역적은 반드시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호룡의 경우 이미 당고개에서 처참하여 몸뚱이가 교외에 있습니다. 지금 그 냄새나고 더러운 물건을 성(城) 안으로 끌고 들어와 길거리에 내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참(斬)한 시체의 수족을 다시 참하는 것은 아마도 법의(法意)가 아닐 듯합니다. 어떻게 하오리까.”
 그러나 영조의 분이 풀리지 않았다.
 “목호룡의 죄는 팔방에 널리 알려야 한다. 비록 성 안으로는 끌고 들어올 수 없지만 전국 8도에 조리 돌리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의 수급은 사흘간 성문 밖에 내걸어 백성들이 다 볼 수 있도록 하라.”
 임금의 명에 따라 목호룡의 목은 3일간 서소문 밖에 내걸렸으며, 효수 기간이 끝나자 머리와 수족을 전국 8도로 조리돌렸다.
 ‘조리돌린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죄지은 자를 망신시키려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는 뜻이다. 그런데 산 사람도 아닌 시신의 일부를 전국에 돌려보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 대목에서 폭군의 상징인 상나라 마지막 군주 주왕이 떠오른다. 신하들을 죽여 포를 뜨고 소금에 절여 젓을 담가 제후들에게 맛보게 한 상나라 주왕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목을 나무토막에 걸어놓고’
 중흥군주라는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하자 서소문밖 형장에는 미증유의 피바람이 분다.
 1801년(순조 1년) 순조 즉위 후 수렴청정에 나선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소름끼치는 하교를 내린다.(<순조실록>)
 “사학(邪學·천주교)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금수(禽獸)처럼 돼가고 있다.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다. 마땅히 처벌하여 진멸시키라.”
 이 하교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간다. 이승훈·정약종·황사영 등 천주교인 40명(혹은 31명)이 줄줄이 잡혀 참수형을 당한다. 이 해의 탄압을 신유박해라 한다.
 이후 기해박해(1838년·41명)와 병인박해(1866~1874년·13명) 등까지 모두 94명(혹은 85명)이 서소문밖 형장에서 능지처참 혹은 참형을 당했다.
 프랑스 선교사 클로드 샤를르 달레(1829~1878)가 전하는 형장의 살풍경을 보라.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이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수레가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수레는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렸다.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았다. 형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19세기말 조선을 방문한 이사벨라 비숍(1832~1904)도 비극적인 필치로 서소문밖 사형장을 묘사했다.
 “범죄인들이 목이 잘리기 위해 통과하는 문이 있다. 이들의 목은 처형된 뒤 야전 냄비걸이처럼 생긴 꼬챙이에 걸려 며칠동안 전시된다.”(비숍의 <한국과 이웃나라>)
 그러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참하게 죽은 천주교인의 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800년대 100년간의 천주교 박해 기간 중 전국적으로 1만여명이 희생됐다니까….
 그 중 상당수가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했고, 충청도의 공주와 홍성·해미 등에서 희생됐다.      
 그 가운데 청나라 신부 주문모는 새남터(노량사장)로 압송돼 군문효수됐다. 새남터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훈련장인 연무장이었다.
 군문효수란 국사범을 군법에 따라 처단하고 그 목을 군문(軍門)에 걸어 본보기를 보이는 극형이다.
 주문모 신부 뿐 아니라 로랭 엥베르, 피에르 모방·자크 샤스탕 신부와 김대건 신부 등이 줄줄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됐다.

 

  ■‘제발 단칼에 쳐주세요.’
 조선시대 공식 참형장으로 이용된 당고개에서는 한 천주교인의 비극적인 순교가 눈물을 자아낸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참형당한 부인 이성례의 이야기다. 천주교인 최경환의 부인이며 두번째 사제였던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다.
 그녀는 마카오 유학 중인 맏아들 최양업 신부를 제외하고 5명의 자식과 함께 옥에 갇혔다. 그런데 옥중에서 3살짜리 막내가 빈 젖을 빨다가 굶어죽는다.
 이성례는 남은 자식 4명을 살리려고 일시적으로 배교하고 출옥한다. 그러나 6~15살짜리 자식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 스스로 옥으로 돌아와 갇힌다.
 동냥 나간 자식들은 어머니가 참형을 당하지 전날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가지고 사형 집행인을 찾아 신신당부한다. “어머니가 고통 당하지 않도록 단칼에 베어달라”고….
 자식들의 부탁에 감동 받은 사형집행인은 밤새도록 칼을 갈아 그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양화진(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에서도 법을 빙자한 대량살륙이 벌어졌다. 
 즉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 신자가 공식적으로 29명에 이르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까지 합치면 177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치가 있다.
 이곳 또한 한양~강화가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고 한강의 조운을 통해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세곡을 저장했다가 재분배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 본보기로서는 적격인 장소였다. 갑신정변 실패(1884년)로 상하이 망명 중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체가 다시 능지처참된 뒤 효수된 곳이 바로 양화진이었다.(1894년 4월) 그의 사지 역시 전국 팔도로 조리돌렸다.

 

 ■인간백정의 역사
 이런 야만의 역사가 동양에서만 자행된 만행은 아니었다.
 로마시대 때도 사형·투옥·태형 등은 사제의 손에 의해 자행됐고, 중세 유럽에서는 사형판결을 공동체가 내리므로 집행 또한 공동체 스스로 해야 했단다.
 도시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이 처형장이 되었고 시체는 매단채 방치됐다니….
 예를들어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1715~1757)은 대역죄로 기소돼 파리 그레브 광장에서 처형당했다. 그런데 처형 당하기 전 가슴과 팔, 넓적다리, 종아리 등이 불에 달궈진 집게로 지져지고, 왕을 찌를 때 사용한 오른손은 유황불에 태워지는 등 처참한 고문을 당하였다. 처형은 4마리 말에 사지가 각각 묶인 채 갈가리 찢겨졌다. 한마디로 능지처참을 당한 것이다. 역사를 읽으니 문득 자괴감이 든다. 무슨 이런 야만의 역사를 살아왔을까. 사람의 몸 안에 잠재된 짐승보다 못한 인간백정의 역사가 아닌가.
 그렇게 능지처참으로 만천하에 본보기를 보였다고 범죄가 줄어 들었을까. 그 역시 누명을 쓰고 굴욕적인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법령이란 다스림의 도구일 뿐이다. 진(秦)나라 때 법망은 치밀했지만 간사함과 거짓은 싹이 움트듯 일어났다. 관리들이 불은 그대로 둔채 끓는 물만 식히려 했기 때문이다. 법망은 배를 집어삼킬만한 큰 고기도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워야 한다.”(<사기> ‘혹리열전’)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