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서울은 '정도 2000년'이다. 600년이 아니다.

  잘 알다시피 백제는 기원전 18~기원후 660년까지 678년을 이어온 고대국가였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백제는 아무래도 웅진(475~538)~사비 시기(538~660)의 백제일 것이다.
 물론 이 185년의 백제 역사도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백제가 또 있다. 기원전 18~기원후 475년 사이에 한성을 도읍으로 삼은 백제이다. 놀라지마라. 이 한성백제는 전체 678년의 백제역사 가운데 4분의 3에 해당되는 492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31명의 백제 임금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21명이 한성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풍납토성 복원도. 온조왕이 처음 쌓을 때는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궁실을 짓는다는 것이 목표였다.

고구려를 탈출한 온조 세력은 강과 바다(서해), 산과 들이 어울린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했다. 온조의 형인 비류는 처음부터 바닷가인 미추홀(인천)에 자리를 잡은 후 동생(온조)세력에 합류했다.
 고이왕(재위 234~286) 때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았고, 근초고왕 때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였다.(372년)
 백제가 한강 유역과 서해를 차지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당대의 중국 사서(<송서> <남사> <양사>)는 “백제가 중국 동북부 요서(遼西)지방까지 진출했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이른바 ‘백제의 요서경략설’이다. 물론 우리측 사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는 없는 기록이라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삼국사기> ‘열전·최치원전’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와 백제는 백만강병으로 남으로 오·월을 침해하고 북으로 연·제·노를 위협해서 중국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물론 최치원은 백제의 요서경략을 지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양국가’인 백제가 고구려와 경쟁하며 앞다퉈 대륙에 진출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과문한 필자가 요서경략설의 진위를 함부로 논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한성기’ 백제가 백제의 절정기였음을 ‘분명한 팩트’임을 강조한 것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한성백제’를 떠올리면 왠지 애잔한 느낌이 드니 말이다.
 아무래도 475년 9월에 있었던 ‘한성백제의 최후’가 너무도 비참했기 때문이리라. 한성은 7일 밤낮에 걸친 3만 고구려군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개로왕은 백제 망명객 출신의 고구려 장수들(걸루·만년)에 붙들려 한껏 욕보임을 당한 뒤 참수됐다. 개로왕의 아들(혹은 동생)인 문주가 신라로부터 1만 군대를 지원받아 달려왔지만 때는 늦었다. 한성은 이미 폐허가 된 것이다. 문주는 피눈물을 흘리며 웅진으로 천도한다. 한성백제는 이후 ‘잊혀진 왕국’으로, 도읍지 한성은 ‘버려진 땅’으로 치부됐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폐허가 된 망국의 도읍지를 보고 읊었다는 은나라 성인 기자(箕子)의 ‘맥수지탄(麥秀之嘆)’이 떠올린다.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주거지. 한성백제 관료들의 주거지로 추정된다.

 “(파괴된 궁실터에서) 보리가 잘 자랐고, 벼와 기장도 파릇하구나. 어리석은 애(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 내 말을 좀 들었더라면….(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사기> ‘송미자세가’)
 한성백제는 그 은나라처럼 ‘잊혀진 왕국’으로, 도읍지 한성은 은허(殷墟)처럼 ‘버려진 땅’으로 치부된 것이다.
 그렇게 잊혀졌던 한성백제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1997년 1월이었다. 한 고고학자(이형구 당시 선문대교수)가 공사 중이던 풍납토성 내부의 아파트 터파기 건설현장을 잠입해서, 무수히 박힌 한성백제 문화층을 발견한 것이다. 대규모 개발로 흔적조차 영영 사라질뻔한 한성백제가 1522년 만에 현현한 것이다. 발굴 결과 풍납토성은 연인원 138만명을 투입, 아파트 5층 높이로 구축한 어마어마한 성이었음이 확인됐다. 학자들은 이제 왕·귀족 및 도성민의 거주성(풍납토성)과 배후성(몽촌토성), 무덤(석촌동 고분) 등을 세트로 묶어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우물터. 당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구이다.

 그렇다면 서울은 ‘정도(定都) 600년’이 아니라 ‘정도 2000년’이 되는 것이다.
 오는 6월 필자의 시선을 붙잡는 이벤트가 독일 본에서 열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총회이다. 여기서 ‘공주·부여·익산의 백제역사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백제 역사의 4분의 3를 차지하는 ‘한성백제’가 빠졌다. 뒤늦게 서울시가 ‘확장(extention)’ 방식으로 ‘한성백제 지구’를 등재할 계획이라고 한다. 일단 공주·부여·익산 지구의 등재가 마무리되면 백제역사라는 큰 틀에서 한성백제를 ‘확장 등재’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한 계획이다. 유네스코가 제시한 세계유산의 등재조건은 ‘진정성(authenticity)’과 ‘완전성(integrity)’이다.
 ‘한성’은 어떨까. 우선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판단하는 ‘진정성’에서는 당연히 합격점을 받을 수 있다. 결국 유산의 본모습, 즉 본연성을 찾는 노력을 판정하는 ‘완전성’이 등재여부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이것이 절대 규제완화의 단견으로, 시간에 쫓겨 섣부른 대책을 세워서는 안된다는 점을 웅변해준다. 물론 세계유산 등재가 ‘절대선’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한성백제 492년의 역사’, 그 희대의 선물을 발로 차버리는 죄인이 될 수는 없지 않는가.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