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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성애의 나라 신라?

 “진흥왕의 태자(동륜)은 아버지 진흥왕의 후궁 보명궁주를 연모했다. 태자는 마침내 궁주의 담을 넘어 관계를 맺었다. 얼마 후, 태자가 밤중에 홀로 보명궁의 담장을 넘다가 큰 개에 물려 죽고 말았다.”
 1989과 1995년. 김대문(金大問)이 7세기 말 편찬했다는 ‘화랑세기’의 발췌본과 필사본이 잇달아 발견됐다. 필사한 이는 한학자 박창화(1889~1962)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궁내청에서 일하던 중 <화랑세기>의 원본을 보고 베꼈다는 것이다. <화랑세기>는 540~681년 사이에 활약한 화랑의 우두머리(풍월주) 32명의 전기다.  이 책은 540~681년 화랑의 우두머리(풍월주) 32명의 전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가짜’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야말로 끝을 모르는 ‘어색(漁色·물고기를 사냥하는 듯한 엽색행각)’…. 그 뿐이 아니라 근본을 찾을 수 없는 근친혼과 사통·통정과 같은 난잡한 성행위…. 앞서 태자가 아버지의 여인을 몰래 범하다가 개에 물려 죽었다는 구절은 그야말로 세발의 피다. 미실이라는 여인을 보자. 여인은 임금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 1명(동륜),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을 닥치는대로 녹여버린 희대의 요부였다.
 미실은 황실에 색을 제공하는 신분(대원신통)이었다
. 여인은 “백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있고 세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게다가 어머니(묘도)로부터 ‘남자를 녹이는’ 방중술(房中術)을 배웠다. 화랑세기는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정식남편인 세종은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입에 담을 수 없는 ‘망측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니, ‘가짜’라는 평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낙인찍을 수 있을까. 유교적 유리관의 잣대로 신라사회를 단칼에 재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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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물론 이같은 신라의 풍습을 일일이 적시하지는 않았다. 개에 물려죽은 동륜의 죽음도 “동륜이 태자가 되었다가(366년) 죽었다.(372년)”고만 기록했을 뿐이다.
 하지만 ‘까탈스런’ 유학자인 김부식이었지만 신라의 풍습을 양해하는 논평(史論)을 달았다. 
 “신라에서는 같은 성끼리는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모·이모·사촌자매까지 아내로 맞이했다. 이를 중국의 예속으로 이를 따진다면 큰 잘못이다.(責之以中國之禮 則大悖矣)”(<삼국사기> ‘내물왕 즉위년조’)

 

 화랑세기는 이같은 신라의 풍속을 이렇게 규정했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음이야.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는가.”(<화랑세기> ‘양도공조’)
 그러고보면 <삼국사기>나 <삼
국유사>를 보면 얼핏얼핏 신라사회의 비밀이 보인다.
 김춘추의 사위이자 대야주 도독인 품석도

막객 검일의 아내를 빼앗은 일도 있다.(<삼국사기> ‘열전·죽죽조’) 이에 화가 난 검일은 백제와 내통해 성을 함락시켰다.
 또 “동경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자리를 드니 다리가 넷이더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하는 구절은 또 무엇인가.(<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
 이밖에 <삼국유사> ‘무왕조·서동요’에도 나온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 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善化公主 主隱 他密 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원(저녁 夕변에) 乙抱遣去如)
 <삼국유사> ‘김현감조’에도 “흥륜사에서 탑돌이 하던 김현이 한 여자와 눈을 맞춘 후 탑돌이 끝나고 구석진 곳에서 통정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진성여왕(887~897년)은 숙부인 위홍과 사통했다. 위홍이 죽은 후에는 소년 미장부 2~3인을 몰래 끌어들여 음란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요직을 주어 국정까지 맡겼다.
 또, 잇단 발굴에서 출토된 ‘물건’들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미추왕릉과 계림로 30호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등에서 발굴된 토우를 보자. 고고한 선비들이라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를 외치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힐끗 쳐다볼 유물들이다.
 엉덩이를 치켜든 여인, 그리고 과장된 남근을 들이미는 남자…. 그러면서 남성을 돌아보며 희죽 웃는 여인….
 1976년 안압지에서 발굴한 목제남근의 두부에 붙여놓은 돌기는 또 어떻고. 민속학자 이종철은 “감미로운 여심을 자극하는 양물(陽物)”이라고 해석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성행위의 모양을 나타내는 각종 토우는 신라인의 자연주의적인 성의식을 보여준다. 각양각색의 도우들을 보고 있노라면 ‘난잡하다’, ‘부끄럽다’는 의식보다는 해학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화랑세기>는 이같은 신라만의 풍습을 ‘신국의 도’라고 규정했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는가.”(<화랑세기> ‘양도공조’)
 그나저나 궁내청에 보관돼있다는 <화랑세기> 원본은 어떻게 된 것인고? 원본이 진짜로 존재하고 일본이 그것을 공개한다면…. 혹은 지지부진한 문화재 반환협상에 이 원본이 포함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우리 역사는 파천황(破天荒)의 세계가 열릴 터인데…. 문화·체육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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