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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시크'는 80년 전의 신어였다

 ‘시크(chic)하다’는 표현이 있다. 국립국어원이 2004년 펴낸 <신어(新語)> 자료집은 ‘멋있고 세련되다’는 뜻의 신어(新語)라 소개했다. 그러고보니 ‘젠틀하다’ ‘스마트하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시크하다’는 그리 오래 전의 표현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틀렸다. ‘시크하다’는 자그만치 84년 전에 등장한 신어였으니까….
 

“‘쉬-크’라는 신어는 멋쟁이 하이칼라다. 외형만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빈틈없는 근대인이다. 내면이 빈약한 모던보이, 모던걸에 반해 쉬크보이, 쉬크걸은 훌륭한 신사숙녀이다.”(동아일보 1931년 4월13일)
 사실 신어는 단순히 새롭게 생긴 말이나 뜻이 아니다. 당시 신문은 영화배우인 해리 크로스비의 언급을 인용, “신어는 낡은 어휘에서 도망나온 배암(뱀)이며, 거인(사전)의 어깨 위에 앉아 거인보다 멀리 미래를 보는 난쟁이”라 했다.(<동아일보> 1931년 3월9일)  

 예컨대 1960년대 등장한 ‘저자세(低姿勢)’라는 신어를 보자. 1963년 대통령선거에 나선 허정 후보는 “일본에 가서 ‘고멘구다사이(미안합니다)’하는 저자세가 민족정기냐”고 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자세를 공격했다. 신어 ‘저자세’는 ‘한일 저자세 외교 반대 범국민투위’가 결성된 이후 지금까지 폭넓게 쓰이는 단어가 됐다. 부패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부정축재’와 ‘선심공세’도 오래된 단어가 아니라 1960년대에 등장한 씁쓸한 신어들이었다.  

3·15 부정선거 당시 경찰국장·시장·군수로 재직한 자는 자동해임시킨다는 내용을 담은 공무원처리요강(1960년 9월)은 유명한 ‘자동케이스’라는 신어로 거듭났다.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벌이던 여대생이 자신을 밀어붙이던 경찰에게 ‘징그러운 손을 대지마라’고 울부짖었다. 이후 ‘징그러운’은 ‘보기싫은 것’의 대명사로 통용됐다. ‘구악·신악’, ‘왕년에…’, ‘기관원’, ‘하극상’, ‘불도저’, ‘소비는 미덕’, ‘빈익빈 부익부’, ‘바캉스’ 등도 불과 60년전에 만들어진 ‘신어’임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그렇게 볼 때 예전의 신어는 말줄임과 말장난이 난무하는 요즘의 신어와 비교할 때 신랄한 풍자와 생명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을까. 아, 그 때도 요즘과 같은 신어는 있었다. ‘아더메치’가 대표적이다. 아니꼽고 더럽고 메쓰껍고 치사하다는 것의 줄임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