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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신라 때는 개(犬)목걸이도 황금이었다.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966년, 아랍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창세와 역사서(Kitabu'l Badi Wa'd Tarikh)>에서 신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마크디시 뿐이 아니다.
 9~12세기 사이 아랍의 지리학자들은 한결같이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이자, '황금의 나라'로 표현한다.
 "신라의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하다.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의 향기가 풍긴다. 전염병과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이 걸린 사람은 그곳에 가면 곧 완치된다." 

<사진1>5~6세기대 금목걸이. 신라에서는 금이 너무 흔해 개나 원숭이의 목테와 사슬도 황금이었다고 한다.  /국립경주박물관

■"가장 아름다운 신라인들"
 알 카즈위니(Al Qazwini)는 1250년 발간된 <제국유적과 인류소식>에서 신라인의 생활상을 이렇듯 생생하게 전했다. 또 저명한 철학자이자 의학자인 알 라지(854~932)의 언급을 인용했다.
 "신라는 살기 좋고 이점이 많으며, 금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정착해서 떠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알 카즈위니는 "신라주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병도 적다"고 까지 극찬하기에 이른다. 
 가장 잘 알려진 이는 알 이드시리(Al Idrisi ·1099~1166)이다. 그는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Nuzhatu'l Mushtaq fi Ikhtiraqi'l Afaq·일명 로제타의 書)>에서 이렇게 전했다.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금이 너무 흔하다.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신라 사람들의 외모가 장난이 아니며, 한번 신라를 방문하는 이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단다. 뿐인가. 세상에! 집을 비단·금실천으로 단장하고, 식사 때 금그릇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개의 사사슬과 원숭이 목걸이까지 황금이었다니….  

<사진2>신라의 금제귀고리. 금세공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국립경주박물관

■'Shinla'가 아니라 'Silla
 그런데 중세 이슬람 지리학의 태두인 알 이드리시의 표현은 여러모로 신빙성이 있다. 모로코(당시 무왓하딘조) 지중해 연안도시인 사브타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16살 때부터 안다루스(스페인)-프랑스-영국-북아프리카-소아시아-그리스를 주유했다. 그는 시칠리 왕국의 로저 2세왕(1130~1154)의 초청을 받는다. 지리서를 편찬해달라는 것이었다. 편찬위를 구성하고, 지리학자 천문학자 화가 등 세계 각지로 보내 자료를 수집했다. 그가 15년에 걸쳐 엮은 책이 바로 <천애횡단갈망자의 선택>이다. 1154년 사망직전에 이 책을 바친다.
 책에는 1장의 세계지도에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렸다. 그런데 제1지역도 제10부분도에 중국의 동쪽 해상에 '신라(Al-Silla)'로 이름붙인 섬 5개를 배치시켰다. "개의 목걸이도 금으로 했다"는 등의 기술과 함께…. 그런데 정수일 교수(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는 이드리시가 신라를 'Shinla'가 아니라 'Silla'로 표기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원래 비음 ㄱ(N)과 측음 ㄹ(L)이 결합하면 동화작용으로 말미암아 비음은 소실되고 굴림소리 r과 비슷한 이중축음 ㄹㄹ로 바뀐다. 따라서 신라의 외국어 음사는 Shinla가 아니라 Silla가 돼야 한다. 이드리스는 Silla라 하여 한국어 발음의 접변현상까지 헌상하여 정확하게 음사했다."
 중세 아랍학자들 뿐이 아니다. <일본서기> '중애기'를 보자.
 "눈부신 금은채색이 신라에 많다.(眼念之金銀彩色 多在其國 是謂고衾新羅)"
 <일본서기>는 알다시피 서기 8세기대에 찬술된 역사책이다. 그러니까 '신라=황금나라'라는 것은 기록상으로 봐도 8~13세기대에 전세계적으로 공인된 인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는 어떻게 '황금의 나라'라는 찬사를 받았을까.   

<사진3>알 이드리시가 만든 세계지도. 1154년 저술한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에 실려있다.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제공

■금관탄생의 비밀
 "삼한에서는 구슬을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러나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삼국지> '위서·동이전'>)
 <삼국지>는 3세기 중엽의 기록이다. 신라를 비롯한 삼한에서는 금은을 귀금속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의 무덤에서는 금은제품은 출토되지 않는다. 수정과 마노(瑪瑙), 유리 등으로 만든 구슬이 다량 출토된다. 그러니까 신라는 최소한 3세기 중엽까지 '황금을 돌처럼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언제부터 황금을 '돌'이 아닌 '황금'으로 보았을까. 이한상 교수(대전대)의 도움말이다.
 "지금까지의 발굴자료로 보면 4세기 말의 것으로 보이는 황남리 109호묘와 월성로 가-13호 출토품이 가장 오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월성로에서 출토된 금귀고리나 목걸이는 완숙단계의 신라디자인을 뽐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3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 사이, 즉 100년 사이에 신라에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인가. 금을 보배로 사용하게 된 수수께끼가 여기 숨어있다. <삼국지>와 <삼국사기> 등의 기록과 발굴자료를 토대로 이한상 교수의 해석을 들어보자.
 "3세기대까지 진한 12국의 하나였던 신라는 4세기대의 어느 시점부터 주변세력을 복속시킵니다. 이윽고 4세기 후반에 가까워지면서 낙동강 동쪽, 경북 내륙, 동해안 일부지역까지 아우르게 된다. 현지세력을 매개로 한 지배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신라왕족은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금을 소재로 한 각종 위세품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강성해진 신라는 급기야 377년과 382년 두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매개로 전진(前秦·351∼394)에 사신 위두(衛頭)을 파견한다. 당시 사신으로 간 위두와 전진의 왕 부견(符堅)의 대화를 살펴보자.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인용되어 있는 <진서(秦書)>의 기사이다.
 "부견이 '그대가 말하는 해동(新羅)의 일이 예전과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위두는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신라가 이제 강성해졌음을 자신있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위두는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면서 중국이 '5호(胡)16국(國)'으로 분열되고 있음을 꼬집었다. 이렇게 금을 사랑하게 된 신라의 황금문화는 5세기 중엽부터 '금관 및 금동관'의 형태로 꽃을 피우게 된다.

 ■'고구려 금가루를 먹으면 선인(仙人)이 된다'
 그런데 신라금관의 기원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특히 고대 유목민족 사이에서 금으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이 유행했다는 점이 주로 부각됐다.
 예컨대 신라의 독특한 묘제인 적석목곽분을 스키타이 족의 쿠르간(Kurgan)과 연결시키는 연구자들도 있다. 금관을 제작한 시기가 5세기 마립간(麻立干) 시대라는 점을 주목하면서 '신라왕족의 교체설'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공통점보다는 시공의 차이가 너무 큽니다. 스키타이 문화는 기원전 8~7세기에서 기원전 4~3세기 사이에 꽃을 피웠습니다. 기원후 5세기에 만개한 신라의 황금문화와 1200~800년 차이가 납니다."
 이한상 교수는 이 대목에서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이 있다"고 강조한다. <삼국지> '고구려'와 '부여조'이다.
 "공식모임의 의상은 모두 비단과 수가 있는 견직물인데 금은으로 장식한다(其公會 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고구려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以金銀飾帽)"('부여조')

<사진4> 1921년 처음으로 발굴된 금관총 금관. 괕에 위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과 2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을 붙여 세운 전형적인 신라금관이다./국립경주박물관

 신라가 '황금보기를 돌같이' 했던 3세기 중엽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황금을 황금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황금장식은 원래 유목민족들이 좋아했던 풍습이었다. 이런 풍습을 부여와 고구려가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본초학서의 하나인 <신농본초(神農本草)>를 보자. 여기에는 금설(金屑), 즉 금가루를 포함한 11종의 고구려 약재를 소개하고 있다. 금설은 광물성 선약의 일종이다. 불변의 성질을 갖고 있는 금가루와 금물(액)을 직접 복용하는 것. 그래서 인간의 몸을 불변의 성질로 승화시키면 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금가루를 직접 먹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따라서 연금술과 연단술이 매우 중요했다.
 "금설은 유독하여 정련되지 않은 것을 먹으면 죽는다. 그러나 고구려의 금설은 잘 정련되어 먹을 수 있는 진약(珍藥)이다."
 도홍경(陶弘景·456~536)은 <신농본초>에서 "먹을 수 있는 금가루를 만드는 기술은 고구려가 최고였다"고 평가했다.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지안(集安)에서 발굴된 것으로 전해진 금동관식,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관식은 공통의 특징을 갖고 있다. 모두 신라의 특징을 공유했다는 점이다. 지안 출토 금동관식은 신라금관과 비슷하고, 관식과 깃털형 장식은 황남대총 남분의 금동·은제관식과 유사하다. 인동무늬가 간략화한 삽엽문 투조장식은 부산 복천동 10·11호 금동관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한상 교수는 "따라서 신라의 황금문화는 고구려·부여의 것을 계승했다는 것이 가장 현실성있는 추론"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금관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황금문화는 6세기 들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502년 순장(殉葬)이 폐지되고, 불교가 공인되면서(527년) 무덤형태와 장례풍습이 크게 바뀐다.
 왕족 등 지배층을 상징하던 대총(大塚), 즉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 같은 큰 무덤은 자취를 서서히 감추게 된다, 무덤은 가족단위의 돌방무덤(석실분)이 많이 만들어진다. 부장품의 양도 크게 줄어든다. 자연 금관과 금동관, 그리고 금장신구 같은 부장품들도 사라졌다.

 ■'금테 두른' 신라의 호화저택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금이 여전히 훌륭한 장식으로 사랑받았음이 틀림없다. <삼국유사> '진한조'를 보면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신라 전성기(全盛期)에는 35곳(실제는 39곳)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그러면서 김유신의 조상집인 '재매정택(財買井宅)'을 비롯, 왕경에 흩어져 있는 금입택 39곳을 일일이 열거해놓았다. '금입택'이란 신라 통일기 진골귀족들의 호화저택을 뜻한다. 그런데 도대체 '금입택'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설이 없다. 그냥 귀족들의 호화생활을 상징하는 표현이라는 설도 있다.
 또 '김유신의 조상집' 운운한 것을 보면 명문귀족들의 종갓집을 표현한 말일 수도 있다. 문자 그대로 황금이 수시로 들어가는 집, 즉 부정부패를 뜻하는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그 근거로 <화랑세기> '17세 염장공조'롤 꼽는다.
 "공의 집을 '수망택'이라 했다. 금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마치 홍수와 같았다.(謂基金入望如洪水也)"
 '수망택'은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39 금입택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아랍사학자 알 마크디시)는 기록도 무시할 수는 없다. 금으로 도금할 정도의 호화저택이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아랍문헌이나 <일본서기>의 표현처럼 말이다. 이 대목에서 <삼국사기> '애장왕조'를 꼽아보자.
 "806년,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삼국사기> '신라본기·애장왕조')
 얼마나 금과 은이 흔했으면 그릇까지 금은으로 만들어 참다못한 임금이 나서 이를 금했을까. 그랬으니 신라에서는 개목걸이, 원숭이 목테까지 황금이었던 것이다. /문화 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참고자료)
 <문명교류사연구>, 정수일, 사계절, 2002
 <황금의 나라 신라>, 이한상, 김영사, 2004
 <한국사미스터리>, 조유전·이기환, 황금부엉이, 2004
 <금관의 비밀>, 김병모, 푸른역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