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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아무도 눈치못챈 세종의 ‘숨겨진 업적’…‘신의 한수’ 될 줄이야

실물로 보이지 않았던 세종대왕 업적의 편린이 얼마전 서울 도심 공평동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금속활자 ‘갑인자’는 물론, 종합 자동 물시계인 옥루(자격루)와 해시계·별시계 겸용인 일성정시의 등 세종이 심혈을 기울인 국책사업의 결과물이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따지고 보면 세종대왕의 업적이 한둘입니까. 훈민정음 창제와 해시계·물시계·측우기 등 과학기술 장려, 대마도 정벌과 4군6진 개척, 그리고 <농사직설> 편찬 등 손으로 꼽을 수 없죠. 더 있죠. 요즘 주목받고 있는 금속활자(경자자·갑인자)의 개발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그런데 ‘숨겨진 세종대왕의 업적’이 한가지 더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만약 세종의 이 업적이 없었다면 아마 고려·조선의 역사는 송두리째 사라졌을 겁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실록 등을 보관한 서울 춘추관과 경북 성주, 충청 충주 등의 사고가 소실됐다. 그러나 세종이 신설한 2곳(성주·전주) 등 한 곳인 전주사고만이 살아남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 사고가 설치된 경기전 참봉인 오희길과 선비 안의·손홍록 등이 실록 등과 태조 어진 등을 내장산 용굴암·비래암·은적암 등으로 옮겼다. 이들은 이때부터 370여일간 실록 등을 지켜냈다. 사진은 실록·어진의 이안과 숙직 과정을 기록한 <임계기사>이다. 정읍시 제공


■신의 한수가 된 ‘사고(史庫)의 확충’ 
582년 전인 1439년(세종 21) 6월 26일로 되돌아가봅니다. 사헌부가 세종에게 ‘당상관의 선정과 감사의 천거, 관리의 제수, 승정원의 임무, 사고의 확충’ 등 9가지 항목의 건의서를 올립니다.
그런데 세종은 그 중 딱 한가지만 ‘선택’합니다. 바로 역사서를 비롯한 각종 사료 및 중요 서적·문서를 보관하는 사고(史庫)의 확충이었습니다. 사헌부의 상소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의 사적(史籍)을 포함해서 전해지는 역사책이 적습니다. 여러 곳에 보관하지 못했고, 여러 차례 전란을 겪어 잃어버렸습니다. 역사책의 저장에 신경써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당시에 사고는 딱 2곳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서울 춘추관과 충북 충주였는데요. 이중 <태조실록>과 <정종실록>, <태종실록> 등이 보관된 곳은 충주 사고 뿐이었습니다.

안의·손홍록 등이 실록 등 역사자료와 태조 어진을 숨겨놓은 내장산 용굴암(오른쪽). 지금도 용굴암으로 올라가려면 철제 계단을 타야할만큼 첩첩산중이다. 이곳에서 안의·손홍록을 비롯한 무명 선비와 백성들이 실록과 태조 어진을 지켜냈다. 전주역사박물관 제공

문제는 이 충주 사고가 민가와 섞여있었다는 겁니다. 불이라도 나면 끝장이었죠.
사헌부는 역사가 사마천(기원전 145?~기원전 86?)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사고의 확충을 건의합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한 뒤 ‘명산에 간직하고 인쇄본은 서울에 둔다’고 했습니다. 사고를 확충해서 실록과 고려의 사적 및 경서, 제자서, 경제조장서 등을 반드시 각지에 보관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종은 다른 8가지 건의는 물리치고 유독 “사고의 확대 설치 건만 처리한 뒤에 과인에게 보고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이에따라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 등 2곳에 새롭게 사고가 설치됩니다. 
이러한 세종의 ‘선택’이 정확히 153년 뒤 ‘신의 한 수’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 외에 또 있습니다. 사고 신설 지역 중 전주에는 창업주인 태조 이성계(1392~1398)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경기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종은 1442년(세종 24) 경기전을 지키는 상주 관리(진전관·眞殿官) 2명을 배치합니다. 말하자면 능참봉(陵參奉)과 비슷한 전참봉(殿參奉)을 둔 건데요. 
이 또한 세종의 선견지명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전북 태인의 이름없는 선비인 안의·손홍록이 실록 등 역사자료를 내장산으로 이안하는 과정을 그린 그림. 안의·손홍록 등은 가산까지 털어 운송 비용을 마련했고, 가동 30여명을 동원했다. 그렇게 실록 830책, <고려사> 등 기타 전적 538책 분량을 무사히 이안했다.전주역사박물관 소장


■경기전 비상대책회의
그 자초지종을 풀어봅시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은 파죽지세로 전국을 유린하기 시작합니다.
전주 경기전에도 비상이 걸립니다. 경기전 참봉 오희길(1556~1623)은 전라감사 이광(1541~1607), 전주부윤 권수 등과 함께 태조의 어진과 실록 등 역사자료의 피란 대책을 논의합니다. 
처음엔 마루 밑을 파고 실록 등을 묻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경상도에서 사로잡은 왜적에게서 성주 사고에서 약탈한 실록 두 장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오희길은 다른 계책을 내놓습니다.
“다른 곳에 보관된 실록이 화를 입은게 분명하니 깊은 산 속으로 옮겨야 합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실록을 지키는 것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설왕설래 끝에 실록을 숨길 피란처로 ‘내장산’이 낙점됩니다. 

안의 손홍록 선생의 숙직과정과 사적이 담긴 <임계기사>. 1592년 6월22일~ 1593년 7월9일까지 1년 18일간 하루도 빠지지않고 숙직을 하면서 내장산에 숨긴 실록과 어진을 지켜낸 기록이다. 두 사람이 숙직한 날은 227일(안의)과 196일(손홍록)이었다.정읍시 제공


■손들고 나선 무명의 선비들 
전황은 급박해졌습니다. 6월 왜군이 금산까지 당도하자 전주는 풍전등화의 신세에 놓였습니다. 태조 어진과 실록 등을 책임지고 피란시킬 적임자가 필요했습니다.
이때 전북 태인의 선비인 안의(1529~1596))와 손홍록(1537~1610)이 손을 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는 64살(안의)과 56살(손홍록)이었습니다. 당대의 기준으로는 노구를 이끌고 나선거죠.
6월 하순부터 본격적인 실록 및 어진의 ‘이안’ 작업에 나섭니다. 경기전에서 쓰인 각종 제기(祭器)와 <고려사>, 실록 등의 관리일지인 <형지안> 등까지 50여 바리에 달했답니다. 책수로 따지면 실록 830책, <고려사> 등 기타 전적이 538책 분량이었습니다. 7월 초에는 태조의 어진을 정성스럽게 옮깁니다. 가동 30여 명을 인솔하고 전주로 달려온 안의·손홍록은 실록과 어진의 이안(移安)을 위해 사재를 털었습니다.
실록과 어진은 처음에는 내장산 용굴암, 은적암, 비래암 등으로 안전한 곳을 찾아 계속 옮겼습니다. 은적암과 비래암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파악되지 않고 있답니다. 용굴암은 지금도 철제계단을 타고 가파른 벽을 올라야만 닿을 수 있는 천험(天險)의 장소입니다.

안의와 손홍록 두 선비는 선조가 별제(6품) 벼슬을 제수했지만 “벼슬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 고사했다. 대신 두 선비는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다 굶어죽게 생겼다”면서 나라를 위한 6가지 중흥책을 제안한 뒤 표표히 사라진다.

이제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안의·손홍록 두사람은 1592년 6월22일부터 1593년 7월9일까지 1년 18일간 하루도 빠지지않고 숙직을 하면서 내장산에 숨긴 실록과 어진을 지켜냅니다.
실록·어진의 이안과 숙직 과정을 기록한 <임계기사>를 보죠. 안의와 손홍록 두 사람이 숙직한 날은 227일(안의)과 196일(손홍록)이었습니다. 숙직 첫날인 6월23일 일기를 볼까요.
‘용굴암에서 (실록과 어진을) 지키기 시작했다.(在龍窟庵因留始直) 참봉 오희길과 유인은 모두 내려갔다. 안의·손홍록이 함께 숙직했다.(同直安孫)’ 
두 사람이 교대로 보초를 서는 동안 오희길과 유인, 구정려, 이도길, 좌랑 신흠 등이 찾아와 숙직을 도왔습니다. 또 무사 김홍무, 내장산 영은사 주지인 승려 희묵, 그리고 근처 마을에서 사당패 100여 명이 밤낮으로 암자를 떠나지 않고 지켜냈답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주 경기전 내에 설치된 전주사고. 1439년(세종 21) “단 2곳(춘추관·충주) 뿐인 사고에 불이라도 나면 큰 일”이라는 사헌부의 건의에 따라 세종은 성주와 전주 등 2곳에 사고를 더 만들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신의 한수’가 됐다.


■“벼슬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이들의 ‘어진 및 실록’ 수호는 내장산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1593년(선조 26) 6월 내장산의 소식을 들은 선조가 “행재소(전란중 임금이 임시로 머물렀던 곳)로 어진 및 실록 등을 옮겨 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이때 손홍록·안의와 수복 한춘 등은 태조 어진과 실록을 모시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옮기는 비용을 누가 대줬을까요. 아닙니다. 바로 두 사람이 사재를 털어 어진과 실록을 옮길 말과 식량을 마련했답니다. 
선조는 두 사람에게 별제(장부를 관리하던 정·종 6품의 직책)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벼슬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라고 고사하면서 대신 ‘나라를 위한 6가지 중흥책’을 선조에게 올립니다.
요컨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조선 8도 중 전라도를 제외한 나머지 7개 도의 백성들이 굶어죽거나 떠돌고 있다, 이제 모든 전쟁물자 비용을 전라도에서 조달하고 있다, 이제 전라도 백성들도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지경이다, 뭐 이런 내용입니다. 무능한 임금 때문에 그나마 형편이 나은 전라도 백성까지도 ‘탈탈 털리게 됐다’고 입바른 소리를 한 겁니다. 두 분은 상소문을 올린 뒤 표표히 사라집니다.

임진왜란 때 춘추관·충주·성주사고가 모두 불에 탔지만 오희길·안의·손홍록 등이 지켜낸 전주사고만이 살아남았다.


■지켜낸 실록의 그 후 
그 분들이 수호한 실록과 어진은 어찌 되었을까요. 강화도~평안도 안주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갑니다. 이때가 1597년 9월이었으니 실록 등과 어진은 5년간 전란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다닌거죠. 노구를 이끌고 어진과 실록을 지킨 안의는 결국 병을 얻어 67살의 나이에 숨졌습니다.(1596년) 
그나마 상대적으로 젊은 손홍록이 무사 김홍무, 수복 한춘·박야금·김순복 등과 함께 실록과 어진의 이안 임무를 끝까지 완수했습니다. 이렇게 지켜낸 전주사고 실록은 임진왜란·정유재란 후 평안도 영변부의 객사를 거쳐 강화도(1603년)로 옮겨집니다.
조정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을 바탕으로 다시 각 왕대의 실록을 출판하기 시작합니다.
1606년 새롭게 인쇄된 3부와 교정 인쇄본 1부, 그리고 이 4부의 저본이 된 전주본 등 5부의 실록이 마련됩니다. 이 5부의 실록은 서울의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훗날 강화 정족산으로 이안), 경북 봉화의 태백산, 평북 영변의 묘향산(훗날 무주 적상산으로 이안), 강원 평창의 오대산 사고에 보관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살아남은 전주본은 마니산에 보관됐다가 강화 전등사 인근인 정족산 사고로 옮겼습니다.
이후에도 조선왕조실록의 팔자는 기구했습니다. 춘추관 사고본은 1624년 이괄(1587~1624)의 난 때 소실되었구요. 묘향산 사고본은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갔다가 한국전쟁 전후로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그러다 북한군이 실어간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습니다. 지금 평양 인민대학습당에 소장돼 있답니다.
오대산 사고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때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그 중 화를 면한 일부가 2006년 환수되었구요..

임진왜란 후 조정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을 바탕으로 각 왕대의 실록을 출판한다. 새롭게 인쇄된 4부와 이 4부의 저본이 된 전주본 등 5부의 실록을 서울 춘추관과 경북 봉화 태백산, 평북 영변의 묘향산(무주 적상산 이안), 강원 평창의 오대산 사고에 보관했다. 전주본은 강화 마니산에 보관했다가 전등사 인근의 정족산으로 옮겼다.


■세종이 없었다면…
어떻습니까. 돌이켜 보면 모골이 송연하죠. 세종대왕의 숨겨진 업적 중 첫번째는 전주와 성주 등에 사고(史庫)를 확충한 거죠. 임진왜란 와중에 다른 3곳의 실록은 모두 불탔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은 화를 모면했습니다. 이 어찌 세종대왕의 음덕이 아니겠습니까. 천고에 빛날 세종의 업적이죠.
그러나 저는 하나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조선의 역사는 물론 고려의 역사까지 지켜낸 민초들의 공을 가릴 수 없다는 거죠. 따져봅시다. 
4대 사고(史庫) 중 임진왜란 직전까지 남아있던 춘추관과 성주사고, 충주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됩니다. 실록 등을 모두 피란한 전주사고마저도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소실됩니다. 
만약 임란 초기에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요.
태조 이성계부터(1392년) 명종 때까지(1567년)의 175년의 조선역사는 공백으로 남았을 겁니다. 그뿐인가요. 조선의 건국 상황은 물론 만고의 성군인 세종의 치세도 그저 전설로 남았겠죠. 
더 있습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같은 고려의 역사마저도 사라졌을 겁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연월일별로 빠짐없이 기록한 <세종실록>과 고려의 역사를 담은 <고려사>. 만약 전주 사고를 확충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안의 손홍록 같은 이들이 이 실록 등을 지키지 않았다면 세종의 업적은 전설로만 남았을 것이다. 역시 <고려사> <고려사절요>와 같은 고려의 역사서도 통째로 사라졌을 것이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나선 백성들이 없었다면…
세종의 숨겨진 업적이 ‘사고의 확충’이라면 그러한 세종의 업적과,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살려놓은 이들은 바로 세종대왕이 그토록 ‘불쌍히 여긴’ 백성들입니다. 조선 후기 학자인 황윤석(1729~1791)은 ‘오희길전’을 쓰면서 실록과 어진을 지킨 이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기록했습니다. 
물론 전라감사와 전주부윤, 전라도사, 삼례찰방 등의 관리들도 한몫했구요. 여기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실록과 어진을 온몸으로 지켜낸 이들은 있죠. 
바로 포의의 선비인 안의와 손홍록, 무사 김홍무와 수복(경기전 심부름꾼) 한춘·박야금·김순복, 승려 희묵, 전참봉(殿參奉·9품) 오희길과 유인, 구정려, 그리고 100여 명의 사당패입니다. 이들이 바로 전쟁이 나자마자 줄행랑친 못난 임금을 위해 충성하고 조선의 역사를 지킨 이들입니다. 
이름없는 선비와 하급관리, 혹은 지방 관아의 청소일꾼과, 지방무대를 전전한 무명연예인인 사당패 같은 일반백성과 천민들이었습니다. 제가 그들의 이름을 빼놓지 않고 기록하는 이유입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