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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양봉음위에 얽힌 사연

 “한가지 마음이면 백(100) 임금도 섬길 수 있지만, 100가지 마음이면 한(1) 임금도 섬길 수 없다”는 옛 말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한결같은 충심을 발휘하기 쉬운가.
 그러니 구밀복검(口蜜腹劍)·표리부동(表裏不同)·소리장도(笑裏藏刀)·양봉음위(陽奉陰違)와 같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의 숱한 고사성어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변함없는 충심을 발휘한다 해도 한번 삐끗하면 하루아침에 멸문의 화를 당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한비자가 “용(군주)을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지만, 역린(逆鱗·목줄기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면 죽임을 당한다”(<사기> ‘노자한비열전’)고 했을까.
 한비자는 춘추시대 위 영공의 총애를 받던 미자하의 예를 든다.
 어느 날 미자하의 모친이 병이 나자 위자하는 멋대로 군주의 마차를 타고 갔다. 위나라 법에 군주의 마차를 훔쳐 타는 자는 월형(월刑·발뒤꿈치를 자르는 병)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나 위나라 군주(영공)는 ‘미자하의 효성’을 칭찬했다. 또 어느 날 미자하가 “복숭아를 맛있다”며 먹던 복숭아를 위나라 군주에게 건넸다.
 위나라 영공은 “나를 위해 이렇게 단 복숭아를 주다니!”하고 칭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군주의 총애를 잃었다. 어느 날 미자하가 죄를 짓자 위영공은 이렇게 말했다.
 “저 자는 예전에 군주를 사칭해서 내 마차를 탔고, 도 먹다만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자다”라며 미자하를 처벌했다. 미자하의 행위는 다를 바 없었지만 상황에 따라 180도 바뀐 것이다. 

웃는 낯을 띄었다는 죄로 억울한 죽임을 당한 태종의 처남 민무질

조선 태종의 처남이자 세자(양녕대군)의 외삼촌인 민씨 형제는 어떤가. 민씨는 1·2차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을 도운 공신가문이었다. 그러나 민씨 4형제(민무구·무질·무회·무휼)는 자결의 명을 받고 죽는다.
 이유가 어처구니 없었다. 태종이 양녕대군에게 양위의 뜻을 밝히자 민씨 형제들의 ‘얼굴에 기쁜 빛이 보였다(喜形于色)’는 것이다.(1407년) 자신이 물러난 뒤 외척인 민씨가 득세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래서 태종은 ‘양위 쇼’를 벌여 민씨 가문이 걸려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민씨 형제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띄었다’는 억지혐의에 기가 찼다.  
 그들은 “저도 제 얼굴빛을 모르는데 전하가 어찌 아시느냐”고 펄쩍펄쩍 뛰었지만 때는 늦었다.
 이렇게 왕조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어이없고, 끔찍한 일들이 북한 땅에서 벌어지고 있단다. 건성건성 박수를 치고, 졸았다는 이유로 한때의 충신(장성택·현영철)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숙청대상자들에게 붙인 죄목은 ‘겉으로는 충성을 다하는 듯 받들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해를 끼친다’는 뜻의 ‘양봉음위’였단다. 돌이켜보면 조선조 태종도 올가미는 씌었지만 민씨 형제의 죽음 만큼은 막아보겠다고 나름 애쓴 흔적이 있다. “빨리 죽이라”는 신료들의 아우성 속에서 4형제를 다 죽일 때까지 무려 8년 7개월이 걸렸으니 말이다. 북한은 조선왕조보다 못한 것이다.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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