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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연산군은 왜 '한글 아는 여성을 특채하라'는 특명을 내렸을끼

역사는 히스토리,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보는 이기환의 Hi-story시간입니다. 지난 9일이 574돌 한글날이었는데요. 이번 주에는 ‘한글 창제 후 한양 거리에서 벌어진 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글이 창제되고(1446년·세종 28년) 딱 3년이 지난 1449년(세종 3년) 한양 거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해 10월 5일자 <세종실록>을 들춰 봅니다.

1998년 경북 안동 고성 이씨(이응태)의 무덤에서 발견된 한글편지. 부인(원이 엄마)이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한글편지다. 사람들은 이 편지를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 했다.|안동대박물관 제공

■“하정승아! 망령되게 일할거냐”

“하연을 영의정부사로…삼았다. 그러나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정무처리에 착오가 많았다. 어떤 사람이 언문(한글)으로 벽 위에 ‘하 정승(河政丞)아! 또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썼다.”

이 무슨 말입니까. 세종은 18년간이나 영의정부사(정1품·국무총리격)의 자리를 지켰던 황희(1363~1452)가 87살의 나이로 은퇴하자 그 후임에 하연(1376~1453)을 임명했습니다. 사실 하연이라는 분은 그렇게 욕먹을 분이 아닙니다. 의정부에 몸담은 20여년간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않고 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재상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그러나 하연이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에 올랐던 때가 74살의 노구였습니다. 

황희 정승이 87살의 노령에 은퇴했는데, 그 뒤를 이은 분이 또 일흔이 넘은 고령이니 뭔가 불만을 갖고 있던 세력이 있었나 봅니다. 뭐 하연이라는 분이 지나치게 꼬장꼬장하게 일을 처리했고, 고령이다 보니 가끔은 깜빡 깜빡 해서 행정업무에 오류를 일으켰나 봅니다. 꼳 

어떤 이가 그런 신임 영의정부사인 하연을 “또 정사를 망령되게 처리하시겠냐”고 조롱하는 대자보를 붙인 것입니다. 아마도 너무 연로한 인물들에게 잇달아 의정부 수장을 맡기는 세종 임금의 인사 정책을 지적하는 익명 벽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고고학잡지인 ‘앤티퀴티’ 2009년 3월호 표지에 ‘원이 엄마의 편지 사진’과 함께 ‘중세 한국의 무덤과 만시(A medieval Korean tomb and its poetry)’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종로 거리에서 벌어진 집단농성시위

그로부터 36년 뒤인 1485년(성종 16년) 7월17일 종로 거리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즉 ‘종로 시전(시장)을 이전한다는 조정의 방침’에 상인들이 종로거리에서 집단농성을 펼친 겁니다. 상인들은 ‘이권을 챙기는 고관대작과 그 자식들을 탄핵’하면서 “시장 이전 계획을 전면 철회하라”고 외쳤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현직 정승과 판서 등 고관대작의 비위를 고발하는 한글 투서를 던졌습니다. 이 투서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한 (신숙주 아들인) 신정(?~1482)과 영의정 윤필상(1427~1504) 등 고관대작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했습니다.


■세종-최만리 논쟁, 세종은 이성을 잃었다  

이 두 사례는 무엇을 말해줄까요. 바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일어난 두 사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간을 1444년(세종 26년) 2월20일로 돌려봅시다.

그 날은 세종이 전해(1443년) 12월 30일 창제한 훈민정음을 두고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1445)와 그 유명한 ‘한글논쟁’을 벌인 날입니다. 최만리는 이때 “언문(한글)은 사대주의, 즉 중국을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 부끄러운 문자”라면서 “설총(655~?)의 이두는 비속하지만 중국 글자를 빌려 쉽게 문자를 이해하고 학문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나름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합니다. 

<선조국문유서>(보물 제951호).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와중에 평안도 의주로 줄행랑친 선조는 포로가 되어 왜적에 협조하는 백성들에게 한글교서를 내려 “백성들이여! 돌아오라!”고 권했다.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언문, 즉 한글을 그렇게 쉽게 배워서 입신 출세한다면 무엇 때문에 어려운 성리학을 공부하겠느냐”며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술일 뿐”이라고 깎아내렸습니다.

이 말이 빈정이 상한 세종이 그만 이성을 잃고 맙니다. “너희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느냐. 설총의 이두처럼 지금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인데, 너희는 설총은 옳다 하면서 너희의 임금은 그르다는 것이냐”고 마구 꾸짖습니다. 세종은 급기야 “내가 늘그막에 할 일이 없어서 문자를 만들었겠냐”면서 “안되겠다. 너희 죄는 벗기 어렵다”면서 반대파들을 의금부에 가두는 초강수를 둡니다.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열흘이면

세종이 이렇게 짜증섞인 독설로 반대파들을 깔아뭉개고 한글창제를 강행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종이 친히 밝혔듯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세종실록> 1446년 9월29일)에 한글을 창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문자였기에 쉽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예조판서 정인지(1396~1478)가 <훈민정음> 서문에서 밝혔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문자’를 창제한 겁니다. 또 “이로써 백성들은 송사에 휘말릴 때 언문 법조항이나 판결문 등을 자세히 보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게 됐다”고 정인지는 평가했습니다. 

이것이 한글 창제의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럴만 했습니다. 조선에서는 형사사건이 일어날 경우 중국 명나라 형법인 ‘대명률’에 따라 법을 집행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한문으로 쓰여진 법전을, 그것도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조항이 법에 저촉되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10일이면 습득할 수 있는 혁명적인 글자를 창제한 것입니다.

1449년 10월5일 <세종실록>. 하연이 74살의 나이에 영의정으로 임명되자 ‘하정승아! 공사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는 한글벽서가 서울거리에 붙었다. 

■한글의 가치는 ‘소통’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종이 1428년(세종 10년) 경상도 진주에서 김화라는 백성이 아비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라 낯빛이 확 변했습니다.(<세종실록>) 

세종은 즉시 대소신료들을 소집해 “가문의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할 방책을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에 집현전은 조선과 중국의 효자·충신·열녀 각 110명을 선정해서 삽화(그림)를 그리고, 그림 설명과 시(詩)까지 붙인 <삼강행실도>를 제작했습니다(1434년). 하지만 세종은 “문자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에게는 <삼강행실도>를 나눠줘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세종은 “한글 <삼강행실도>를 배포하면 충신·효자·열녀가 쏟아질 것”(<세종실록> 1444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한글을 창제한 두번째 이유입니다. 

이제 알겠죠.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앞서 예를 들은 대자보 사건에서 보듯 첫번째도 백성, 두번째도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한글)의 핵심 가치는 백성과의 ‘소통’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조선의 백성들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겁니다.

정조(재위 1776~1800)가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한글은 일반백성 뿐 아니라 임금에게도 좋은 소통의 도구였다.|국립한글박물관 소장

■폭군 연산군도 한글은 먹지못했다

그런데 폭군인 연산군 시대에 한글은 고비를 맞습니다. “임금이 신하를 파리 죽이듯 죽이고 있으니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한글 익명서가 의녀들 사이에서 돌았습니다. 연산군이 누구입니까. 이 한글 익명서를 접하고는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결국 연산군은 “언문(한글)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한다”(1504년 7월19·20일)는 명을 내립니다. 이걸 연산군의 한글말살정책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 한글말살정책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연산군은 한글 번역 책은 없애지 않았고, “역서(曆書·책력)와 새로 창작한 악장을 한글로 번역하라”는 지시까지 내립니다. 심지어 1506년(연산군 12년) 5월 29일에는 “신분귀천을 막론하고 한글을 아는 여자를 선발하라”는 명까지 내립니다. 가부장적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던 조선시대, 그것도 연산군 시대에 한글을 아는 여성들을 관리로 선발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연산군은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 익명서에 발끈해서 ‘사용 금지’라는 철퇴를 내렸지만, 임금의 뜻을 백성들에게 쉽고 빠르게 알리는 데 한글보다 더 좋은 소통로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1818년(순조 18년) 서울 본가에 있었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대구 감영에 있었던 아내 예안 이씨에게 보낸 편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진왜란으로 초조해진 선조의 선택

다급했던 전란의 시기에 한글은 임금과 백성의 신뢰를 이어주는 실낱같은 끈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년) 민심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임금은 의주로 줄행랑치고 명망대신들조차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백성들이 그런 임금과 조정을 믿고 따를 수 있었겠습니까. 백성들 가운데는 적의 포로가 되고, 심지어 스스로 첩자가 되어 길잡이를 자처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초조해진 선조가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한글 담화문 발표(1593년 9월)였습니다. 선조는 한글담화문에서 “왜놈을 데리고 나오거나…붙잡힌 조선 백성을 많이 구해오면 평민이든 천민이든 가리지 않고 벼슬도 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실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몰래 들어가 적 수십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 100여명을 구해 나왔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임금과 백성이 소통할 수 있었던 도구가 바로 한글이었던 겁니다. 

<훈민정음>의 창제이유를 밝힌 훈민정음 서문.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서 서로 통하지 않음으로써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다’는 유명한 내용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심금을 울린 조선판 ‘사랑과 영혼’ 한글편지

그 뿐인가요. 1998년 경북 안동 고성 이씨(이응태)의 무덤에서 발견된 한글편지가 심금을 울립니다. 

“원이 아버지. 당신은 늘 ‘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셨나요…당신을 향한 마음은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이내 마음 속은 어디에 두고…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요. 당신은 내 마음처럼 서럽지는 않을 겁니다. 꿈속에서라도 이 편지를 보고 나타나 주세요.”

사람들은 원이 엄마가 죽은 남편에게 보낸 이 편지를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 했습니다.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이렇듯 임금과 백성을 이어준 소통의 가교이기도 했고, 애틋한 사랑을 숨김없이 쉽게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