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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올빼미'가 균형 감각의 상징이다?

 올빼미란 새가 있다.

   너무 귀해서 천연기념물(제324-1호)로 대접받고 있는 야행성 맹금류다.
 그렇지만 고금을 통틀어 올빼미는 ‘불인(不仁)과 악인(惡人)’의 상징으로 치부돼왔다. 예로부터 어미를 잡아먹는 흉악한 새로 악명을 떨쳤다. 그 연원은 3000년 전으로 올라간다. 기원전 1043년 무렵, 주나라 창업공신인 주공(周公)은 어린 조카인 성왕을 도와 섭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공의 형제들인 관숙과 채숙이 가만있지 않았다. 주공의 독주를 질시한 것이다. 그들은 “삼촌(주공)이 조카(성왕)의 나라를 집어 삼킬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어린 성왕도 유언비어를 믿었다.
 그러자 주공은 성왕에게 왕실의 위기를 경고하는 시를 전했다.
 “올빼미야! 올빼미야! 이미 내 자식을 잡아먹었으니 내 집까지 헐지마라.(치梟치梟 旣取我子 無毁我室)”(<시경> ‘반풍·치효’)  
 이후 올빼미는 아비를 잡아먹는다는 맹수(경)과 함께 ‘효경’이라는 고사로 ‘아비 어미를 잡아먹는 아주 불경스런’ 동물로 즐겨 인용됐다.(<한서> ‘교사지상·주’)  

예로부터 올빼미는 어미 잡아먹는 아주 나쁜 새로 인식돼왔다. 야밤에 아이울음 같은 소리를 내서 그런지 흉조 중 흉조로 인식됐던 것 같다. 

 

 ■올빼미 혐오증
 올빼미 혐오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나라 조정은 해마다 5월5일이 되면 ‘올빼미국(梟羹)’을 끓여 백관(百官)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악조(惡鳥)인 올빼미를 먹어서라도 깡그리 없애야 한다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고금사문류취전집> 권9) 오죽했으면 올빼미와 비슷한 ‘수리부엉이(복鳥)’까지도 재수없는 새로 인식됐을까.
 예를 들어 한나라 문제 때 문인인 가의는 모함을 받고 장사왕 태부로 좌천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집에 올빼미 한마리가 날아오는 게 아닌가. 가의(賈誼·기원전 200~168)는 그 모습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가뜩이나 장사 지방에 습도가 높아 수명이 길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려했던 터였다. 그런 마당에 ‘죽음의 상징’인 올빼미가 자신이 앉았던 의자로 날아온 것이다. 죽음을 직감한 가의는 ‘복조부(복鳥賦)’를 지었다.
 “복조(올빼미의 한 종류)가 내 집에 모였다. 들새가 왔으니 주인이 장차 떠나려 하는구나.(복集余舍 野鳥入室 主人將去)”
 과연 가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사기> ‘가생열전’)
 또 토란을 일컫는 별명으로 ‘준치(준치)’가 있다. 그 모양이 마치 올빼미가 웅크리고 앉은 것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신라 문장가 최치원은 중앙의 감시를 받을 수 없는 먼 변방에서 몰래 부를 축적하는 무리들을 두고 마치 웅크리고 앉은 올빼미처럼 치부한다고 해서 준치라는 비유를 쓰기도 했다.(<계원필경>)  

 

 ■황소·견훤·허균의 공통점은 ‘올빼미’

 올빼미는 나라의 망조를 알릴 때 인용됐다. 예컨대 고려의 망국이 눈앞에 있던 1389년(공양왕 원년) <고려사절요>를 보면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어 고려의 국운이 중간에 뚝 끊겼다”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왕이 제사를 지닐 때 올빼미가 태실(太室· 종묘에 태조의 신주를 모신 방)에서 우니 천지가 진동했다.”
 곧 고려의 종묘사직이 망한다는 뜻이었다.
 ‘올빼미’는 이처럼 단순한 흉조가 아니었다. 흔히 부모를 해치고 반역을 도모한 강상죄인을 ‘올빼미’라 욕했으니까.
 예컨대 최치원은 881년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으면서 반란을 일으킨 황소를 이렇게 표현했다.
 “너는 독을 품고 올빼미 소리를 거두지 않은 채, 걸핏하면 사람을 물어뜯고 오직 주인에게 대들며 짖어 대는 일만 계속하였다. 그러고는 끝내 임금을 배반하는 몸이 되어….”(<계원필경> 제11권 ‘격서’)
 고려의 창업주 왕건은 견훤에게 같은 표현을 썼다.(928년)
 “족하(견훤)는 임금(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그 불인(不仁)함이 올빼미 보다 심했소.”(<고려사절요>)
 또 광해군은 허균을 역모죄로 능지처참한 뒤 허균을 “성질이 올빼미와 승냥이 같고 행동이 개와 돼지 같았다”고 극언했다.(<광해조일기>)

 

 ■올빼미는 소인배, 봉황은 군자
 올빼미와 반대의 의미를 가진 새는 봉황이었다. 올빼미는 소인배, 봉황은 군자를 의미했다. 예컨대 이미 언급한 한나라의 가의는 난새(鸞鳥·상상의 길조)와 봉황을 선인과 군자로, 치효(치梟·올빼미)를 소인과 악인로 각각 비유했다. 가의는 전국시대 초나라 애국시인인 굴원을 애도하는 글(‘弔屈原文’)을 지었다.
 “난봉이 숨었으며, 치효가 높이 날도다.(鸞鳳伏竄兮 치梟고翔)”
 군자는 쫓겨나고 소인배가 득세한 초나라의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봉황론, 올빼미론’이 가장 뜨겁게 부딪친 사례가 있다. 서계 박세당이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올빼미’라 하고, 백헌 이경석을 ‘봉황’이라 칭했을 때였다. 박세당은 이경석의 신도비문을 찬술하면서 이렇게 쓴다.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恣僞肆誕) 어느 세상에나 이름난 사람이 있는 법(世有聞人)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했네.(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서계 박세당의 고택. 박세당은 송시열을 올빼미라 칭함으로써 엄청난 논쟁에 휩싸인다. 

이 무슨 뜻인가. 송시열은 병자호란 직후 삼전도비문을 쓴 이경석을 비난한 적이 있다.(1668년) ‘오랑캐에 아부해서 한평생 오래 살았다’는 뜻의 ‘수이강(壽而康)’이라고 표현한 것이다.(1668년)
 박세당은 바로 그 송시열의 비난을 두고 ‘군자(봉황·이경석)를 비난하는 소인배(올빼미)의 짓’이라 폄훼한 것이다. 그러니까 박세당은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으로, 송시열을 그런 노성인을 업신여기고 보복하는 ‘불상인(不祥人)’으로 치부한 것이다. 이 사건은 무시무시한 파국으로 끝난다.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파상공세에 박세당의 소론측은 완패를 당했다. 박세당이 사서삼경을 주석한 <사변록>은 사문난적으로 지목됐다. 그의 저작물은 모두 불구덩이에 던져진다. 함부로 ‘올빼미’라는 표현을 쓰면 안되겠다.

   홍용표 통일부장관이 그제 ‘대북 매파냐’ ‘비둘기파냐’는 질문에 ‘올빼미 정도로 생각해달라’고 한 모양이다.
 ‘비둘기나 매’와 같은 극단보다는 균형감각을 갖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고금을 통틀어 온갖 흉악한 이야기를 담아온 ‘올빼미’가 아닌가. 아무리봐도 ‘올빼미와 균형감각’은 맞지않은 비유인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