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래자 思來者

요절한 조선의 마지막 공주가 남긴 친필글씨

“이 전각은 우리 영고(寧考·정조)께서 자궁(慈宮·혜경궁 홍씨)을 효도로 받들고자 세우신 바요, 우리 자궁께서는 우리 자전(慈殿·효의왕후)께 내리셔서 소자(小子·순조)가 효도로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신 전각이다. 우리 영고께서 자경이라고 이름을 내리셨으니 지금에 이르러 더욱 부합하고 드러남이 크도다.”

“나 소자(小子), 지식이 부족하여 자덕(慈德)의 지극히 어지심을 찬양하지 뭇하오며…그러나 정성에 있고 글에 있지 아니하니…오직 있는 그대로 기록할 따름이니라…자교(慈敎·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삼가 기록하노라.”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의 친필 글씨. 덕온공주는 공주라는 신분임에도 궁체를 능숙하게 썼다. 덕온공주는 숨겨진 한글명필이었다.|문화재청 제공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1822~1844)의 친필 한글 글씨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1월 미국에 사는 덕온공주의 후손으로부터 매입한 한글자료 68점을 16일 국립한글박물관에서 강당에서 공개했다. 이번에 돌아온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는 윤씨 집안으로 하가(시집)한 순조의 셋째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와 공주의 아들 윤용구(1853~1939), 손녀 윤백영(1888~1986) 등 조선왕실 후손이 3대에 걸쳐 작성한 한글책과 편지, 서예작품 등이다.

특히 눈에 띄는 자료는 바로 덕온공주가 궁서체로 직접 쓴 ‘자경전기(慈慶殿記)’와 ‘규훈(閨訓)’이다. ‘자경전기’는 1777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1735~1815)를 위해 창경궁 양화당 옆 작은 언덕에 지은 자경전의 유래 등을 밝힌 글이다. 이것은 순조가 어머니 효의왕후(1753~1821)의 명을 받들어 1808년(순조 8년) 한문으로 지었다. 이 글을 순조의 비(부인)인 순원왕후(1789~1857)가 딸인 덕온공주에게 명하여 한문 원문에 토를 달아 한글로 쓴 뒤 이어서 우리말 번역문을 적게 했다. 

덕온공주가 쓴 ‘규훈’ 중 일부. ‘규훈(閨訓)’은 여성이 지켜야 할 덕목에 관한 책이다. |문화재청 제공

예컨대 ‘是殿也(시단야) 我寧考之所孝奉慈宮而建者(아녕고지소효봉자궁이건자)’라는 한문 원문의 경우 ‘시뎐야 난 아녕고지소효봉자궁이건쟈 ㅣ오’처럼 토를 달아 쓴 다음에 ‘이 뎐(전)은 우리 녕고겨오셔(영고께오서) 자궁을 효도로이 밧드로샤 세우신 배오(자궁을 효도로 받들고자 세우신 바요)’라는 한글번역문을 이어 썼다.

 ‘자경’이란 자전(慈殿·임금의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잘 모시려고 자경궁을 조성했다. 정조의 효심을 이어주기 위해 정조의 부인인 효의왕후는 아들 순조에게 자경전의 유래 등을 밝힌 ‘자경전기’를 짓게 했고, 다시 순조의 부인인 순원왕후는 딸인 덕온공주에게 한글로 번역해서 궁체로 직접 쓰도록 했다.    

이번에 확보한 덕온공주 집안 한글자료들. 덕온공주와 양자 윤용구, 손녀 윤백영 등 3대의 한글자료 68점이 포함됐다.|문화재청 제공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 2팀장은 “혜경궁 홍씨-정조-순조-순원왕후를 거쳐 덕온공주까지 내려온 자경전과 자경전기는 곧 대를 이어 효로 봉양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매입한 자료 중에는 덕온공주가 궁체로 한글 번역한 ‘규훈(閨訓·여성이 지켜야 할 덕목에 관한 책)’ 중 일부도 포함돼있다.

원래 한글 궁체의 명필은 서희순·최혜영·하상궁·서기 이씨와 같이 상궁 신분이 많았다. 이들은 궁체 글씨 쓰기 교육을 받아 왕후가 보내는 편지를 대필했거나 왕실에서 읽었던 소설을 베껴 썼다. 글씨를 잘 썼던 상궁들은 서사상궁(書寫尙宮)이라 했다. 

그러나 이번 자료를 통해 덕온공주가 공주의 신분임에도 궁체를 능숙하게 구사한 한글명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구입한 자료 가운데는 순원왕후가 사위 윤의선(1823~1887)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사위 윤의선이 감기와 기침을 심하게 앓아 걱정하고 있고, 덕온공주가 궁에 들어와 있어 그나마 든든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덕온공주의 어머니인 순원왕후가 사위(덕온공주의 남편) 윤의선에게 보낸 편지. 순원왕후의 글씨가 덕온공주와 흡사하다. |문화재청 제공

이종덕 박사(전 정신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는 “덕온공주는 역시 글씨를 잘 썼던 어머니 순원왕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면서 “모녀간 필치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전했다. 

자료 중에는 덕온공주의 양자인 윤용구의 작품도 있다. 고종의 명을 받아 중국 상고~명나라 말까지의 역사를 추려 한글로 번역한 <정사기람>(1909년)과 중국 역사에서 모범적인 여인 30명의 행적을 한문으로 적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여사초략>(1899년)이 그것이다. <여사초략>은 당시 12살 짜리 딸인 윤백영을 위해 여성과 관련된 역사를 발췌한 책이다. 

자료 가운데는 윤백영(덕온공주의 손녀)이 쓴 <환소군전>(1934년)도 포함됐다. 윤백영은 한글 궁체로는 처음으로 조선미술전람회(1929·1931년)에 입선한 명필이다. 

이종덕 박사는 “덕온공주와 윤용구, 윤백영 등 3대의 글씨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자료”라면서 “왕실 부마 집안의 일괄 자료라는 점에서 자료마다 역사성을 지닌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

16살 때인 1837년(헌종 3년) 판관을 지낸 운치승의 아들 윤의선에게 하가한 덕온공주는 결혼 7년만인 1844년(헌종 10년) 5월24일 23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날은 헌종의 계비를 간택하는 날이었는데,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덕온공주는 창경궁 통명전에 들었다가 점심으로 먹은 비빔밥이 급체했다. 덕온공주는 사망 직전에 아이를 낳았지만 곧바로 사망했고, 공주 역시 곧바로 숨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