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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웅진 백제시대 추정 '대궐의 문' 공주 공산성에서 확인

웅진시대(475~538년)의 왕궁성으로 조성된 공주 공산성 내부에서 백제임금이 드나들었을 법한 문궐(門闕·대궐의 문)을 방불케하는 출입문 시설의 흔적이 확인됐다. 

한성시대 왕궁성인 풍납토성에 비견되는 토목공사의 흔적이 나타남에 따라 웅진시대 왕궁터가 공산성 내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에 더욱 무게를 둘 수 있게 됐다.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의 하나로 공산성(사적 제12호)을 조사중인 공주대박물관은 “쌍수정 일대의 추정 왕궁지를 출입하는 길과 왕궁지 관련 시설을 만들려고 국가차원에서 진행한 대규모 토목공사의 흔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웅진시대 왕궁성으로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공주 공산성 내부에서 출입문 시설의 흔적이 확인됐다. |공주대박물관 제공

공산성이 자리잡고 있는 공산은 북서-남동으로 길게 형성된 산지로 해발 110m 정도의 한봉우리 두 개가 솟아있는 지형이다. 그 가운데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적은 서쪽 산봉우리 정상인 쌍수정 앞 광장에 자리잡고 있다. 쌍수정은 조선후기 관찰사인 이수항(1685~?)이 건립한 누정이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피란한 인조가 난의 평정 소식을 듣고 이곳 두 그루의 나무에 ‘대부작(大夫爵)’을 내리면서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고 일컬은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번 발굴조사는 쌍수정 일대의 ‘백제 왕궁터’와 이곳으로 출입하기 위해 1932년 관광도로를 만든 구간에서 이뤄졌다. 조사결과 왕궁터 출입시설은 동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형에 길이 50m, 너비 36m, 깊이 3.5m의 대규모 성토다짐을 한 형태로 조성됐다. 흙을 경사지게 쌓은 후 다시 수평으로 쌓는 방법을 반복해 매우 안정적인 지반을 만들었다. 성토대지의 경사면에는 강돌과 깬돌을 깔아서 성토구조가 유실되는 것을 방지했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성토다짐이나 외벽 보호시설과 같은 토목구조는 백제 시대 한성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년)의 왕성인 풍납토성에서 확인된다.|공주대박물관 제공 

이것은 현재 연약지반 성토층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건축부재인 필터매트와 같은 기능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같은 대규모 성토다짐이나 외벽 보호시설과 같은 토목구조는 백제 시대 한성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년) 왕성인 풍납토성에서 확인된다.공산성 내부에서는 1980년대 이후 다양한 건물터와 연못 등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왕궁터가 성 바깥쪽에 존재했다는 주장 등 다양한 이견이 나옴에 따라 ‘추정 왕궁터’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웅진시대 백제의 왕궁성인 공산성의 전경. 정작 왕궁터가 성안이냐 성밖이냐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공주대박물관 제공 

하지만 백제왕도 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의 이해문 학예연구관은 “공산성 안쪽에서 풍납토성의 축조를 방불케하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뤄졌다는 것은 ‘성안 왕궁터’의 존재를 추정해볼 수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이런 출입시설을 보고 ‘문궐’(대궐의 문)을 방불케한다는 의견을 낸 전문가도 있다”면서 “임금이 드나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설로 보인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