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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임금 아닌 임금'-덕종 스토리

  최근 오랜만에 낭보가 들렸다.
 문화재청이 미국 시애틀박물관이 소장중이던 ‘덕종어보’를 기증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덕종어보는 종묘 영녕전 덕종실에 있다가 1943년 이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해외로 유출됐다.
 그러다 1962년 문화재 애호가인 토마스 스팀슨이 구매해서 시애틀박물관에 기증한 바 있다. 그런 덕종어보가 53년 만에 귀향한 셈이다. 이번 기증식에는 고인이 된 토마스 스팀슨의 외손자인 프랭크 베일리가 참석했단다.
 그런데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덕종은 과연 누구인가.

추존왕인 덕종과 그의 부인 소혜왕후의 능인 경릉. 덕종은 성종의 친아버지이며, 20살에 요절했다. 성종은 아버지를 추존왕으로 모셨다.

 ■최초의 추존왕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를 배운 사람들이라면 줄기차게 외었을 ‘태정태세 문단세’가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등 27명의 조선 임금을 꼽아보라. ‘덕종’의 이름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덕종은 이른바 ‘추존왕(追尊王)’이었으니까…. 추존왕은 본래는 왕이 아닌 사람인데, 사후에 그 사람을 높여 부른 특별 호칭이다. ‘추숭왕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실제 왕위에 올라 백성을 다스린 임금은 아니라 죽은 뒤에 임금이라고 부른 이른바 ’임금 대우’ 국왕인 셈이다. 추존왕은 1800년 전 신라에도 있었다.
 <삼국사기> ‘첨해 이사금조’를 보면 첨해왕(247~261)은 자신의 친아버지인 골정을  일종의 추존왕인 갈문왕으로 추승했다. 태종무열왕(재위 654~661)도 자신의 친아버지인 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친어머니인 지도부인 박씨를 문정태후로 추존했다. 고려 현종(재위 1009~1031)도 친아버지를 안종으로 추증했다.

 

 ■왕이 아닌 왕
 조선의 추존왕은 덕종을 비롯해 9명이나 된다. 그러나 그 중 4명은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고조(목조·이안사), 증조(익조·이행리), 조부(도조·이춘), 부(환조·이자춘) 등이다. 비단 이성계 뿐 아니라 중국의 왕조 창업주들은 자신의 선조들을 앞다퉈 추존했다. 예컨대 후한의 광무제와 송태조 역시 4대조를 추존했으니까….
 새 왕조를 세운 창업주가 왕권을 강화하겠다고 추존한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덕종과 원종, 진종, 장조, 익종 등 남은 4명의 추존왕은 어떨까. 이 가운데 원종은 반정으로 임금이 된 인조의 친아버지인 정원군이다. 즉 선조에게는 적자인 영창대군 외에는 광해군을 포함, 서자만 13명 있었다. 정원군은 선조의 서(庶) 5남이었고, 인조는 그런 정원군의 장남이었다. 달리 말하면 인조는 선조의 서손(庶孫)이었다. 1623년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친아버지인 정원군을 추존해서 원종의 묘호를 올린 것이다. 그렇다면 진종은 누구인가. 아버지의 미움을 사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장헌세자)는 죽은(1762년) 뒤에도 죄인이었다.
 그랬으므로 어린 세손(정조)도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때 할아버지인 영조는  세손을 일찌감치 죽은(1728년) 큰 아버지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1764년) 어린 세손에게 죄인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벗기고, 즉위의 하자를 없애고자 한 것이다. 그런 효장세자는 정조의 아버지 신분으로 진종의 묘호를 받았다. 그러면서 영조는 세손에게 단단히 다짐을 한다. 

현릉. 문종과 현덕왕비를 모신 능이다.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원래 무덤인 소릉은 세조에 의해 파헤쳐졌다. 현덕왕후의 혼령이 저주를 퍼부어 세조의 아들인 의경세자를 죽였다는 소리에 파헤쳐졌다는 것이다.

“친부(사도세자)는 절대 추존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효자였던 정조는 할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었다.
 그러나 1899년(고종 36년) 사도세자는 사후 137년 만에 장조의 묘호를 받게 된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
 1863년 즉위한 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증손이었다. 고종은 즉위하자 마자 정조의 손자인 익종(추존왕)의 양자로 들어갔다. 정조의 직계임을 강조한 것이다.  고종은 그러면서 ‘정조의 뜻을 살려’ 장헌세자(사도세자)에게 장종이라는 묘호를 내렸다. 고종은  결국 장종(사도세자)-정조-순조-익종의 정통을 밟았음을 천명한 것이다. 장종은 1899년 고종이 황제국으로 선포한 이후 황제로 추존돼 장조가 됐다.
 또 한 사람의 추존왕인 익종은 순조의 아들(효명세자)이다. 효명세자는 22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러자 효명세자의 아들이 즉위했는데 그 사람이 헌종이다. 헌종 죽위 후 수렴청정을 한 순원왕후(순조비)는 곧바로 임금의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추존해서 익종의 묘호를 올렸다.

                            <조선시대 추존왕> 

임금

선왕

친아버지

추존왕의 묘호

성종

예종(작은 아버지)

의경세자

덕종

인조

선조(할아버지)

정원군

원종

정조

영조(할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종(고종이 4대조인 정조의 친아버지 장헌세자를 추존)

정조는 세자 시절 효장세자에 입양됨

진종(정조가 효장세자를 추존)

헌종

순조(할아버지)

효명세자

익종

 ■20살 요절한 덕종의 씨앗
 그렇다면 오늘의 주인공인 덕종(1438~1457)은 누구인가.
 사실 덕종은 불과 스무해를 살다 요절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씨앗은 엄청났다.
 우선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성종을 낳았고, 지금까지 사극의 주인공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여걸(인수대비 혹은 소혜왕후)의 남편이었다.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은 그의 친손자였다. 그러고보니 조선 전기의 숱한 역사가 덕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또 있다. 잇단 정변으로 등극한 아버지의 죄 때문인가. 그의 삶과 죽음  또한 숱한 이야깃거리를 남겼으며, 사후에 혹독한 후유증까지 낳았다. 덕종은 1438년 수양대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계유정난(1453년)을 일으키고 단종을 몰아낸 뒤(1455년) 임금자리에 오르자  세자(의경세자)가 됐다. 의경세자는 “체격이 준수하고 숙성했으며 용모 또한 단정하고 고아했다”고 한다.(<삼탄집> ‘의경세자 묘지문’) 오죽했으면 할아버지인 세종이 그의 이름을 현동(賢同)이라 짓고는 “친히 안고 데리고 다니면서 끊임없는 사랑을 쏟았다”고 한다.
 그러나 1457년(세조 3년) 7월 의경세자가 감기에 걸린 뒤 이상하게도 낫지 않고 시름시름 했다.
 아버지(세조)는 임금이 되기 전의 집, 즉 사가에 세자를 보내 치료하도록 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임금 스스로도 거처를 옮겨 의약품을 챙기는 등 친히 병구완을 했다.  세조가 얼마나 세자를 끔찍히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0여 일 뒤 병세에 잠깐 차도를 보이자 세조는 세자를 돌본 측근들에게 후한 상급까지 내렸다. 하지만 세자의 병세는 다시 악화됐다.
 “1457년 9월2일 의경세자의 병세가 심해지니 세조가 울었다. 신숙주가 들어가보니 세자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숨이 끊어졌다.”  
 그토록 믿었던 아들이 죽자 세조는 “길고 짧음은 운명이지만 세자의 아들들이 모두 어리니 얼굴을 그려서 남기라”고 명했다. 세자의 죽음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신하와 백성들의 복이 없는 것”이라 여겼다. 

덕종이 추존왕이 된 뒤 어보가 새겨져 종묘에 봉안됐다. 이 어보가 미국 시애틀 박물관에 있다가 최근 반환됐다.  

 

 ■파헤쳐진 왕후의 무덤
 그런데 당시의 야사를 보면 매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낮잠을 자고 있던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가 나타나 세조를 혼냈다는 것이다.
 “네가 죄없는 내 아들(단종)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음애일기>)
 세조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자 곧바로 의경세자의 죽음 소식이 들렸고, 이에 격분한 세조가 “소릉(현덕왕후릉)을 파헤치라”고 명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무수한 뒷야기들이 나온다.
 “소릉을 파헤치려고 무덤의 석실을 부수고 관을 끌어내렸지만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다. 소릉이 있던 경기 안산의 백성들이 놀라 괴이하게 여겼다. 제사를 지낸 뒤에야 관이 나왔다.”(<음애일기>)
 <음애일기>는 “파헤쳐진 능은 3~4일이나 노천에 방치됐다가 평민의 예로 장사를 지내라는 명에 따라 겨우 물가에 옮겨 묻었다”고 기록했다. 사실 안산에서는 현덕왕후의 능이 파헤쳐지기 전부터 부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내 집을 부수려 하니 난 장차 어디 가서 의탁할꼬.”
 그 소리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한다. 얼마 후 임금의 명을 받은 사신이 능을 파헤쳤다. 며칠 뒤 시신을 옮겨 묻었지만 예전의 능에 있던 나무나 돌을 만지면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지고 비비람이 불어닥쳤다고 한다.
 당시의 여론이 심상치 않았음을 웅변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단종 어머니의 비극
 현덕왕후는 문종의 세번째 부인이었다. 문종은 세자시절 두 번이나 이혼한 이력이 있다.
 첫번째 부인인 휘빈 김씨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 압승술(壓勝術)을 썼다는 단서가 발각됨으로써 폐출됐다. 압승술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술법, 즉 ‘사랑의 묘약’을 쓰는 것을 뜻한다. 휘빈 김씨는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 허리에 차는 방사술’을 썼다가 ‘부덕을 행했다’는 죄목으로 폐출됐다. 두번째 부인인 순빈 봉씨 역시 남편의 사랑을 받지못해 전전긍긍하다가 그만 동성연애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이 그만 시아버지인 세종에게 걸려 역시 폐출되고 말았다.
 문종이 3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이가 바로 현덕왕후 권씨였다. 권씨는 앞서의 두 여인과 달리 덕과 위엄을 겸비해서 시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25살 때인 1441년 단종을 낳은 뒤 불과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난산의 후유증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요절한 현덕왕후는 죽은 뒤에도 수난을 당한다.
 어렵게 낳은 아들이 임금이 된 것이 오히려 불행이었다. 만 11살의 나이로 등극한 단종이 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1455년) 1년 뒤(1456년) 더 큰 사건이 터졌다. 현덕왕후의 아우인 권자신이 성삼문·이개·박팽년 등과 함께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복위를 노리다 실패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권자신은 물론 현덕왕후의 어머니(아기·阿只)까지 처형됐다.
 정사인 <세조실록>을 보면 의경세자의 죽음 직후 현덕왕후의 ‘사후 신변’에 뭔가 이상이 생겼음을 알려주고 있다.
 “1457년(세조 3년) 9월7일 현덕왕후 권씨의 신주와 의물(儀物)을 일찍이 철거했으니 왕후임을 인준한 고명(誥命)과 책보(冊寶·인장), 장신구를 해당관사로 수장하게 하소서.”
 현덕왕후가 폐위되어 왕후로서의 모든 지위가 박탈됐다는 뜻이다. 의경세자가 죽은 뒤 불과 5일 뒤의 일이다. 현덕왕후의 능이 이 때 훼손되었을 수 있다. 물론 <세조실록>을 보면 의경세자(덕종·1457년 9월 2일)는 단종(10월 21일)보다 더 먼저 죽었다. 따라서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 니 아들’하면서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은 팩트가 아닐 지 모른다. 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저주의 내용이 약간 윤색됐을 수도 있고, 야사를 기록할 때 착오가 생겨 시간의 오차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세조가 현덕왕후의 망령에 시달린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시애틀박물관에서 열린 반환식에서 덕종어보를 받고 있다. 

 ■또라이 취급받은 남효온
 현덕왕후는 그렇게 의경세자의 죽음과 함께 능욕을 당했다.
 맨처음 현덕왕후의 복위를 거론한 이는 추강 남효온이었다. 남효온은 불과 18살인 1471년(성종 2년) 과감한 상소문을 올린다. 요컨대 “현덕왕후가 폐위당함에 따라 남편인 문종의 영혼이 홀로 외롭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소릉(현덕왕후의 원래 능이름)의 폐위는 인심에도, 천심에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남효온은 세조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복위의 정당성을 논했다.
 “세조는 예종(의경세자의 동생)에게 ‘나는 어려운 때를 만났지만 너(예종)는 태평한 때를 만났다. 내 행적을 따르지 말고 네 뜻대로 정치를 펼쳐라.’라고 훈계하셨습니다.”
 요컨대 세조는 왕권 확립을 위해 현덕왕후를 폐했지만, 태평성대를 맞은 예종·성종 때는 마땅히 복위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남효온의 상소는 도승지 임사홍, 영의정 정창손 등에 의해 일축됐다.
 당시 사람들은 남효온을 당나라 시대 인물인 손창윤에 견주며 ‘미친 서생’이라 손가락질했다. 손창윤이 누구인가, 당나라 인물인 손창윤은 당시 금지된 아들의 관례를 치른 뒤 이튿날 조정에 와서 “내 아들 관례를 마쳤다”고 자랑했다는 인물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짜증냈다는 것이다.
 남효온도 훗날 이런 시를 지었다.
 ‘북쪽 대궐에 일찍이 글 올리니 (北闕曾上書) 여론이 자못 어지럽게 들끓었네.(物論頗紛방) 공연히 손창윤이란 이름만 얻어(만得孫子號) 도롱이 걸치고 추강에 돌아왔네.(短蓑來秋江)’(<추강집> )
 한마디로 입바른 소리 했다가 손창윤처럼 ‘또라이’ 취급만 당하고 낙향했다는 자조섞인 시를 남긴 것이다.

 

 ■종지부 찍은 악연
 그러나 이후 서슬 퍼런 연산군 시절에도 김일손 등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청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드디어 1512년(중종 6년) 검토관 소세양이 다시 현덕왕후의 복위를 거론하면서 거센 논쟁이 벌어졌다.
 대신들은 두 패로 나뉘어 열띤 토론을 벌였다. 1512년 11월부터 시작된 논쟁은 이듬해 3월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대간들이 하루에 4~5차례나  대궐 밖에 자리를 깔고 앉아 상소하는 이른바 복합(伏閤)을 펼쳤다. 홍문관도 날마다 상소문을 올렸다. 결국 ‘복위 불가론’을 고집하던 영의정 유순정이 죽은 뒤에야 ‘복위 찬성’ 쪽으로 물꼬가 터졌다.
 마침내 결국 현덕왕후를 복위시킨 중종은 1513년 4월 왕후의 무덤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에전에 옮긴 무덤을 깊이 팠지만 관이 보이지 않았다. 일꾼들이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현장 감독관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너희들, 수고하는구나.’
 잠이 깬 감역관이 두어 자 더 땅을 파자 손바닥 넓이만한 관의 칠편(漆片)이 삽날에 찍혀 나왔다.(<용천담적기>)
 의경세자의 죽음과 현덕왕후의 폐위를 둘러싼 악연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친아버지를 향한 숭모
 그렇다면 의경세자는 어떻게 덕종으로 추존됐을까.
 의경세자가 죽자 둘째인 예종이 부왕(세조)의 뒤를 이었다. 하지만 예종(재위 1468년 9월~1469년 11월)의 재위는 너무 짧았다.
 당연히 후계자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1466~1525년)이어야 했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3살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1454~1488)이 다음 순위였지만 병이 많다는 것이 걸림돌로 제기됐다. 결국 왕위는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성종·당시 만 13살)으로 이어졌다.
 성종은 종법상 예종(작은 아버지)의 뒤를 이은 국왕이 되어 예종을 아버지로,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큰아버지(백부)로 모시게 됐다. 그러나 성종으로서는 친아버지를 그냥 둘 수 없었다.
 성종은 1471년(성종 2년)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온문의경왕’으로 추존했다. 그러나  이 때는 종(宗)으로는 일컫지 않았다. 종법상으로는 예종의 아들이었으므로, 친아버지는 백부를 뜻하는 ‘황백고(皇伯考)’라 했다.
 성종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 해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한 성절사 한치의가 성종의 귀를 번뜩 뜨게 하는 말을 전한 것이다.
 “명나라 태감 김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례가 없지만 명나라 황제의 허가를 받으면 전례가 되는 것’이라고…. 명 황제의 재가만 받으시면….”
 이에 고무된 성종은 명나라 황제의 고명을 받으려고 조정의 공론에 부친다. 대신들은 설왕설래했다.      
 결국 신숙주·한명회 등은 임금의 뜻이 워낙 확고하니 어쩔 수 없다고 꼬리를 내린다. 하지만 정인지·정창손 등은 여전히 “아니된다”고 반대한다. 
 “대통을 이어 국왕이 됐으므로 사친(私親)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예(禮)입니다. 명나라에 주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명나라 예조는 조선을 가리켜 ‘예를 모르는 나라’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종은 끝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1475년) 명황제의 고명을 받아온다. 명나라 황제는 의경세자에게  내린 시호는 ‘회간선숙공현온문의경왕(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이었다. 이로써 성종은 친아버지인 의경세자의 묘호를 덕종(德宗)이라 올리고 종묘에 부묘한 것이다.
 그렇다. 이번에 반환된 어보는 바로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종묘에 봉안된 ‘덕종어보’인 것이다.
 무게 4.45㎏의 어보에 담긴 파란만장한 역사를 알면 더더욱 반환된 보물의 가치가 돋보이지 않을까.
 역사란 이렇게 흥미진진한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