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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임금이시여! 백성을 버리시나이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1637년 1월30일은 가장 기억하기 싫은 날로 기록돼있다. 임금(인조)이 오랑캐인 청태종의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이나 무릎을 꿇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용포를 벗고 청의(靑衣)로 갈아입은 뒤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펼쳤다. 신하된 주제에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를 지었으니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며, 항복했으니 백마를 타고 나온 것이다. 청태종은 항복 의식 도중에 고기를 베어 개(犬)에게 던져주었다. 항복한 조선(개)에게 은전(고기)을 베푸는 꼴이었다. 조선의 상징인 임금이 굴욕을 당했던 그 날을 ‘삼전도의 굴욕’이라 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생각이 든다. 못난 임금이 무릎을 꿇은 것이 뭣이 그리 굴욕이란 말인가.  

강화 갑곶진. 병자호란이 한창이던 1637년 1월21~22일(음력) 사이 청나라 군의 침입으로 함락된 오욕의 현장이다.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능욕을 당했다. 갑곶 앞바다에는 스스로 물에 뛰어든 아낙들의 머릿수건이 연못에 떠다니는 낙엽같았다고 한다. |김기남 기자kknphoto@kyunghyang.com

■1637년1월22일의 비극
 항복의식 후 면목이 없어 서대문으로 우회하며 돌아오던 인조의 앞을 가로막은 한 노파가 손뼉을 치며 통곡했다.
 “강화도에서 검찰사 등이 술판을 일삼아 백성들을 다 죽였습니다. 누구의 허물입니까. 네 아들과 남편이 모두 적의 칼날에 죽고 이 한 몸만 남았으니 하늘이여! 하늘이여!”(<연려실기술>)
 그렇다. 한심한 임금, 못난 신하들 때문에 죽어가고 욕을 당했던 불쌍한 백성들…. 바로 그들의 눈물로 피바다를 이룬 ‘강화의 굴욕’이 더 천추에 기록돼야 할 ‘비극의 역사’가 돼야 하지 않을까.
 “적에게 욕을 보지 않으려는 부인들이 (강화 갑곶 앞) 바다에 빠졌다. 천민의 아내와 첩들도 자결했다. (빠져죽은 이들의 흔적인) 머리 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있는 낙엽처럼 바람에 날려 둥둥 떠다녔다.”
 <연려실기술>은 1637년1월22일의 비극을 이렇게 정리했다. ‘삼전도의 굴욕’에 8일 앞선 날이었다. 과연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반정으로 임금 자리에 오른 인조와 노론세력은 명나라 편을 들다가 잇단 호란을 겪는다. 정묘호란(1627년) 때는 강화 연미정에서 ‘형제지교’를 맺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1637년)에는 달랐다. 12월 초 13만 대군으로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팔기군은 순식간에 밀고 들어온다. 인조가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도록 속전속결 작전을 펼친 것이다.
 전황이 심상치않자 인조는 체찰사(전시 총사령관)인 김류의 아들 김경징(당시 한성판윤)을 강화 검찰사(강화 경비사령관)로 임명했다. 최후의 보루인 강화를 수호해달라는 임금의 특명이었다.j 

■“경징아! 경징아!”
 하지만 김경징은 위기에 빠진 조국을 건사할 자세도 능력도 안되는 자였다. 그는 자신의 가솔과 절친한 친구들을 강화섬으로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짐이 50여 바리나 됐다. 그 때문에 주로 왕족이나 사대부 가족인 피란민들이 수십리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세자빈(강빈)조차 김포 월곶 나루에서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굶주리며 기다려야 했다.
 오죽했으면 강빈이 가마 안에서 “경징아 경징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외쳤을까. 어디 그 뿐이랴. 김경징은 독단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자 강화유수 장신은 “난 지휘를 받을 사람이 아니다”라며 명령 받기를 거부했다. 둘의 알력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김경징은 강화섬이 금성탕지(金城湯池·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을 채운 못)니 함부로 적군이 건너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사실 그의 말처럼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라 할 만 하다. 조수의 차가 극심해 물살이 빠른데다 언덕은 절벽이고, 그 밑은 죄다 수렁(뻘)이어서 배가 드나들기가 매우 힘든 지형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따라서 그나마 배를 댈 수 있는 동쪽의 갑곶진만 잘 지킨다면 외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김경징은 지형만 믿고 날마다 술만 퍼마시며 주사를 부렸다. 피란 온 봉림대군이 “술만 마실 때가 아니다”라고 꾸짖자 퉁명스럽게 대꾸했단다. “어찌 피란이나 왔다는 (봉림)대군과 대신들이 나를 지휘하려 드느냐”고…. ‘콩가루’ 나라가 아닌가.

  바다 건너 김포·통진에서 군량미 명목으로 걷은 쌀은 김경징의 친지들에게만 배급됐다. 그런 그에게 첩보가 하나 보고됐다.
 “청나라군이 조강(임진강·한강이 만나 서해로 빠지는 강)에서 가옥을 헐어 배를 만들고 있으며, 곧 강화도로 진입할 것”는 첩보였다. 그러나 김경징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겨울철이라 강에 단단하게 얼어있는데 어떻게 배가 다니겠느냐.”
 호언장담한 김경징은 초병들까지 모두 귀가시켰다. <연려실기술>은 “갑곶에서 연미정까지 몽둥이를 들고 지키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고 한탄했다.

 

 ■여인들의 비극
 그러던 1월21일 밤 8시쯤, 통진 가수(假首·임시수령) 김정이 김경징을 찾았다.
 “적이 낙타에 배를 싣고 갑곶 나루로 향하고 있는데, 밤에 물을 건너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김경징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말 같지도 않구나. 군심(軍心)을 어지럽게 하는구나. 저 놈의 목을 베라.”
 어이없는 참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갑곶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김정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청군은 딱 한 척의 배로 조선군을 떠보려 했다. 조선의 복병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저항없이 갑곶에 닿았으니…. 실은 몇 안되는 조선군이 총을 쏘려 했는데, 어이없게도 화약에 습기가 차서 폭발하지 않았다. 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선군이 보이지 않자 백기로 신호를 보냈다.
 22일 아침이었다. 적선 40여 척이 바다를 뒤덮었다. 갑곶에 상륙한 청군의 칼빛이 번개와 같이 번뜩였다. 청군은 군병을 풀어 크게 노략질하고 관청과 개인집을 모두 불사르며 목을 베 죽이고 얽어매어 온 섬을 도륙했다.
 “세자빈이 자기 목을 찔렀으나 내시들이 겨우 막았다. 눈 위를 기어다니던 갓난 아이가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죽은 어미의 젖을 여전히 빨고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연려실기술>)
 그 때의 참상을 전한 <연려실기술>을 더 보자. 윤선거의 아내는 스스로 목을 맸다. 겨우 9살이었던 아들은 손으로 옷과 이불을 정돈한 뒤 빈소를 정했다. 꼬마는 사방 구석에 돌을 놓고 숯과 재를 덮은 후 통곡하여 하직한 뒤 계집종의 등에 업혀 나왔다. 이돈오의 아내 김씨는 시어머니와 동서 등과 같이 스스로 목을 찔렀다. 김씨가 즉사하고 시어머니와 동서가 피를 흘려 옷에 가득 흐르자 청나라군이 버리고 갔다.
 홍명일의 아내 이씨와 시어머니를 비롯, 여성 3명은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적병이 엄습하자 서로 껴안고 물에 빠졌다. 어떤 선비의 아내는 “청나라군이 죽은 사람을 보면 옷을 모두 벗긴다니 내가 죽으면 서둘러 화장하라”고 신신당부한 뒤 목을 매 죽었다. 이호선의 아내는 토굴 안에 숨어있다가 적병이 불을 질렀는 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 죽고 말았다. 유인립의 아내는 적병이 끌고 가려 했지만 끝까지 버텼다. 
 청군이 총을 난사해 몸의 살이 다 뜯겨나갔지만 꼿꼿하게 선채 넘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사대부 여인네들만 수모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천민의 아내와 첩도 줄줄이 목숨을 끊었다.
 그랬으니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닌 것’이다. <인조실록> 등에는 더욱 기막힌 장면이 나온다. 

 김포 월곶 쪽에서 바라본 갑곶진. 청나라군은 갑곶의 경비가 허술한 것을 간파하고 40여 척의 배로 물을 건넜다. 

 

 ■“임금님 임금님, 우릴 버리시나이까”
 <인조실록>을 보면 기막힌 장면이 나온다.
 “적병이 갑곶진(甲串津)을 건너자 김경징은 늙은 어미를 버리고 배를 타고 달아났다.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였다.”
 강화 함락의 장본인인 김경징은 도망갔지만 부인(박씨)와 며느리, 그리고 다른 일가 여인들도 모두 자진했음을 알 수 있다. <연려실기술>은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가 ‘적병이 가까이 왔으니 죽지 않으면 욕을 볼 것’이라고 다그쳐 자진하도록 했다”고 기록했다. 또 한 사람, 강화 유수 장신의 어머니는 굶주림 속에 얼어죽었다.
 “김경징은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배로 가서 달아났다. 천총(연대장급) 구일원이 장신을 꾸짖고 물에 빠져 죽었다.”
 사사건건 알력을 일으키며 충돌했던 ‘두 사나이’가 백성을 버리고 줄행랑칠 때는 의기투합한 것이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강도몽유록>이란 작품을 보라. 강화도에서 죽은 15명 여인들의 혼령이 한 곳에 모여 한많은 사연을 토로하는 꿈 이야기이다.
 여기서 체찰사(영의정) 김류의 부인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무능한 아들(김경징)을 강화수비의 총책으로 맡긴 것을 한탄한다. 적에게 무릎꿇고 목숨을 구걸한 남편을 둔 여인, 오랑캐의 종이 되어 상투를 자른 남편을 둔 여인…. 또 신혼 때 전쟁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지만 남편이 그 사실도 모르고 아내를 의심하고 있다는 탄식하는 여인…. 마니산 바위 굴에 숨었다가 적벽에서 투신, 으깨진 비참한 몰골로 원한을 토로한 여인…. 기생인 마지막 여인이 순절한 여인들을 찬양한다.
 “나라의 수치에 의(義)에 죽은 충신은 하나도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 뿐이니…. 이 죽음은 영광된 것이다.”
 어디 이 뿐이던가. 60만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못난 임금, 못난 아비, 못난 남편을 만난 죄로 속절없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 가운데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여성들에겐 ‘화냥년’이라는 딱지만 붙었고….
 지금 이 순간 갑곶진과 연미정에 차례로 서본다. 겨울바다, 일몰에 반짝이며 일렁대는 갑곶 앞바다, 그리고 500년 역사를 묵묵히 지켜온 연미정 미류나무….
 꼭 376년 전 백성들의 울부짖음이 바람 결에 귓전을 때린다.(<인조실록>)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가는 60만 인질들의 피맺힌 절규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 吾君 捨我而去乎)”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