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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작은 공(탁구공)이 큰 공(지구)를 뒤흔들었다.

 

 

 

“깨어라(起來)! 노예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여!(不願做奴隸的人們)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건설하자(把我們的血肉 築成我們新的長城)~”

‘의용군행진곡’이다. 필자가 탁구담당 기자를 했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중국 국가이다. 국제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마지막 날이면 중국의 오성홍기가 뻔질나게 오르내린다. 그에 맞춰 의용군행진곡이 쉴사이없이 연주된다.
중국탁구가 7개 전종목(남녀단체, 남녀단식, 남녀복식, 혼합복식)을 싹쓸이하면 7번이나 반복되는 세리머니이다. 지금도 나도 모르게 경쾌하고도 장중한 전주와 함께 씩씩한 목소리로 부르는 행진곡을 흥얼거릴 때가 많다.
하기야 중국의 등록선수가 최소 5000만에 이른다니 놀랄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선수만 해도 남한인구(5000만)에 육박한다니 말이다. 그러니 탁구는 중국의 국기라고 할 만 하다. 중국탁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그 때마다 고비를 념겨준 혁명의 상징이자, 희망의 상징, 평화의 상징이었다. 

 

<사진 1> 마오쩌둥을 비롯한 홍군은 옌안 시절 식탁 겸용 탁구대를 이용, 탁구를 즐겼다.

 


■탁구는 ‘혁명의 상징’

1936년 홍군(紅軍·중국공산당 군대명칭)은 3년간에 이르는 역사적인 대장정을 마치고 옌안(延安)에 도착한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의 토발작전을 버티면서 무려 1만2500㎞를 쫒겨온 것이다. 거의 궤멸상태였다. 장정 도중에 합세한 농민까지 약 30만 병력 가운데 단 3만 명 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홍군은 옌안에서 전력을 재정비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 탁구는 힘겨운 병영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다.

“탁구에 대한 홍군의 열의는 대단했다. ~레닌클럽마다 중앙에는 식사시간이면 식탁으로 바뀌는 대형탁구대가 있었다. 식사시간이면 언제나 배트(라켓)와 공, 네트로 무장한 4~5명의 비적(匪賊·홍군을 말함)들이 동료들의 식사를 재촉했다. 그들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병사들은 자기 부대의 챔피언이 최강자임을 자랑했으며 필자(에드가 스노)는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에서)

비단 병사들 뿐이 아니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혁명 주체들도 탁구로 시름을 달랬다. 이들은 스노가 밝혔듯 식탁을 이은 탁구대를 활용해서 탁구를 즐겼다.
옛 사진을 보면 마오쩌둥의 경우 펜홀드 그립을 쓰다가, 셰이크핸드 그립으로 바꿀 정도로 능숙한 탁구솜씨를 보인다. 저우언라이의 경우 말을 타다 떨어져 오른팔을 다쳤다. 그는 재활훈련의 하나로 탁구에 빠졌다. 총리시절 탁구선수의 개인신상 뿐 아니라 타법까지 꿰뚫고 있었다. 1972년 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면서도 탁구를 하다가 해방군 305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다.
 


■2000만명이 희생된 중국 대륙

신생국 중국은 1950년대 후반들어 미증유의 위기에 봉착한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백가쟁명·백화제방’과 ‘대약진운동’이 완벽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백가쟁명(百家爭鳴)·백화제방(百花齊放)’은 ‘한꺼번에 100가지 꽃이 피고, 100가지 학파가 경쟁한다’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소통의 정책’인 것 같았다.
지식인들은 당의 관료주의적인 폐해는 물론 마르크스 주의를 중국에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 지 여부까지 자유롭게 토론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었다. 이들 ‘철없는’ 지식인들은 역풍을 맞았다.
곧바로 무자비한 ‘반우파 투쟁’이 벌어졌다. 수십만명의 지식인들이 죽었다. 또 많은 수의 지식인들은 농촌으로 쫓겨가 ‘노동을 통한 자기개조의 시간’을 버텨야 했다. 대약진운동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대약진운동의 골자는 70만개에 이르는 협동농장을 2만개의 인민공사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직업과 성, 연령, 교육의 차이가 없는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이제 중국대륙에서 굶주림이란 없다”고 선언했다. 이제 명실상부한 공산주의의 싹을 틘 것이라면서….

“중국인들은 더이상 돈을 내고 식품을 사지 않아도 된다. 잉여생산물은 전세계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기루였다. 평등만을 강조한 너무 급진적인 공산주의였다. 공업과 도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인민공사의 농민들이 너무 심한 착취를 당했다. 할당량을 채우려다 보니 터무니없는 거짓 보고가 난무했다.
결정타는 1960~61년 사이에 대륙을 강타한 기근이었다. 극심한 가뭄이 중국 농경지의 절반을 휩쓸었다. 여기에 시시 때때로 불어닥친 태풍은 살인적인 강풍과 홍수를 동반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50%가 사망했다. 2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약 2000만명이 희생됐다.

 

<사진 2>1959년 도르트툰트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단식우승을 차지한 룽궈퇀. 도탄에 빠진 대륙의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1968년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홍위병들의 핍박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人生有幾回搏)”

그 때, 도탄에 빠져있던 중국대륙에 한줄기 희망을 비춰준 것이 바로 탁구였다.
신중국 건국 10주년이 됐지만 암울했던 소식만 들리던 1959년 4월 6일이었다. 22살 청년 룽궈퇀(容國團)은 독일 도르트문트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헝가리의 시도 페렌크를 꺾고 남자단식 우승을 차지했다. 
홍콩출신인 룽궈퇀은 그야말로 인민영웅이 됐다. 불과 2년 전인 1957년 광둥성·홍콩·마카오 친선대회에 출전했다. 당시 그는 깡마르고 키만 멀쩡히 컸으며, 심한 페결핵을 앓고 있었다. 그는 기타를 치고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를 부르면서도 마오쩌둥의 시(詩)를 사랑한 청년이었다. 그는 친선대회에서 중국 챔피언(왕촨야오·王傳耀)을 꺾는 기염을 토한다. 국가체육위원회 허룽(賀龍) 주임의 눈에 들어 대륙으로 건너온다. 1년 뒤 국가대표팀에 합류한다. 특히 파이팅이 좋았다. 붓글씨를 잘 쓴 룽궈퇀은 자신의 의지를 과시하는 구호를 서폭에 담았다.


“세계챔피언이 되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不拿世界冠軍死不瞑目)”

심지어 대회를 준비하는 회의에서 대중들에게 이렇게 큰소리쳤다.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왔을 때 반드시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人生有幾回搏 此時不搏何時搏)”

사람들은 룽궈퇀의 말을 두고 ‘어린 놈이 큰소리 치는 것’이라고 치부했다. 그런데 이 구호는 룽궈퇀이 단식우승을 차지한 뒤 중국대륙을 풍미한 구호가 됐다. 도탄에 빠진 중국인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됐다. 지금도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일상구호가 됐다. 사실 대회에 출전한 중국선수들은 줄줄이 탈락했다. 룽궈퇀만이 고군분투했다.
그는 미국의 노장 리처드 마일즈와의 단식 준결승에서 세트스코어 0-2의 불리를 극복하고 3-2의 역전승을 거둔다. 마일즈는 마지막 5세트에서 얼마나 농락 당했는지, 21점이 끝나기도 전에 룽궈퇀과 악수를 나누고 퇴장해버렸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패배를 인정해버린 것이다. 4월6일 롱궈퇀은 결승에서 헝가리의 시도 페렌크마저 꺾고 패권을 잡았다.

 

<사진 3> ‘히피’라는 별명이 붙었던 미국선수 글렌 호완. 1971년 나고야 세계대회 도중 중국선수 좡쩌둥과 우연히 만나 친분을 쌓았다. 호완을 비롯한 미국선수들은 대회직후 중국대륙을 방문함으로써 핑퐁외교의 서막을 열었다. 사진은 기자회견에서 중국방문의 소감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도탄에 빠진 대륙의 희망이 되다

중국대륙은 난리가 났다. 인민일보는 사설에서 룽궈퇀의 쾌거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칭송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중난하이(中南海)와 베이징 반점(최고급호텔)에서 중국선수단을 초청했다. 5월1일에는 톈안먼 광장에서 축하퍼레이드를 벌였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롱궈퇀의 우승을 건국 10주년과 함께 1959년의 양대경사로 꼽았다.
중국은 또 하나의 경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1961년 26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베이징에 유치한 것이다.
앞서 밝혔듯 중국의 경제상황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경제난에 모든 건설사업이 중단됐지만, 원형의 궁런(工人)체육관을 건설했다. 저우언라이 총리가 모든 준비를 통제했다. 또한 108명의 선수들을 모아 합숙훈련에 돌입했다.
중국의 가장 두려운 적은 일본이었다.

 

<사진 4>1972년 4월 미국을 방문한 좡쩌둥이 프리스비(원반) 를 던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좡쩌둥은 1971년 나고야 세계대회에서 미국선수 글렌 호완에게 손을 내민 주인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중국은 일본이 ‘호권구(弧圈球·드라이브)’라는 비밀기술로 무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지금의 ‘드라이브’였다. 지금은 초등학교 선수들도 치는 초보기술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스매싱 위주의 단순한 플레이로 일관했던 탁구계로서는 혁명적인 기술이었다. 그걸 일본이 개발한 것이다. 일본이 대회를 앞두고 홍콩에서 전지훈련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중국은 스파이를 보낸다.  그가 바로 좡자푸(莊家富)였다. 그는 학생으로 위장해 일본팀 훈련장에 잠입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신문지로 얼굴을 가렸다. 마침 일본의 에이스 호시노 노부야의 ‘호권구’를 포착했다. 매우 높은 포물선을 그린 느린 타구였다. 정보를 얻은 좡자푸는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 정보를 분석한 덕분에 중국은 일본을 꺾고 남자단체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남녀단식에서 좡쩌둥(莊則棟)과 추중후이(邱鍾惠)가 패권을 안았다. 중국은 남자단체와 남녀단식에서 3개의 금메달을 가져갔다.  때마침 시름에 빠져있던 중국대륙은 한줄기 희망을 부여잡았다. 탁구는 대륙의 ‘인민’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몇 년 뒤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66년부터 일어난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 인민영웅 룽궈퇀이 자살한 것이다. 1968년 6월20일 저녁이었다. 그가 ‘자본주의의 소굴’인 홍콩 출신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홍콩을 드나들며 마작과 같은 나쁜 짓을 했고, 외국소설과 외국고전음악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전형적인 주자파(走資派)’로 지목됐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했던 그는 홍위병들의 무자비한 구타에 시달렸다. 시도 때도 없이 대중앞에 끌려와 혹독한 자아비판을 받았다. 이런 수모 속에 룽궈퇀은 31살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의 명예는 문화대혁명 직후인 1978년 회복됐다. 2009년에는 신중국 건국 이후 중국을 감동시킨 100대 인물로 꼽혔다.  

 

■핑퐁외교의 서막을 열다

1971년 3월14일, 중국에서 전국체육총회가 열렸다. 3월 하순부터 일본 나고야에서는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총회에서는 중국의 대회출전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중·일간 외교관계가 없었던 적성국가였다. 일본의 우익이나 타이완 공작원들의 테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저우언라이 총리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탁구가 이번에는 국제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마오쩌둥 주석의 승인을 얻어 대회참가를 결정했다. 마오 주석과 저우총리는 선수단에게 신신당부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마오)

“승부보다는 우호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저우) 

4월4일, 대회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나고야. 미국선수단 가운데 글렌 호완이란 선수가 있었다. ‘히피’라는 별명에 걸맞게 장발에 꽃무늬 옷을 입은 19살 청년이었다. 청년은 체육관에서 몸을 풀다가 그만 선수단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당황한 그 앞에 버스 한 대가 멈쳤다. 중국선수단 버스였다. 차 안의 어떤 선수가 ‘차를 타라’고 손짓했다. 코완은 얼떨결에 버스를 탔다. 적성국가의 버스…. 살벌한 동서냉전 속에 적성국가 소속 버스를 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코완에게 “타라”고 권한 중국선수는 다름아닌 좡쩌둥(莊則棟)이었다. 61·63·65 세계탁구선수권 3연패를 자랑하는 중국의 인민영웅이었다. 선수단 부단장도 겸하고 있었다. 좡쩌둥도 ‘미제국주의자 타도’의 구호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성장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오쩌둥 주석이 미국 언론인인 에드가 스노와 평생의 친구로 지낸 것을 떠올렸다.
용기를 낸 좡쩌둥은 황산(黃山·안휘성에 있는 중국의 명산)이 그려진 수건을 코완에게 전했다. 손짓발짓으로 대화를 나누던 둘은 버스에서 내려 기념사진을 찍었다. 코완은 좡쩌둥이 선물한 수건을 펼쳐들었다.  
코완은 다음 날 평화를 상징하는 3색 티셔츠를 좡쩌둥에게 전달했다. 티셔츠에는 ‘Let it B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둘의 조우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코완은 “중국방문을 원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안가 본 나라에 가고 싶다”며 “물론”이라고 코멘트했다. 이것은 1년 뒤 중·미 국교정상화를 성사시킨 한마디였다.     

 

<사진 5>1972년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가 중국을 방문한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을 접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잠결의 한마디, “미국팀, 초청하게!”

“중국을 가고 싶다”는 이 말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보고됐다. 4월6일이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병중에 있는 마오쩌둥 주석에게 이같은 뜻을 전달했다. 마오 주석도 ‘동감’이라는 뜻을 전했다. 당시 마오쩌둥의 건강상태는 최악이었다. 폐렴과 심장이상 등으로 위중했다.
의사들이 처방한 수면제를 먹고서야 비로소 잠이 들었다. 그 날 밤(4월6일)도 마오 주석은 수면제를 복용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잠에 취해가던 마오 주석이 갑자기 수간호사를 불렀다.

“외교부(의전장)에게 전화를 걸게.”

수간호사가 전화를 걸자 마오 주석은 희한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 선수단, 초청하라고 하게. 즉각!”

수간호사 우쉬진(吳旭君)이 귀를 의심했다.

“초청 말씀입니까. 미국선수단을 초대하라는 말입니까.”

수간호사는 몇 번이나 주석이 한 말을 반복했다. 워낙 중요한 결정이었으므로 주석의 말이 맞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마오 주석은 잠결에 빠져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은 곧바로 잠들었다.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꿈의 계시와도 같은 이 지시로 중국은 미국선수단을 초청했다. 4월10일 미국선수단은 열렬한 환호 속에 베이징에 도착, 국빈대접을 받는다. 첫단추를 꿴 호완은 수만명의 인파 속에서 “나야말로 마오 주석의 말마따나 요원의 불길을 일으킨 주인공”이라며 으쓱댔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핑퐁외교의 서막이다. 핑퐁외교 이후 미·중간 외교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라켓을 이어받은 저우언라이와 키신저가 긴밀한 물밑작업을 벌였다. 이듬해인 72년2월21일 닉슨 미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했고, 79년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함으로써 미·중간 국교가 정상화했다.

<사진 6> 1991년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 코리아가 중국을 꺾고 여자단체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의 주역인 유순복, 홍차옥, 리분희, 현정화(왼쪽부터)가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모든 게 우연 같았지만, 실은 필연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미국과 중국은 한국전쟁 때 직접 충부리를 겨누고 싸웠다. 그런 양국에게 새로운 주적(主敵)이 생겼다. 소련이었다.
동서냉전의 주적인 미국과 소련은 그렇다치자. 한때는 사회주의 맹방이었던 중국과 소련도 해묵은 감정을 폭발시킨다. 소련은 사회주의 동지였지만, 53년 흐루시초프 체제가 등장하면서 중국과 결별의 서곡을 연다.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면서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은연중 비판한 것이다. 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중국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맹비난했다. 급기야 69년 중·소 국경인 우수리강에서 2차례에 걸쳐 무력충돌이 벌어진다. 이제 중국의 주적(主敵)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된 것이다. 이제 ‘적(소련)의 적(미국)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1969년 1월 취임한 미국 닉슨 대통령도 중국에 잇단 화해제스처를 보냈다. 닉슨은 2월 외교교서에서 ‘중공(中共)’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호칭했다. 3월25일에는 미국 시민의 중국 여행을 허락했다.
글렌 호완-좡쩌둥 사이에 벌어진 ‘우연한’ 접촉은 이런 바탕에서 이뤄진 것이다. 탁구는 이렇게 세계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스포츠이다. 지금도 탁구를 모르는 이는 중국의 지도층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전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그랬듯이…. 예컨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도 그렇다.
2008년 일본을 방문한 후진타오는 일본의 후쿠하라 아이(福原愛)와 중국의 왕난(王楠) 간 연습경기를 보다가 양복상의를 벗었다. 후진타오는 일본의 천재 탁구스타 후쿠하라와 8세트의 경기를 벌여 5세트를 이겼다. 물론 후쿠하라의 ‘접대용 탁구’였을 것이다. 아무리 접대용이라 하지만 5세트나 뽑아냈다는 것은 상당한 탁구실력임을 과시한 것이다.
누군가는 중국탁구를 ‘위위구조(圍魏救趙)’라는 고사성어에 비유한다. 상대의 약점을 계속 찔러 쉽게 넘어오는 공을 공략하는 탁구의 특성을 말해주는 고사라는 것이다. 중국탁구가 강한 이유가 바로 이 ‘위위구조’라는 고사를 잘 활용하기 때문이란다.

 

 

<사진 7>21년 전 지바탁구선수권대회를 마치고 북한 탁구에이스 리분희 선수와 필자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른쪽에서 카메라 쪽을 보고 있는 이가 훗날 리분희의 남편이 된 김성희 선수이다.  

■46일간의 통일을 이룬 탁구공

이렇게 엄청난 역사를 갖고 있는 중국탁구를 극복하기란 쉽지않다.
그러고보면 이따끔씩이라도 만리장성의 일각을 뚫고 꾸역꾸역 정상에 서는 남북한 탁구가 기특하다.
최근 개봉된 영화 <코리아>를 보니 불현듯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의 일이 생각난다. 필자는 당시 취재기자로 일본에 파견됐다. 훈련기간을 합해 46일간의 ‘작은 통일’을 보고 느꼈던 그 때의 일이….
4월29일 오후 6시 무렵이었다. 남북단일팀의 유순복이 가오쥔을 꺾고 여자단체전 우승을 차지했을 때…. 너무 엄청난 사건에 정신이 멍했던, 그래서 잠시 우두커니 서있었던 그 때의 순간이….
얼마 전 당시 코리아팀 여자코치였던 이유성씨(대한항공 스포츠단장)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아요. 덩야핑·치아홍·가오쥔 등 당대 중국탁구 실력은 역대최강이었는데….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는데….”(이유성)

“분위기 때문에 이겼던 것 같아요. 남북한 7000만의 염원이 모인 그 체육관 분위기…. 1억4천만개의 눈과 귀가 모인 거잖아요. 중국선수들이 쩔쩔 매서 팔도 올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기자)

그렇다. 중국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탁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반목을 일삼던 남북 젊은이들이 46일간의 통일을 이루게 했던 것도 탁구요, 그 하나된 힘으로 철옹성 같던 중국을 극복하게 만든 것도 탁구이지 않은가. 저우언라이의 말이 떠오른다.

“작은 공(탁구공)이 큰 공(지구)를 흔든다.(小球轉動大球)”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