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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잘못 출제된 입시문제 '흑역사'

 최근 수능 세계지리 8번 문제 파동을 보면 역사는 돌고 돈다는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으로 돌아가니 말이다. 
 때는 바야흐로 1964년 12월 7일 서울시 전기중학 입시가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도 수능일이면 전국이 들썩거리지만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험 치른 다음날, 각 신문에는 전날 치른 문제가 이른바 ‘가리방으로 긁은 글씨체’ 그대로 전제되었다.
 당시만 해도 코흘리개 국민학생(초등학생)들까지 입시지옥을 겪었으니 아찔한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큰 사단이 일어났다.. 

 

1964년 12월 7일 벌어진 전기중학 입시 자연문제 17번과 18번 문제,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재료를 고르는 문제이다. 전기중학 시험문제는 도하 각 신문에도 그대로 전제됐다. |경향신문 자료   

자연 과목 18번 문제가 이상했다.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로 적어 놓은 것이다.
 1.찹쌀 1kg 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2.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3.이 밥을 물 3ℓ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4.이것을 엉성한 삼베 주머니로 짠다.
 5.짜 낸 국물을 조린다.
 (문제 18) 위 3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①디아스타제 ②무우즙 3)4)….

 

 ■디아스타제와 무즙
 요컨대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원래 질문이 요구한 정답은 ①디아스타제였다.
 디아스타제는 녹말을 분해해서 포도당으로 바꾸는 이른바 당화효소다. 동물의 침과 간에도 포함돼있다. 파란은 여기서 일어났다. ②무즙(무우즙)도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에도 디아스타제가 함유돼있다는 것이다.
 논란을 증폭시킨 것은 국민학교 ‘자연교과서 6-2’에 “침이나 무즙에도 디아스타제 성분이 들어있다”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말썽이 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엿을 만드는데 누가 무즙을 넣겠는가. 문제의 의도는 만약 엿기름이 없을 때는 시중에 판매되는 상품인 ‘디아스타제’를 구입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어린 국민학생들이 시판 디아스타제 추출물을 알기나 했을까.
 그러니 엿기름 대용으로 엿기름 속 효소인 디아스타제를 고른 학생도, 디아스타제 성분을 함유한 무즙을 선택한 학생도 맞았다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무즙으로 만들었다는 엿단지를 들고 서울시 교육위에 나타난 학부모들. 당시 신문들은 각 중학교 입시에서 수석을 차지한 학생의 이름과 성적까지 기사로 게재했다.

이튿날 난리가 났다.
 문교부가 ‘디아스타제’만 정답으로 발표하자, ‘무즙’을 정답으로 쓴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무즙파’ 학부모들은 사생결단이었다.
 일류중 진학을 일류고-일류대 진학의 지름길로 여겼기에 죽기실기로 대들었다.
 무즙파’ 학부모들은 “수험생의 70%가 무즙을 정답으로 써서 1점을 잃게 됨으로써 불합격했다”며 서울시교육위원회로 달려가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무기가 있었다. 직접 무즙으로 만든 엿을 솥에 담아와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무즙으로 만든 엿 좀 먹어보라’는 신문기사 제목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사태는 법정소송으로 번졌다. 이른바 ‘무즙파’ 학부모들 일부가 ‘입학시험 합격자 청구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이른바 희대의 ‘무즙재판’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서울 고법특별부는 원고들이 내놓은 ‘무즙으로 만든 엿’, 즉 무즙엿이 실제로 가능한 지 학술원 등 전문기관에 실험을 의뢰했다. 그 결과 ‘무즙으로는 엿을 고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는 무즙파 학부모들의 주장이 기각된 것이다.
 하지만 교육당국은 교과서에 수록된 ‘엿’의 정의가 모호하고 일부 수련장 등에도 ‘무즙’으로 혼동될 수 있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무즙파’ 학부모들도 ‘무즙엿’을 국회의장 집에까지 들고 가 시위를 벌였다.
 결국 1965년 3월30일, 서울고법은 ‘무즙도 정답으로 봐야한다’며 원고승소판결을 내림으로써 ‘무즙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법은 판결문에서 “18번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때 엿을 만드는 당화작용에 대한 문제로 해석된다.”며 “따라서 디아스타제가 포함된 무즙도 정답이 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즉 교사용 교과내용으로 보면 엿을 만드는 방법으로는 1)엿기름, 2)상품화된 디아스타제, 3)산(酸)으로 만들어 중화시키는 방법 등인데, 2)디아스타제가 포함된 ‘무즙’도 당연히 정답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판결로 승소한 38명의 ‘무즙파’ 학생들에게 구제의 길이 열렸다. 승소한 학생 가운데 경기중에 30명, 서울중에 4명, 경복중에 3명, 경기여중에 1명 등이 추가입학하게 됐다.   

 

특수층 자제들이 무즙 파동을 틈타 일류중학교에 덤으로 입학한 것이 드러나 큰 파란을 일으켰다.    

 ■그 틈을 탄 부정입학
 그런데 그 어수선한 틈을 타 못말리는 사건이 또 발생한다.
 ‘무즙파’ 학생들이 ‘사고처리’의 형식으로 전입학하는 어수선한 과정을 틈타 경기중 6명, 경복중 15명 등 모두 21명의 특권층 자녀들이 ‘덤’으로 부정입학 해버린 것이다.
 “이번 뒷문 입학의 근원은…지난 봄 새학년이 시작되자 일류중에 못들어간 학부형들이 아우성치자 문교당국이 이들을 조금이라도 구제해주기 위해서인지(?) 교육법 시행령을 뜯어고쳐 학급당 60명 정원을 64명으로 늘릴 수 있는 법적 조치를 취한 것…. 그러나 경복·경기 등 몇 개 학교는 일부러 64명 모두를 채우지 않고 있다가….”(경향신문 1965년 5월27일)
 이들 학교는 새학기부터 늘어난 정원을 일부러 채우지 않고 있다가 ‘무즙파’의 구제라는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일부 특권층의 뒷문입학을 슬그머니 감행한 것이다.
 또 한 번 소용돌이에 빠졌다. 특히 ‘덤입학’ ‘뒷문입학’한 특권층 가운데 청와대 비서관과 국회관계자, 재벌, 또는 국영기업체 임원의 자제들이 포함돼 있어 공분을 샀다.
 이 와중에 경기고에서도 부유층 자제 3명이 부정입학한 것이 추가로 드러남으로써 사태가 더욱 확산됐다.  

1965년 12월 실시된 66학년도 중학입시험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국민학생들이 풀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들이라는 학계 비판도 있었다.

■‘늘어놓기’ 문제와 ‘이히’ 문제
 어디 이뿐인가. ‘일류’를 향한 욕망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것도 무즙 파동이 일어난지 불과 1년 만에…. 1965년 12월이었다.
 경기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학부모 30여 명이 다시 시교위 사무실로 뛰어갔다.
 이번에는 국어 (1) ‘늘어놓기’ 문제와 (5)의 ‘이히’ 문제였다.       
 (문제 1) 느낌이 약한 것부터 늘어 놓여진 것은 어느 것인가.
 ①퍼렇다-시퍼렇다-파랗다-새파랗다, ②파랗다-퍼렇다-시파랗다-시퍼렇다 ③파랗다-새파랗다-퍼렇다-시퍼렇다 ④)퍼렇다-시퍼렇다-파랗다-새파랗다
 (문제 5)‘즐겁다’는 ‘즐거이’, ‘간단하다’는 ‘간단히’로 소리 난다. ‘이’나 ‘히’를 붙일 때 앞의 말에 ‘ㅂ’을 붙일 수 있으면 ‘이’를, 앞의 말에 ‘하다’를 붙여보아서 말이 어울리면 ‘히’로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이래 여러 말 중 위의 설명에 들어맞지 않은 말은 몇가지나 되는가. (솔직이, 간간이, 굉장이, 열심히, 헛되이, 가까이, 반듯이)
 ①3가지, ②4가지 ③5가지 ④7가지
 (문제 1)의 정답은 처음에는 ②번이었다. 그러나 당시 경기중 교장이 ②③을 모두 맞는 것으로 복수정답 처리를 했다. 이 교장은 또 ②로 채점했던 (문제 5)의 정답을 ①로 변경했다. 그러자 정답변경으로 손해를 봤다는 학부모들이 또 다시 머리띠를 두른 것이다. 경기중 교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문제 1)의 경우 ‘가장 알맞는’이라는 조건이 없다면 한 개와 정답 외에도 차선의 답도 맞는다고 봐야한다”며 “②와③을 복수정답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 (문제 5)의 경우도 “국정교과서와 국문학자의 학설이 뒤집히지 않는 한 정답은 ①일 수밖에 없다”이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불합격자 110여 명은 ‘불합격취소’ 행정소송을 법원에 제출했다. 1년전 무즙파 학부모들처럼….
 하지만 이 소송은 결국 학부모들의 패소로 끝났다. 서울 고법특별부는 “(1번)과 (5번) 문제를 둘러싼 학자들의 의견이 구구하기 때문에 획일적인 기준이 없다”며 “따라서 재판에 의해 좌우될 문제가 아니며 학교당국의 주관에 따라 정답이 결정될 문제”라고 판시했다.(1966년 3월31일) 학교장의 재량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앞의 두 문제가 과연 12살짜리 국민학생이 풀 수 있는 수준인가. 당시 일선교사들은 “권위있는 학자들에게나 물어봐야 정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를 12살짜리 아동에게 냈다”며 “건전하지 못한 질 나쁜 문제였다”고 꼬집었다.(<경향신문> 65년 12월28일)
 

1968학년도 중학입시에서 또 한 번 말썽을 부린 입시문제. 경기중 교장이 복수정답을 인정하는 바람에 한바탕 파란을 일으켰다. 

■계속 터져나오는 잘못된 문제
 1967년 12월 6일자 신문은 우울했다.
 동베를린공작단(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정하룡·조영수·윤이상·최경희·최정길’ 등 6명에게 사형이 구형되는 등 충격적인 기사가 실린 것이다.
 그런데 신문 사회면 한편에는 그날의 사회분위기와 전혀 맞지않은 코미디 같은 기사가 실린다. 
 바로 4일 전(12월 2일) 치러진 중학교 입시의 미술문제가 잘못됐으니 시정하라는 ‘이틀째 농성’의 기사였다. 그렇다면 논란이 된 미술문제의 13번과 19번은 무엇이었는가.
 “(문제 13) 목판화를 새길 때 다음 중 창 칼 쓰는 법이 바른 것은?
 (문제 19) 우리가 조형작품을 만드는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①꾸미기 ②만들기 ③스케치 ④협동제작
 출제자인 서울시교육위원회가 제시한 정답표의 정답은 (문제13)의 경우 ‘②앞으로 당기기’, (문제 19)의 경우 ‘③스케치’였다.
 그러나 채점이 한창이던 2일 밤 11시쯤 반전이 일어났다. 경기중학교 교장이 논란많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두 문제의 정답이 애매하다면서 복수정답을 제시한 것이다.
 경기중 교장은 (문제 13)의 경우 정답은 ②앞으로 당기기 뿐 아니라 ③뒤로 당기기도 정답이며, 문제 19의 경우 ①꾸미기 ②만들기 ③스케치 등 3답이 모두 맞는다고 했다.
 그러자 시교위의 정답표대로 답을 적어낸 수험생 학부형들이 들고 일어났다. 경기중 강당을 점령, 철야농성을 벌인 것이다.
 “시험당일인 2일 오후에 10여 대의 지프가 학교를 방문한 뒤에 정답이 바뀌었다. 특권층의 압력이 있었던 게 아니냐. 두 문제에서 정답이 한 개씩으로 채점이 되면 160점 만점에 156.7점 이상이면 합격되는데, 2~3개의 복수정답을 인정하면 커트라인이 158.6으로 높아진다. 그럴 경우 300여 명의 순위가 뒤바뀐다.”  

 

  ■행정소송의 승패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집권당(공화당) 의원의 자제가 끼어있다는 둥, 농성 학부모 중 국회의원의 사모가 있다는 둥….
 어쨌든 이 사건 역시 행정소송으로 비화됐다. 서울고법은 “특히 (문제 19)는 위법이 아니지만, (문제 13)은 도안으로 된 답을 선택하는 것인데 복수정답을 채택한 것은 교장의 재량권 남용”이라고 원고승소판결을 내렸다. (13번)만 인정해준 것이다.
 이 판결로 158.4점이던 경기중의 합격선은 158점으로 낮아졌고, 19명의 낙방생이 구제되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1968년 10월28일 대법원은 경기중학교 교장의 정답 복수처리는 교장의 재량권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해당 코흘리개 학생들의 동심만 멍든 것이다.
 이런 불미스런 사건이 이어지자 1968년 7월15일 정부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중학교 무시험제도를 발표한 것이다.
 문교부는 일류병의 ‘악의 축’으로 지목된 경기·서울·경복·경기여·이화·경동·용산·서울사대부중·창덕여·수도여·중앙·보성·숙명·진명 등 14개 중학교를 단계적으로 없앴다고 발표했다.
 그 때부터 코흘리개 국민학생들의 입시지옥은 사라졌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을 보면 어떤가. 입학시험을 보진 않지만 초당학교 4학년이면 대학이 결정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아닌가.
 또 하나 40년 전에는 중학교 입시 때 벌어졌던 잘못된 시험문제가 대학입시에 버젓이 등장하고 있으니…. 세월이 흘러도 좋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는 입시지옥의 현실이 아닌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