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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제자(왕건)와 스승(희랑)의 만남, 남북한 공동의 ‘금속활자…대고려전에 어떤 북한유물 오나

제자(왕건)와 스승(희랑)의 만남, 남북한 공동의 ‘금속활자…대고려전에 어떤 북한유물 오나

“고려 태조 왕건상과 스승 희랑대사상의 만남, 남북한 공동으로 발굴한 금속활자 ‘단(전·전)’자의 전시…. 이것이 이뤄진다면 12월 19일 열릴 대고려전의 고갱이가 되겠지요.”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이룬 고려의 건국 1100년을 맞아 박물관이 준비중인 ‘대고려-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에 ‘왕건상과 금속활자 단’의 출품을 학수고대했다. 그 바람이 성사될 가능성이 커졌다.

2016년 4차핵실험, 개성공단 가동 중단 등으로 남북한 공동발굴 사업이 무산된 이후 북한이 단독으로 개성 만월대에서 찾아낸 금속활자 4점. 물이름 ‘칙’, 지게미 ‘조’, 이름 ‘명’, 밝을 ‘명’ 자로 해석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2월 열릴 대고려전에 남북한이 공동발굴한 ‘단(전)’자와 함께 출품해주었으면 하는 유물들이다.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대국민보고에서 “올해 12월에 열리는 대고려전에 북측 문화재를 함께 전시할 것을 김정은 위원장에게 제의했고, 김 위원장은 그에 협력하기로 했다”고 전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미 대고려전을 준비하면서 왕건상과 금속활자 단(전)을 출품 희망 북한문화재 17점 목록을 통일부에 전한 바 있다.
뭐니뭐니해도 국립중앙박물관이 0순위로 출품을 희망하는 북한 문화재는 ‘왕건상과 고려 금속활자’이다.
왕건상은 1992년 3월 개성 서북쪽 고려태조 왕건릉(현릉)을 개수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출토됐다.

옷을 입히는 것을 전제로 한 나체상이며, 2㎝ 크기의 어린아이 성기를 갖고 있다. 특히 얼굴이나 몸은 ‘사람 반 불상 반’의 형상이다.

고려 태조 왕건상과 희랑대사상. 태조 왕건상은 ‘사람 반 불상 반’의 형태로 1992년 왕건릉(현릉) 곁에서 출토됐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돌리면서 무력없이 천하를 통일한 불가의 전륜성왕을 롤모델로 삼은 듯 하다. 반면 보물 999호인 희랑대사상은 힘줄과 뼈마디까지 생생한 극사실 기법으로 조성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왕건은 920년대 말엽 희랑대사를 스승으로 모셨고, 희랑대사는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일조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노명호 서울대 교수(국사학과)는 “왕건상은 출가자인 부처와 재가자인 전륜성왕의 이상적인 신체특징인 ‘32대인상’을 표현한 것”이라 해석했다. 오므라든 남근의 표현도 32대인상의 ‘마음장상(馬陰藏相)’ 즉, 말의 남근처럼 오그라들어 몸 안에 숨은 형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생에 색욕을 멀리함으로써 성취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왕건상은 아마도 진리의 수레바퀴를 돌리면서 무력없이 천하를 평정한 전륜성왕을 롤모델로 삼아 제작됐을 것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인도의 아쇼카왕처럼 전륜성왕을 자처했을 것이다.
왕건상은 지난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북녘의 문화유산’ 특별전에 다른 80여점의 유물과 함께 출품된 바 있다. 그러나 12월의 ‘대고려전’에서는 왕건의 스승으로 알려진 ‘희랑대사상’(해인사 소장·보물 제999호)과의 만남이 추진되고 있다.

남북한 공동조사단이 2015년 11월 물체질로 찾아낸 금속활자. 남한에서는 ‘아름다운 단’이나 ‘한결같은 전’으로, 북한에서는 ‘사랑스러울 전’으로 읽는다. 남북한이 ‘고려=금속활자 발명국’임을 재차 확인시켜주는 획기적인 발굴성과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야산해인사고적>에 따르면 왕건은 920년대 말엽 후백제군과의 해인사 인근 전투 때 고전을 면치못하자 해인사 주지인 희랑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희랑대사는 용적대군(승병)을 보내 왕건의 대승을 이끌었다.

왕건은 희랑대사를 더욱 공경하며 전답 500결을 시납하고 해인사를 중수했다. 1075년(문종 29년) 편찬된 균여(923~973)의 전기(<균여전>)를 보면 “희랑공은 우리 태조 대왕(왕건)의 복전(福田·일종의 스승)이 되었다.”고 했다.
현재 해인사가 소장중인 희랑대사상은 높이 82.3㎝, 무릎너비 60.6㎝ 의 등신상이다.

‘사람 반 불상 반’인 왕건상과 달리 미간과 이마의 주름과 손의 힘줄, 손가락 뼈마디까지 표현된 극사실주의 기법이 돋보인다. 모시나 삼베같은 헝겊을 여러 겹 바르고 칠을 거듭해서 형태를 만드는 이른바 건칠기법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섬세한 표현이 가능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해인사측과의 협의, 오는 10월19일부터 대대적인 희랑대사 조각상의 이운식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출품을 희망하는 적조사 철불. 북한의 국보급 제137호이다.

이운행사는 태조 왕건을 비롯한 7왕과 16공신을 모신 숭의전(경기 연천 마전)을 거쳐 임진각에서 개성에 묻혀있는 왕건릉을 향해 인사를 올리는 이벤트로 열린다.

북한측과의 협의를 통해 왕건상의 출품이 확정되어 희랑대사상과 함께 전시된다면 1100년 만의 스승·제자 만남이라는 이야깃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배기동 관장은 “태조 왕건과 후삼국통일을 지원한 희랑대사의 만남은 분단국가의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는 뜻깊은 전시가 될 것”이라고 희망했다.
또하나의 관심거리는 남북한 공동조사단이 2015년 11월 개성 만월대에서 발굴한 고려 금속활자 ‘단(전·혹은 전)’자의 출품여부이다. 사실 ‘고려=금속활자 발명국’이지만 기존에 남아있는 금속활자는 남북한에 1점씩, 단 두 점 뿐이었다. 그러다 남북한 공동발굴에서 1점을 찾아낸 것이다.
이 금속활자는 ‘아름다운 단(전)’이나 ‘한결같은 전’자로도 읽힌다. 북한측은 이 글자를 ‘사랑스러울 전’자로 해석했다. 어떻게 읽든 이 글자는 그대로 남북한이 발굴해낸 그야말로 ‘한결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금속활자’였던 것이다.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도 18일 열린 만찬에서 “북에서는 ‘사랑스럽다’는 ‘전’, 남에서는 ‘아름답다’는 ‘단’으로 읽는 글자를 찾았다”면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우리 민족의 역사를 되살려 낼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7차에 걸쳐 진행되었던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은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2월 개성공단 가동 중단 발표 등으로 무기한 중단된 바 있다. 그해 3~4월 북한 단독 발굴에서 4점의 금속활자가 더 발굴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남북한 합작으로 찾아낸 ‘단(전·전)’자와 북한이 수습한 4점의 ‘대고려전’ 출품을 바라고 있다. 그 경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덮을 전’자와 함께 전시할 예정이다.
박물관측이 이번 특별전에 출품을 바라는 북한 문화재 가운데는 북한 국보급 제137호인 적조사 철불(쇠부처·개성 고려박물관)과 관음사 관음보살상(개성 산성리), 불일사 5층탑 출토유물(개성 판문군)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향후 출품 희망 유산을 두고 관계기관과 긴밀해 협조하는 한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북한측과 협의해 나갈 방침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