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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지뢰지대에서 찾아낸 고려 불상

판문점 선언에 따라 비무장지대가 평화지대로 변한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예전에 답사한 뒤 기록했던 비무장지대 일원에서 찾아낸 문화유산을 재조명해보겠습니다.  

관할부대 주임원사가 미확인 지뢰지대에서 발견한 거대불상. 지뢰지대 속에 겨우 좁은 길을 내어 불상까지 접근했다.

 「미확인 지뢰지대」라는 빨간 딱지의 표지를 스치듯 지나가노라니 왠지 꺼림칙하다. 수풀을 헤치며 다가가는 발걸음이 섬뜩하다.
6·25 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백학산 고지(해발 229미터ㆍ파주시 군내면 읍내리). 군사분계선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남방한계선에 접한 곳이다.
사방 「미확인 지뢰지대」임을 경고하는 간이철책 사이에 아슬아슬 나있는 교통호를 따라 내려가는 길이다.
2005년 2월8일, 구정 전날 아침. 당시 1사단 00연대 00대대 주임원사인 임종인씨도 이 교통호를 따라 내려왔다. 눈 덮인 전방고지. 병사들과 함께 한창 눈을 치우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저만치 이상한 걸 보았어요. 사람 같았습니다. 미확인 지뢰지대에 사람의 형상이라니….』
 자세히 보았지만「그 사람」은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망주석은 아닌 것 같고…. 무슨 불상 같았어요.』
 임종인 원사는 지뢰탐사반을 불렀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1년의 일이었다.
 당시 부대 뒷산인 일월봉 진지 위에 큰 돌이 서 있었다. 그때 임원사는 돌이 떨어질까 봐 병사들과 함께 돌을 굴려 떨어뜨릴 요량으로 힘껏 밀었다. 하지만 꿈쩍도 안했다.
『나중에 보니 그 돌이 마애사면불(磨崖四面佛·나중에「경기도 문화재」로 지정)이었어요. 장정들이 몇 번이나 힘껏 밀었는데도 떨어지지 않은 걸 보면 다 부처님의 뜻이었겠죠.』
 이렇듯 24년 전의 일이 뇌리를 스쳤다. 임원사는 지뢰탐색기를 앞세워 조심스럽게 한걸음한걸음 내디뎠다.
『척 보아도 한 5미터 되는 엄청난 불상이 떡하니 서 있었어요. 목이 달아난 불상이어서 섬뜩하기도 했고….』
 야릇한 흥분감에 젖은 임원사는 불상 뒤를 병풍처럼 두른 바위에 올라가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신문의 오·탈자」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미확인 지뢰 때문에 더는 조사하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보고했고, 관할 군내출장소에 알렸다.
 다음날 때마침 구정이었으므로 임원사는 과일 등 제사음식을 불상 앞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드렸다.

 

-잘린 목은 몸통 옆에 가지런히

누군가 목이 달아난 불상이 몸통 앞에 가지런히 놓은 것 같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임원사가 처음 본 것처럼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채 있었다. 머리는 불상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아마도 한국전쟁 이전에 누군가 떨어진 머리를 수습해서 잘 모셔놓은 것이 분명하다.
 불상은 잘린 불두(佛頭)의 높이가 134센티미터, 두폭 63센티미터였으며, 지상으로 노출된 불신(佛身)은 334센티미터였다. 따라서 불두와 불신을 함께 계산할 경우 불상의 크기는 468㎝나 되었다. 머리는 소발이지만 얼굴 면과 분명하게 구분되었고, 얼굴에는 높은 코와 가느다란 눈, 작은 입, 길게 늘어진 귀 등이 표현됐다.
 석불 앞쪽에는 예불을 올릴 때 공양물을 올려놓은 배례석(拜禮石)이 마련돼 있었다. 석불은 평면조각이며 이목구비의 표현이 분명치는 않고, 옷 주름도 간략한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두 팔이 다소 길게 표현됐고, 신체의 비례 역시 비사실적인 기법으로 조각돼 있었다. 어깨가 넓고 당당한 인상을 준다. 석불 주변에 기단과 초석이 남아있었는데, 이는 작은 규모의 보호각이 있었음을 반증해준다.
 당시 최선일씨(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의 평가.

『운주사 석불(전남 화순·사적 312호)이나 대저리 석불입상과 비슷한 수인(手印)이었어요. 두 손이 옷자락 안쪽에 놓여있는데, 가슴 부위에서 두 손을 깍지 꼈거나 지권인(智拳印)수인은 부처나 보살의 깨달음의 내용이나 활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시 가운데, 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모양. 지권인은 손 집게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쥐는 것.
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은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외롭게 서있지만, 전쟁 전까지는 지역민들의 예불대상이었을 것이다. 이 입상은 백학산 아래 향교동의 드넓은 농지를 바라보고 있다. 예전에 향교(鄕校)가 있던 지역이라 향교동이라 했는데 한국전쟁 후 동네 주민들을 모두 민통선 이남으로 이주시키는 바람에 동네는 폐촌이 되었다. 한때는 지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을 불상도 전쟁과 남북 분단의 희생양이 되어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이다.

 

-거석불을 세운 까닭은?

관촉사 은진미륵. 이 보살상은 경기·충청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다./문화재청 제공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엄청난 거석불(巨石佛)을 만들었을까.
 연구자들은 고려 광종(재위 949~975년)을 주목한다. 최선주씨(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는『특히 고려시대 대불(大佛)은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건국한 고려시대 전기(918~1170년) 사이에 집중 조성됐다.』고 말한다.
 이때는 왕권 강화를 추진했고, 미륵신앙과 미륵을 주존(主尊)으로 하는 법상종이 성행했으며, 신라 하대부터 대두된 풍수사상이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끼친 시기다.
 불교에도 신이적(神異的)인 요소가 나타났던 시기였다. 특히 왕조 초기에 끝까지 저항한 후백제 세력을 통제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지방 호족들을 아우를 필요가 있었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고토인 연산과 논산에 개태사와 관촉사를 세우고 삼존불상을 조성한 일과, 광종이 논산 관촉사에 무려 18.12미터 크기의 석조보살상을 세운 것이 단적인 예다.
 특히 광종대가 주목된다.
 광종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을 아우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족들의 거센 반발 속에서도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다.(956년) 호족들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위축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개국초기의 공신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국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를 등용해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왕권강화책은 불교계에도 적용된다.
 승과제도를 설치했고, 승직을 정비하여 승계제도를 확립했으며, 여러 종파를 통합하는 등 불교계 개혁에 나섰다. 광종 14년(963년)에는 개경에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했으며, 무차대회(無遮大會, 승려·속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여 법문을 듣는 법회의 하나)와 수륙회(水陸會,물과 육지의 홀로 떠도는 귀신들과 아귀에게 공양하는 재)를 개설했다.

연산 개태사 석조삼본불 입상. 10세기 후반대 작품이다. /문화재청 제공

광종은 이런 정책을 폄으로써 불교계를 개혁의 든든한 후원세력으로 두게 된 것이다.
 당시 귀법사에는 균여(均如)과 탄문(坦文)이 활약했는데, 특히 균여(923~973년)는 화엄사상 안에 법상종 사상을 융화하려는 성상융회(性相融會)의 사상적 경향을 가졌다. 그런데 이 성상융회 사상은 광종이 지방호족을 흡수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적합했다.
『특히 군소 토호 세력 출신인 균여는 당시 중류 이하의 신분층과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광종이 군소 토호세력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끌어들이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어요, 균여를 귀법사 주지로 임명하여 불교계를 지지세력으로 편입시킨 겁니다.』(최선주씨)
 광종은 화엄종 뿐 아니라 호족세력의 뿌리 깊은 지지를 받고 있던 선종(禪宗)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니 도성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사찰이 건립되었고, 잦은 불교행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토목공사는 농사철을 가리지 않았고… 평상시의 1년간 비용이 족히 태조 당시의 10년 비용과 같습니다. 이런 폐단이 광종에게서 시작되었으니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는 불교의 인과응보에 현혹되어 죄업을 없애고자 하여 백성의 기름과 피를 짜내 불교행사를 많이 일으켰습니다.』(『고려사』「열전」‘최승로조’)
 훗날 최승로(927~989년)는 성종에게 바치는 시무28조에서 광종의 숭불정책을 이렇게 신랄하게 꼬집었다.
 왕조 창건에 따른 새로운 기운을 북돋우면서 왕권 강화책을 펼친 광종은「작은 것」보다는「큰 것」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 빠졌던 것이다. 유학자인 최승로는 그걸 비난한 것이다.
 태조~광종대에 많은 불사가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규모가 큰 불상들 역시 조성되었을 것이다. 이때는 또한 어지러운 후삼국 시대를 반영하는 미륵신앙(이상적인 복지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로서의 미륵을 믿는 신앙)이 이어진 시기였다.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가 대표적인데, 미륵불 신앙은 고려 창건 이후에도 옛 백제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1세기에 조성된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문화재청 제공

 현존하는 석조대불 대부분이 충청도와 경기도에 밀집된 게 이를 뒷받침한다. 왕조개창(王朝開倉)에 따른 새로운 기운과 왕권강화책을 추진할 때였음으로 작은 상(像)보다는 거대한 상(像)이 선호됐을 것이다. 특히 100% 통제가 되지 않았던 후백제 고토에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풍수도참사상 또한 거대불상 조성을 부추겼다. 도선(道詵)은 밀교와 도참사상을 결합하여 전국 곳곳에 사원이나 탑·부도를 세우고 여러 불보살에게 빌면 국가와 국민이 보호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신라가 망한 이유를 사찰을 대부분 남쪽으로 지어 지덕이 손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해 주목을 받았다. 태조는 훈요십조에서 도선이 정한 곳에 사탑을 세울 것을 권하고 비보사원에는 토지를 분할 지급하는 등의 보호정책을 폈다.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지정된 비보소(裨補所ㆍ부처의 힘을 빌려 지덕(地德)이 쇠하는 것을 막거나 그 기(氣)를 보충하고자 인위적으로 조성한 곳)는 3800 곳이나 되었는데, 이곳에 전국의 유명사찰이 다 들어찼다. 개경에 7층탑, 서경에 9층탑을 각각 건립한 것도 바로 이런 사상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엄청난 규모의 불상이 건설된 것이다.

 

-지역 백성들의 기도처

 그렇다면 백학산에서 발견된 석조여래입상도 이런 시대적인 배경에서 세워진 것일까.
 박경식 한백문화재연구원장과 최선일씨, 그리고 최선주씨 등은 고려 시대의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문화재 지정을 위해 작성한 최선일씨의 공식 조사보고서도「고려 시대」라고 시기를 확정지었다.
 최선주씨는『앞서 언급한 시대적 배경 속에 경기남부, 충청, 전라도에서는 거석불 조성이 유행병처럼 퍼졌다』면서『이런 거석불의 계보가 이어져 경기 북부(백학산)에서 확인되었다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왕조가 거석불을 주도적으로 만들었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지역민들이 스스로 나서 불상을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 파주 불상도 그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도 있다. 백학석불의 사진을 본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은『이 불상은 조선시대, 즉 15세기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문관석(文官石·문관의 형상으로 깎아 무덤 앞에 세우는 돌)의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본다.

보수공사로 목을 붙여놓은 불상모습. 약간은 촌스러운 느낌이 든다.

『옷 속에 감겨 있는 손 모양은 두 손으로 합장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신체 표현이라든가, 층단식으로 표현된 옷주름 등을 볼 때 15세기 중엽에 특징적으로 볼 수 있는 문관석 양식을 빼닮았습니다.』
 그는『이런 양식의 조선시대 불상은 처음 확인되는 것이어서 조선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런 시대 확정과 성격 규명은 전문가들이 앞으로 해야 할 몫이다.

여기서는 한 평범한 직업 군인의「소리 없는 활약」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지뢰밭에 방치된 문화재를 찾아낸 주임원사 임종인씨의 활약에…. 필자는 2009년 봄,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이우형씨와 함께 백학산 불상을 찾아보았다.
 백학산 군 도로를 타고 올라가는 길. 남방한계선에 접해있는 지라 가는 길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불상이 있는 계곡으로 빠지는 입구에 다다르자 군용 지프가 선다. 2007년 4월에는 볼 수 없었던 안내판이 서있었다.
 2007년 5월7일부터 26일까지 3천600만원을 들여 불상의 정비공사를 벌였다는 내용이었다. 필자가 처음 답사했던 게 2007년 4월 무렵이니 그 직후에 공사를 벌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불상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쉽지 않다. 교통호를 가득히 채운 낙엽에 발이 빠져 어려운 발걸음을 옮겨 닿은 바로 그곳. 정비는 됐다지만 길의 양편은 여전히 지뢰지대이므로 온 신경을 써야한다.
 안내장교의 이끎에 불상이 있는 그곳으로 다가가니 저 쪽에 거대한 불상이 온전한 모습으로 떡하니 서있다. 처음 답사했을 때는 떨어져 있던 불상의 목을 떡하니 붙여놓았다.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눈앞에 나타난 불상이 왠지 낯설기도 하고, 혹은 다행스럽기도 하고…. 목 잘린 불상을 처음 보았을 때는 느끼기 힘들었던, 불상의 거대한 모습에 절로 경건해졌다. 또 한 가지 느낌은 약간은 촌스럽기도 한 불상의 얼굴이 도리어 시골사람의 넉넉함을 자아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