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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수가 담긴 요술 황금 사리병의 정체

왕흥사 출토 사리기 명문을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대목을 볼 수 있다.

 

즉, 백제왕 창이 죽은 아들을 위해 절을 짓고, 원래 사리 2매를 봉안했는데, 나중에 신의 조화(신령스럽게)로 3매로 변했다.(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는 내용이다.

그런데 괴상한 것은 그렇다면 금제 사리병 안에 존재했어야 할 사리는 2매나 3매는커녕 단 1매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금제사리병엔 1400년된 물이 담겨있었고, 사리 또한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사리병 안에는 맑은 액체가 가득 들어차 있었을 뿐. 금제사리병을 품에 안고 있는 은제사리병과 사리함에서도 한 알의 사리도 확인되지 않았다.

 

어찌된 것일까. 그렇다면 명문은 거짓이란 말인가. 몇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다.

첫 번째 누가 사리를 꺼냈을까? 하지만 조사단에 따르면 사리함과 사리병은 결단코 단 한 번도 꺼냈거나, 꺼낸 뒤 다시 봉안 한 흔적이 없다.

 

그렇다면 사리가 1400년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녹아버렸을까.

여기서 발굴 당시 금제사리병 속에 가득 차있던 맑고 투명한 액체가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1400년을 버틴 액체의 성분에 대한 관심이 우선 컸다. 이것이야말로 마시면 천년을 산다는 「천 년 수」 아니, 그보다 더한「천 사백년 수」가 아닌가.

 

무엇보다 혹 사리가 이 「천 사백년 수」에 녹아버린 것은 아닐까. 사리는 기본적으로 화장한 뒤에 나오는 유골이다.

 

만약 그 유골이 액체에 녹아 있었다면 유기물의 흔적이 극소량이나마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숨죽이면서 실시한 성분분석 결과 이 액체는 그냥 결로현상 때문에 생긴 물이었다. 유기물의 흔적이 없었다는 뜻은 사리가 없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남은 한 가지 가능성은? 아예 처음부터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문에 따르면 이 사리봉안식은 부처님의 열반일인 (577년) 2월15일에 맞춰 엄수됐다. 임금은 왕흥사를 세우는 불사를 일으킴으로서 불력으로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 기울어져간 국세를 되살리려 했다.

 

이 때의 사리봉안식은 백제의 중흥을 만백성에게 알렸던 국가적인 이벤트였을 것이다. 사리를 직접 넣지 않고도 신의 조화로 둘에서 셋으로 변했다는 등의 신이(神異)를 강조한 정치적 이벤트였을까?

 

하지만 과학과 논리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이야기다.

 

명문에 나오는 대로 신의 조화로 사리가 2에서 3으로 변했다면, 거꾸로 또한 신의 조화로 3개가 0로 변했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금제사리병을 넣었던 은제 사리병에서도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기야 사리를 봉안하면서 넣지 않은 사리를 넣었다고 거짓말 했겠는가.

 

사리 2매가 3개로 변했듯 3개가 된 사리가 0으로 변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불가사의 한 신이(神異)의 현상일 수도 있다.

 

상식과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는 대목이다.

한가지 예를 들자. 익산 천도설에 힘을 실어준『관세음응험기』에는 이런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즉, 백제 무왕 때(639년) 불에 탄 제석사지 탑 아래 초석에서 수정병이 확인됐는데, 아무리 겉과 속을 살펴보아도 사리가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임금이 불공을 드리고 참회한 뒤 병을 열자 불사리 6과가 병 안에 영롱하게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밖에서 보아도 6개가 완연했다.

또, 중국 송(宋) 원가(元嘉) 19년(442년) 서춘(徐椿)이라는 인물이 경을 읽고 밥을 먹다가 사리 2과를 얻어 항아리에 넣었는데, 나중에 20과가 되었다.

그런데 훗날 그가 타락하자 사리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즉 사리의 감응을 본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공경하는 이는 얻고 업신여기는 이는 잃는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출토된 왕흥사 사리기에 3과가 남아있어야 할 사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서춘의 예처럼 타락한 세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1400년 전의 무왕처럼 지금의 지도층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진심어린 기도를 올린다면 사라진 사리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