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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청동기시대판 0.3㎜ '나노' 기술…다뉴세문경의 원조는 빗살무늬 토기였다?

“그게 사실이오?” 고(故) 한병삼(1935~2001)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생전에 문화재 중간상인으로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고해성사’를 들었다. 때는 1960년대 충남 논산 훈련소라 했다. 참호를 파던 병사들이 의문의 물체들을 발견했다. 흙과 녹이 잔뜩 묻은 고색창연한 청동기 세트가 묻혀 있었다. 

국보 141호 정문경. 지금까지는 다뉴세문경으로 알려져 왔다. 기원전 3~2세기 무렵 최절정기에 제작된 청동거울이다. 고대 청동기 제작에서 황금비율로 여겨지는 구리 대 주석 비율(67대 33)에 가장 근접한 66대34를 기록했다. 황금비율에 속하는 유일무이한 거울이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논산훈련소 군인들이 수습한 희대의 청동기

동심원과 삼각형 문양이 잔뜩 새겨진 청동거울(정문경 혹은 다뉴세문경 혹은 고운무늬 거울)과 방울 8개 달린 팔주령(2점), 포탄 모양의 간두령(2점), X자가 교차된 조합식(1점) 및 아령 모양의 쌍두령(2점) 등 청동방울이었다. 모두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제정일치 지도자가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기였다. 군인들은 이 청동기 세트를 중간상인에게 팔아넘겼다. 

중간상인은 이중 정문경을 숭실대박물관에 팔았다. 나머지 청동방울 일괄은 수집가 김모씨를 거쳐 호암(리움)미술관으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청동기 세트는 막연하게 강원도 출토품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후 숭실대박물관 소장 ‘정문경’(1971년·국보 141호)과 호암미술관 소장 ‘청동방울 일괄유물’(1973년·국보 146호)은 차례로 국보가 됐다. 

국보 146호 청동방울 일괄. 논산훈련소 군인들이 1960년대 국보 141호 정문경과 같은 곳에서 수습했지만 중간상인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산가족이 됐다는 후일담이 있다. 정문경은 숭실대에, 청동방울 일괄유물은 호암미술관(리움 미술관)에 각각 팔렸다고 한다. |리움 미술관 소장 

하지만 2곳 박물관의 유물이 같은 출토지 출신의 남매라는 사실을 몰랐으니 이산가족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이 청동기 세트를 사고팔았던 중간상인이 고 한병삼 관장에게 “국보 141호와 146호는 논산훈련소 군인들이 수습한 세트유물”이라고 증언하고 나선 것이다. 한병삼 전 관장에게서 중간상인의 고백을 전해들은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대형 청동거울과 청동방울 세트의 조합이 자연스럽다”면서 “게다가 청동방울에서 보이는 검은 녹의 색깔이 청동거울인 정문경과 극히 유사하다”고 밝혔다. 

국보 141호 정문경의 도안. 내구와 중구, 외구 등 3개의 구획 안에 중심이 같은 동심원들과 1만3000여개의 선(線)이 그려져 있다. 선의 간격은 0.3~0.34㎜, 원의 간격은 0.33~0.55㎜에 불과하다. 청동기 시대판 나노기술이라 할 수 있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청동기시대 판 ‘나노 기술’ 

국보 141호 ‘정문경(精文鏡)’은 대중적으로는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으로 알려진 청동거울이다. ‘고리(紐)가 많은(多) 가는 무늬(細文) 거울(鏡)’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거친 무늬 거울’을 지칭하는 ‘조문경(粗文鏡)’이 있으니, ‘거친’에 대응하는 ‘고운 무늬 거울’은 거칠 조(粗)자의 반대인 정할 정(精)자 ‘정문경’이 옳은 표현이다. 게다가 ‘다뉴세문경’ 용어는 일본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1890~1983)가 붙였으니 왜색풍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의 국보 141호의 정식 명칭은 ‘정문경’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 ‘정문경’이라는 명칭도 더 쉽게 ‘고운무늬 청동거울’로 바꿀 필요가 있다.

국보 141호의 세부 문양.  거울의 지름은 212~218㎜, 잔존 무게는 1590g 정도이다. 그런데 이 정문경에는 반복된 동심원과, 그 동심원 안에 새겨진 무늬, 그리고 직선을 이리저리 규칙적으로 새긴 삼각문양 등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이 국보 141호 ‘정문경’은 처음부터 ‘국보경(국보거울)’로 일컬어질만큼 국보 중 국보로 통했다. 그럴만 하다. 이 정문경은 기원전 3~2세기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거울의 지름은 212~218㎜, 잔존 무게는 1590g 정도이다. 

그런데 이 정문경에는 반복된 동심원과, 그 동심원 안에 새겨진 무늬, 그리고 직선을 이리저리 규칙적으로 새긴 삼각문양 등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확대경을 들이대고 세어본 선만 1만3000개가 넘는다. 선의 간격은 0.3~0.34㎜, 원의 간격은 0.33~0.55㎜에 불과하다. 가히 0.3㎜의 ‘청동기시대판 나노기술’이라 할 수도 있다. 현대기술로도 새기기 힘든 이 정문경을 제작한 2300년 전의 장인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야말로 ‘집중력과 인내의 화신’이었을 것이다. 

초정밀 정문경에서 보이는 제작상 결함. 그러나 이런 흠결은 오히려 2300년전 보다 정밀한 청동거울을 제작하고자 했던 장인의 치열한 분투에 비하면 구우일모(九牛一毛)라 할 수 있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참빗살로 그려본 동심원

그렇다면 이 극초정밀의 문양을 어떻게 새겨넣었을까. 박학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 학예연구관은 지난해(2019년) 11월 열린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아주 흥미로운 도구를 들고 나왔다. 

대나무 자와 참빗살로 개조한 컴퍼스였다. 우선 대나무자 같은 도구로 직선, 격자문 등을 새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 다음은 참빗살이었다. 참빗살은 원 사이의 간격이 0.33~0.55㎜에 불과한 동심원을 그리는데 활용됐다. 즉 참빗살 21가닥의 끝을 얇게 깎은 만든 일종의 다치구(多齒具) 컴퍼스로 동심원을 그려본 것이다. 박학수 학예관은 “대나무 껍질로 만든 다치구 컴퍼스로도 정문경의 동심원 문양을 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라 설명했다.

국보 141호정문경에서 보이는 각종 흠결들. 2300년전 장인이 이 거울을 주조할 때 생긴 결함들로 보인다. 이런 흠결은 거푸집의 주물사에 수분이 너무 많았거나 점토분이 적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박학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 학예연구관의 논문에서

■황금비율로 탄생한 정문경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점이 생긴다. 0.3㎜의 극초정밀 예술품을 어떻게 주조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정문경을 두고 첨단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불가사의라고 혀를 내둘렀던 이유였다.

최근들어 여러가지 주조법으로 실제 복원하기도 했다. 예컨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7호인 이완규 주성장(鑄成匠)은 2007년 활석에 직접 문양을 새긴 뒤 주조하는 방법으로 정문경을 재현해보았다. 이른바 활석(석범) 주조법이다.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 등은 활석거푸집을 사용한 밀랍주조법으로 정문경을 복원해보았다. 즉 활석에 문양을 새긴 뒤 밀납을 부어 굳힌 다음 그 위에 고운 황토와 가는 모래 등을 섞은 배합토를 씌운 후 열을 가해 밀랍을 녹여냈다. 그렇게 만든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거울을 만들어보았다. 

2300년전 국보 141호 정문경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거푸집의 재료인 모래가 정문경의 거울면(경면)과 무늬면(뒷면)에 걸쳐 혼입된 사실이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에 의해 확인됐다. |박학수의 논문에서 

또 2007년부터 1년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의 분석결과 ‘국보경의 실체’에 한발 다가가는 성과를 얻어냈다. 즉 숭실대 소장 국보 141호 정문경은 구리 61.68%, 주석 32.25%, 납 5.46%를 함유한 것으로 분석됐다. 구리와 주석 비율만 따지면 65.7대 34.3이었다. 고대 청동기의 합금비율을 기록한 중국의 <주례> ‘고공기’에 기록된 ‘금유육제(金有六齊)’ 내용을 해석하면 ‘구리 67대 주석 33이 합금의 황금비’라 한다.

그렇다면 국보경은 고대 청동거울의 황금비(67대33)와 견주면 단 1% 정도의 오차가 보일 뿐이다. 

2008년 당시 성분분석을 담당한 유혜선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장은 “국보 141호 정문경은 고대 청동거울 제작을 위한 황금비율을 그대로 반영했다”면서 “청동기 기술이 최고정점에 달할 때 제작된 유일무이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동심원들은 다치구로 한번에 그렸다. 하지만 동심원을 표현하기 어려운 한가운데는 그냥 장인의 손으로  그렸다. 일종의 컴퍼스인 다치구로 한번에 그릴 때 생긴 점을 주물사로 메운 뒤 그렸을 것이다. |박학수의 논문에서

■유일무이한 은백색의 거울

청동거울의 경우 주석의 함유량이 높아질수록 색깔이 적색에서 백색으로 변한다. 

즉 주석의 함유량이 10~20%는 담황색, 20~30%는 회백색, 30~40%는 은백색을 띠게 된다. 은백색을 띠면 당연히 거울의 빛 반사성능은 좋아진다. 그래서 <주례> ‘고공기’가 이상적인 청동합금 비율을 ‘주석 33%’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생긴다. 다른 청동거울도 주석 함유량을 30% 이상으로 높이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중국이나 국내의 다른 청동거울은 주석의 함유량이 현저하게 낮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주석 함유량이 높아지면 색깔은 은백색으로 변하지만 22%가 넘어가면 치명적인 단점이 생긴다. 인장강도(잡아당기는 힘에 견디는 저항력)가 급격히 떨어진다. 그 경우 거울은 쉽게 깨질수밖에 없다. 

기원전 3~2세기 국보 141호 청동거울을 만든 장인은 쉽게 깨지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황금비율로 알려진 구리·주석 비율(67대 33)에 맞추려고 분투했다. 0.3~0.55㎜ 간격으로 그은 1만3000여개의 선과 동심원을 천신만고 끝에 다 그려놓고도 아차! 하는 순간에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국보 141호 정문경은 청동기 제작기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최상의 황금비율로 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색상과 반사율 면에서 최상의 조건을 갖춘 극초정밀의 예술품로 탄생할 수 있었고….  

참빗살과 대나무를 활용해서 국보141호 정문경의 선과 원을 재현해 본 박학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참빗살을 깎은 다치구 컴퍼스로 원을, 대나무 자로 선을  그려보았다. 오른쪽 위 사진은 이완규 주성장이 쇠자로 무늬를 새기고 있는 모습이다.|박학수의 논문에서

■더러 흠결은 보이지만… 

물론 완벽하다고 믿었던 정문경에는 몇가지 흠결이 발견됐다. 먼저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의 분석결과 정문경은 ‘주물사 주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해석됐다. 주물사 주조법은 입자가 미세하고 점토분이 많은 모래를 굳혀 그 위에 문양을 새긴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제작하는 기법을 일컫는다. 

그런데 보존과학팀 분석결과 거푸집의 재료인 모래가 정문경의 거울면(경면)과 무늬면(뒷면)에 걸쳐 혼입된 사실이 확인됐다. 

박학수 학예연구관은 “모래혼입의 흠결이 역설적으로 정문경이 주물사 주조법으로 제작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됐다”고 밝혔다. 다른 결함도 보였다. 

주물사에 쇳물을 부어 거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거푸집이 분리되어 다른 곳으로 박혀있었다. 또 주형의 모서리가 붕괴되어 원래의 모습이 사라졌고, 표면에 쥐꼬리 모양의 결함이 일어나기도 했다. 박학수 학예연구관은 “이런 흠결은 거푸집의 주물사에 수분이 너무 많았거나 점토분이 적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서 “금속공학 교과서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사례”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흠결은 오히려 2300년전 보다 정밀한 청동거울을 제작하고자 했던 장인의 치열한 분투에 비하면 그저 구우일모(九牛一毛)라 할 수 있겠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참빗살을 활용한 다치구 컴퍼스로 석고 위에 동심원을 그려보고 있다.|박학수의 논문에서

■손맛으로 갈무리한 ‘센스쟁이’ 장인  

정문경에는 또한 당대 청동기 장인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문양이 보인다. 동심원의 한가운데를 장인의 손으로 그린 흔적이다. 박학수 학예연구관의 복원 실험에서 보듯 다치구 컴퍼스로 그린다해도 한가운데 부분은 동심원으로 표시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가운데엔 컴퍼스를 그릴 때 생기는 자국(원점)이 존재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자국을 주물사로 메우고 그 위에 화룡점정 하듯 마지막 동심원을 손으로 그려넣었을 것이다. 극초정밀의 예술을 보여주면서 일말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2300년 전 장인의 센스가 아니겠는가.

또하나의 이야깃거리가 있다. 과연 국보 141호 정문경은 실제 사용했을까. 이전까지는 미사용품, 즉 부장용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육안으로는 사용흔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끈을 매달아 사용한 마찰흔적이 두 고리(紐)에서 확인됐다. 매끈한 마찰흔적은 양 고리의 바깥쪽 윗부분에서 보였다. 이는 한 사람이 정문경을 하나의 끈으로 두 개의 고리에 관통해서 매달아 사용했음을 암시해준다. 그랬으니 두 고리의 바깥쪽 윗부분에 끈이 마찰된 흔적이 보이는 것이다.      

국보 141호 정문경의 고리에서 보이는 마모흔적. 청동거울을 실제로 사람이 끈을 고리에 걸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된다. |박학수의 논문에서

■고리를 사용한 흔적의 의미 

그렇다면 2300년전 누가 이 청동거울을 달고(혹은 들고) 다녔을까. 지금까지는 정문경의 기본문양 모티브인 십자(혹은 ×)일광문이 우주(십자문)와 태양(일광문)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먼저 정문경 내부의 4구획된 십자(혹은 ×자)문은 고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한 기원전 6000~5000년 서아시아 채문토기에서 보인다는 것이다.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 지역의 십자문 모티브는 기본적으로 우주의 본질을 표현한다”면서 “수메르의 도시국가 에리두 토기 문양은 여러 개의 동심원 속에 십자문이 들어가 있는 형태”라고 소개했다. 그러니 원형 청동거울 자체도 태양을 상징하고, 거울 표면의 십자문과 ×자문, 동심원 등은 강렬한 햇빛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2300년 전 하늘과 인간, 땅의 소통을 독점하는 제정일치 시대의 지도자라면 어떨까. 은백색의 정문경을 가슴팍에 달고 햇빛을 환하게 반사하면서, 양손에는 팔주령과 간두령, 쌍두령 같은 청동방울을 마구 흔들며 하늘신·조상신과의 접신을 시도했던…. 백성들은 반사되는 강렬한 햇빛과 요동치는 방울 소리에 경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도자의 신통력과 벽사력을 한없이 찬양하면서….

최근 정문경(다뉴세문경)의 문양이 기원전 6000년 무렵 시작된 덧띠무늬 토기(가운데)와 기원전 4500~3000년 유행한 빗살무늬 토기에서 그 원류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문경 문양은 비와 구름을 그린 것” 주장 

그런데 근자에 정문경의 문양을 단순히 태양과 햇빛으로 해석하지 않고 비와 구름으로 읽은 논문이 발표됐다. 김찬곤 광주대 초빙교수가 지난 6월 학술지인 <인문사회 21>에 발표한 논문(‘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기본무늬와 세계관 연구)이다. 

김교수는 논문에서 “8000년 전의 유물인 덧띠무늬 토기에서 시작된 국보 141호 문양은 신석기시대 대표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기원전 4500년 시작)에서 전형적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우선 ‘청동거울 문양은 삼각형 내부를 평행선으로 빽빡하게 채워넣은 삼각집선문을 기본 무늬단위로 한다’는 <한국고고학사전>의 용어풀이에 문제를 제기한다. 신석기 시대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의 문양을 두고 ‘생선뼈무늬’ ‘번개무늬’ ‘빗금무늬’와 같은 기하학 무늬로 규정짓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그렇게 기하학 무늬라고 단정해버리니 연구가 진척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은 국보 141호 정문경의 다양한 문양을 복원해보았다.|이양수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논문에서

김교수는 우선 러시아 문양학자인 아리엘 골란(1921~)과 프랑스 종교학자 장 프르질루스키(1885~1944) 등이 “신석기 문양 가운데 수직직선과 지그재그선, 물결선 등을 ‘비(雨)와 비를 관장하는 하늘여신과 농경 등’으로 해석한 것”에 주목했다. 또 “신석기 그릇 아가리 쪽 반타원 무늬는 구름이며, 이 구름무늬는 삼각형으로 바뀐다”는 러시아 역사학자 보리스 리바코프(1908~2001)와 리투아니아 출신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1921~1994) 등의 견해도 받아들였다.

김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덧띠 혹은 빗살무늬 토기와 정문경 제작자는 추상적인 기하학 무늬를 새긴게 아니라 구상무늬, 즉 구름과 비를 그린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하늘에 구멍이 뚫려 40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쏟아졌다’는 서양의 <성경> 창세기 7장과 “하늘이 아홉겹(天有九重)이고, 하늘을 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이 무너졌다”는 동양의 <회남자> 내용도 인용했다. 

김찬곤 교수는 덧띠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에서 보이는 삼각형 무늬와 빗금무늬를 수분을 가득 머금은 구름과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로 파악했다. |김찬곤 교수 제공

■“정문경의 시작은 신석기 덧띠 및 빗살무늬 토기부터” 

김교수는 덧띠무늬 토기에서 보이는 삼각형은 뭉게구름, 빗금은 비를 각각 의미한다고 보았다. 또 더 정교하게 문양을 새긴 빗살무늬 토기에서는 하늘 속 물과 하늘 속, 파란 하늘과 삼각형 구름, 구름 속 수분과 빗줄기, 땅 등을 표현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흐름은 정문경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는 게 김교수의 주장이다.

즉 정문경에서 보이는 삼각형은 구름으로, 빗금은 비로 파악했다. 외곽에 그려진 동심원 8개는 어떻게 해석할까. 김 교수는 ‘하늘 아래 아홉개의 들판이 있다(天有九野)’는 <회남자>의 언급에 주목한다. 이중 한가운데는 9번째인 구주(九州)에 해당한다. 한가운데 들판을 뜻하는 구주는 ‘중토(中土)’라 했다. 

또 <회남자>에는 ‘하늘의 9방위 중 한가운데가 균천(鈞天)’이라는 대목이 있다. ‘균천’은 ‘하늘의 한가운데’를 의미한다. 김교수는 바로 이러한 고대 동양의 세계관에 착안해서 정문경의 한가운데, 즉 고리(뉴)가 있는 원을 ‘들판의 하늘문(天門)’으로 해석했다. 김교수의 해석대로라면 정문경 한가운데 동그라미가 균천이고, 외구의 동심원 8개는 8개의 들판 혹은 8개의 방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새긴 삼각형 구름과 빗줄기는 이 하늘문에서 구름과 비가 쏟아지는 것으로 풀 수 있다. 

필자가 김찬곤 교수의 논문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2300년 전 최고의 예술품이라는 정문경 관련 연구가 김교수의 지적대로 ‘기하학무늬’라는 덫에 빠져 정체된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정문경 연구의 지평을 신석기시대까지 넓힌 논문이 나왔으니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계의 평가는 학계의 몫이려니….

 

 김찬곤 교수는 국보 141호에 새겨진 선 문양은 삼각형 구름과 빗줄기로, 외구의 동심원 8개는 <회남자>등이 설명하는 8곳의 들판 혹은 8곳의 방위를 의미하고, 한가운데 원은 하늘문으로 해석했다. |김찬곤 교수 제공 

■0.3㎜ 예술의 역사

1975년 당시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도쿄(東京)에서 열릴 한일국교정상화 10주년 기념 특별전 제목을 ‘한국미술 5000년전’이라 붙였다. 1973~75년 사이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기원전 3000년전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토기를 3~7단으로 상·중·하로 화폭(토기표면)을 나눠 갖가지 무늬를 새긴 선사인들의 예술품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본다. 기원전 6000년전 시작된 선사인들의 생각이 담긴 디자인(덧띠무늬 토기)은 기원전 4500~3000년 사이 더욱 정교하게 발전했고(빗살무늬토기), 기원전 300~200년에 되어 ‘청동기시대판 나노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극초정밀 예술품(정문경)’으로 정점을 찍은 것이 아닐까. 아니다. 0.3㎜~3㎜ 예술품을 자유자재로 만든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장인과. 정문경 제작 후 1400년이 지난 뒤의 고려의 장인들도 0.3~3㎜의 조각으로 꽃과 넝쿨, 가지무늬 2만5000개나 붙인 나전칠기를 제작했다. 0.3㎜의 예술을 창조한, 하여간 대단한 분들이 아닌가.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찬곤,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기본무늬와 세계관 연구’, <인문사회 21> 제21권 3호, 아시아문화학술원, 2020

박학수, ‘국보 141호 다뉴세문경 거푸집의 조각 도구와 방법’,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추계학술대회, 2019

박학수·유혜선·이양수,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의 제작기술’(박학수), ‘다뉴세문경 성분조성에 관한 연구’(유혜선), ‘다뉴세문경 도안과 제작기술의 변천’(이양수),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연구>, 숭실대기독교박물관, 2008

이건무, ‘다뉴정문경에 대하여’,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연구>, 숭실대기독교박물관, 2008

윤용현·조남철, ‘청동잔무늬거울의 복원제작기술과 과학적 분석’, <보존과학회지> 통권 40호,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2012

이완규, <한국의 문화유산 청동기 비밀풀다>, 하우넥스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