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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최초의 '전 백성' 여론조사 실시…세종의 숨겨진 업적

“전국의 전·현직 관리는 물론이고 세민(細民·가난하고 비천한 백성)들에게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 그 결과를 아뢰도록 하라.” 1430년(세종 12년) 3월 5일 세종대왕은 가히 혁명적인 명을 내린다. 호조가 ‘전답 1결 당 조 10두 징수’를 골자로 한 공법(세금) 방안을 제출하자 세종이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지시한 것이다. 

이 최초의 여론조사에는 무려 5개월여가 걸렸다. 꼭 4개월이 지난 7월5일에는 ‘여론조사 중간점검 회의’까지 열었다. 이때 호조판서 안순(1371~1440)은 “지금까지의 조사를 보면 경상도에서는 찬성이 많고 함길·평안·황해·강원 등은 반대가 많다”고 중간보고했다. 세종은 “각 도의 (여론 조사) 결과가 도착하면 중앙 및 지방의 관리들은 공법의 장단점과 해결방안을 마련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1430년 3월5~8월10일까지 ‘공법 시행’을 두고 5개월여에 걸친 전국적인 여론조사 결과 17만2806명 가운데 57.1%인 9만8657명이 판성표를. 42.9%인 7만4149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찬성 57.1%, 반대 42.9%

그로부터 한달여가 지난 8월10일 마침내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총 17만2806명 가운데 찬성 9만8657명, 반대는 7만4149명’이었다. <세종지리지>에 따르면 당시의 조선인구가 69만 2477명이었으니 인구의 4분의 1이 참여한 대규모 여론조사였던 것이다. 어린이를 빼면 전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국민투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날짜 실록은 3품 이하 전·현직 관리들의 찬반과 각도 감사·수령과 백성들의 찬반 결과를 숫자로 기록했다. 즉 3품 이하의 전·현직 관리 중 찬성은 702명(현직 259명 전직 443명), 반대가 510명(현직 393명 전직 117명)이었다. 3품 이상의 고위 및 3사(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관리들은 “공법의 장단점과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세종의 지시에 따라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했다. 기자가 1430년 8월15일자 <세종실록>에서 의견을 피력한 3품 이상 및 3사 관리들의 찬반을 분석해보니 찬성은 26명 안팎이었고, 반대는 89명 안팎이었다. 절충안을 제시한 경우도 2~3명 정도는 됐다.(물론 숫자없이 의견만 피력한 정3점 이상 및 삼사 관리들만 인용했으니 정확치는 않다.) 

<세종실록> 1430년 8월10일자에 실린 공법 관련 기사에서 여론조사를 분석한 각 도별 결과. 전라와 경상 등 상대적으로 전답이 많고 비옥한 지역의 찬성률이 높았고, 강원 평안 함길 등 척박한 지역일수록 반대여론이 높았다. |소진형의 논문에서 인용한 표를 재정리한 것   

시도별 여론조사 결과에서 주목할 것은 전라도(찬성 2만9547명 반대 269명)와 경상도(찬성 3만6317명 반대 393명), 경기도(찬성 1만7106명 반대 241명) 등 3도에서 99%의 찬성 몰표가 나왔다는 점이다. 개성 유후사(특별시)에서도 94.1%(찬성 1123명 반대 71명)가 찬성했다. 

1430년(세종 12년) 세종은 공법 시행을 놓고 무려 5개월간 17만명이 참여한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찬성 57.1%(9만8657명, 반대 42.9%( 7만4149명)로 집계됐다. 

그러나 충청도(찬성률 33%·찬성 6995명 반대 1만4039명)와 황해도(22.3%·찬성 4471명 반대 1만5618명)의 찬성률은 저조했고, 논밭이 부족한 강원도는 12.6%(찬성 944명 반대 6898명)에 그쳤다. 특히 국경지대인데다 땅이 척박한 평안도는 4.5%(찬성 1332명 반대 2만8510명)에 머물렀으며, 그나마 함길도는 주민의 단 1%(찬성 78명 반대 7401명)만이 공법에 찬성했다.  

전체적으로는 여론조사에 응한 백성의 57.1%가 찬성표를, 42.9%가 반대표를 던졌다, 그렇다면 여론조사 결과가 과반을 기록한 이상 ‘해마다 전답 1결 당 조 10두 징수’를 골자로 한 공법안은 통과돼야 마땅했다,


■3분의 2 가중 다수결 원칙까지 

그런데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장시간 관리들의 백가쟁명식 견해와 대책을 모두 청취한 세종은 고심 끝에 뜻밖의 결정을 내린다. “영의정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이날 영의정 황희과 우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등이 “공평치 않고 자칫 국가재정의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공법의 시행을 극력반대했다. 그러니까 세종은 5개월간이나 공들여 진행해온 여론조사 결과에 반해 공법안의 시행을 ‘보류’한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공법의 시행을 추진하던 세종은 1443년(세종 25년) 10월 27일 또 한 번 흥미를 끌만한 제안을 던진다.

세종대왕의 최고의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훈민정음> 창제하라 할 수 있다. 공법의 완성 또한 세종의 숨겨진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지금 공법은 시행하지 않더라도 후세 자손들은 반드시 재론할 것이다. 그러니 미룰 수 없다. 과인은 경상·전라 양도의 백성 중 공법의 시행을 희망하는 자가 3분의 2가 되면 우선 이 양 도에서 시행할 것이다.”(<세종실록>)

어떤 중요한 정책을 두고 일종의 국민투표라 할 수 있는 여론조사를 실시한 왕조시대 군주가 급기야 현대에서도 시행하기 어렵다는 3분의 2 가중 다수결 원칙까지 천명했다. 민주주의의 기틀이 다져진 유럽에서도 볼 수 없는, 가히 해동의 성군다운 세종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의 최악의 세법을 택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이 그토록 시행하고자 했던 공법(貢法)은 무엇인가. 공법은 해마다 일정량의 곡물을 거두는 정액제 세금을 가리킨다. 그러나 맹자는 풍흉에 관계없이 일정세액을 거둬가는 공법을 최악의 세법으로 지목했다.(<맹자> ‘등문공’) 

일정액을 책정하다보니 풍흉에 관계없이 풍년 때는 너무 적게, 흉년 때는 너무 지나치게 거둬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동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왜 맹자가 ‘최악의 세법’이라 폄훼한 ‘공법’을 도입하려 했을까. 여말선초의 세금제도는 답험손실법이었다. 일단 ‘논 1결마다 조미 30두, 밭 1결마다 잡곡 30두’로 정했다. 그런 뒤 가을철 추수기에 관리들이 현장 조사를 통해 한 해 농사작황의 등급을 정하고(답험·踏驗), 그 작황 등급에 따라 적당한 비율로 조세를 감면(손실·損失)해 주었다. 이것이 답험손실법의 골자다.

세종의 업적으로 물시계인 자격루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빼놓아서는 안된다.   

“진실로 아름다운 법이었다”는 세종의 평가처럼 답험손실법은 제대로 작동되기만 한다면 그렇게 이상적인 제도일 수 없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문제가 아닌가. 이 제도는 전적으로 현장조사관의 능력과 인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법규정은 미비했고, 전문성있고 청렴한 관리는 적었다. 그런 마당에 수령과 감사에 재량권을 주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었다. 

그러자 태종은 1415년(태종 15년) 다른 도의 위관(임시로 뽑은 관리)이 1차로 현장 조사한 뒤, 2차로 해당 고을의 수령이 재검하며, 3차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경차관·조관)가 최종적으로 심사해서 결정하는 ‘3심제’를 도입했다. 현장조사 하는 위관의 지나친 재량권을 막으려고, 다른 지역의 관리를 투입하는 상피제를 채택했고, 그것도 모자라 중앙관리를 파견해서 세율을 최종결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법과 편법이 난무했다. 


■현장조사 관리 접대에 등골이 휘어진다 

“매양 벼농사를 답험할 때 중앙에서 조관을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감사(도지사)에게 위임하기도 하며…각 지방 향곡(鄕曲·두메산골)에 늘 거주하는 지방관을 위관(委官)을 삼았는데…이들이 조세행정에 어둡기도 하고, 혹은 사정에 끌려 멋대로 줄이거나 보태고…간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기도 하며…”(<세종실록> 1430년 3월5일)

세종은 무엇보다 현장조사에 나선 관리들의 접대에 백성들의 등골이 휘어진다는 것을 너무도 가슴아파했다. 

세종은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개발하려 애썼다. 세종은 각 도 감사에게 명하여 각지의 익숙한 농군들에게 물어 땅에 따라 이미 경험한 바를 자세히 듣고 수집하여 편찬하고, 인쇄, 보급했다. 세종 시대의 문신인 정초와 변효문 등이 왕명에따라 편찬한 농서다.

“현장조사에 나선 관리는 물론이고 하인들의 접대 비용까지도 모두 민간에서 나오고…농민들은 앞다퉈 술과 음식으로 후히 대접하면서 ‘세금 좀 낮춰 달라’고 청탁한다. 접대비용이 오히려 세금 액수와 맞먹고….”(<세종실록> 1437년 7월9일자)

1435년(세종 17년) 답험손실법의 폐단이 수치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해 작황이 좋았는데도 충청도에서 현지조사(답험)를 통해 집계된 실전(실제로 경작하고 있는 전답)의 결수가 겨우 8%에 그친 것이다.(<세종실록>) 현지 수령과 감사(도지사)의 현지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받아야 할 세금이 줄줄 새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고 직접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지 않았다. 백성들은 세금과 맞먹는 접대비용 및 뇌물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법은 부자에게는 다행, 빈자에게는 불행?

그렇다면 세종은 왜 찬성이 과반을 기록한 여론조사 결과에도 ‘보류’ 결정을 내렸을까. 우선 영의정 황희(1363~1452), 우의정 맹사성(1360~1438), 찬성 허조(1369~1439) 등 고위 관리들의 반대가 거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반대론자들은 세종식 공법이 ‘부자에는 다행이고, 백성에는 불행’이라고 주장했다.(<세종실록> 1430년 8월10일) 

즉 비옥한 전답을 점유하는 자들은 거개가 부강한 자들이며 척박한 전토를 갖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빈한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답이 넓고 비옥한 전라·경상도 등에서 99%의 찬성 몰표가, 척박하고 비좁은 평안·함길에서는 거꾸로 95~99%의 반대 몰표가 나왔다는 것이다. 특히 기존의 답험손실법에서는 ‘결당 30두’ 원칙에서 그 해의 풍흉에 따라 감해주었는데, 공법은 ‘1결당=10두’라는 일정액을 부여했다. 

세종의 또다른 업적인 4군6진 개척.

반대론자들인 이것이 문제라 했다. 이들은 “부자나 빈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들에게 1결당 10두씩 일정한 양의 세금을 거두는 것은 결국 부자에게만 유리한 세금제도이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결당 10두’로 세금을 낮추는 결과가 되니 세수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도 지적됐다. 또한 풍년·홍년을 가리지 않고 일정액을 거두는 것 자체가 백성들의 불만을 사는 요인이라 꼬집었다. 반대론자들은 차라리 조세 관련 전문관료들을 육성해서 현지조사(답험손실)에 나서게 하는 등의 제도개선을 주장했다.  


■여론조사의 조작 가능성 제기

이떤 이들은 여론조사의 결과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형조판서 정연(1389~1444)가 대표적이다.  

“부자는 일반적으로 좋은 전답을 갖고 있고 빈민들은 척박한 땅을 경작합니다. 그래서 부자는 공법을 좋아하지만 빈민은 싫어합니다. 지금 경상·전라 양도의 경우 공법 찬성자가 3분의 2가 넘지만 아마도 호족과 부유층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세종실록> 1438년 7월10일)

한마디로 정연은 전라·경상 양도의 ‘공법=찬성 몰표’는 호족과 부유층의 여론조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조참판 안숭선(1392~1452)은 공법 찬성론자이기는 했지만 ‘다수결’로 정책을 결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옛 것을 좋아하고 새 것을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감정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현혹되어 다른 백성(소수의 백성)의 선호도에 따라 발언한다면…결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세종실록> 1438년 7월 10일)

세종은 4군6진과 대마도 정벌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1419년(세종 1) 6월에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임명하여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 그림은 전쟁기념관에 있는 대마도 정벌 기록화다.

세종의 공법 여론조사는 이처럼 ‘여론조작’ 및 ‘다수결의 원칙’과 관련된 논란으로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리있는 주장들이었다. 특히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 등 재상들의 반대는 ‘과반의 찬성여론’에도 세종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세종은 ‘황희 등의 의론(반대)에 따른다’며 한발 물러선 이유다. 

 

■애덤 스미스보다 350년 먼저

하지만 세종이 ‘공법’을 줄기차게 주장한 이유가 또 있었다. 바로 ‘불확실성을 배제한 공평조세’였다. ‘조세의 공평’은 고전학파 경제학의 창시자인 영국의 애덤 스미스(1723~1790)가 조세부과의 4원칙 가운데 하나로 ‘예측가능한 공평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조세의 기본원칙으로 강조됐다.(<국부론>) 애덤 스미스는 특히 ‘아무리 큰 불공평도 아주 작은 불확실성만큼 유해하지는 않다’는 주장했다.    

세종은 조선의 하늘에서 일어나는 각종 천문현상 및 북극고도 관측과 각종 역법이론을 연구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인 칠정산을 만들었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보다 350여년이나 앞선 15세기 중엽, 그것도 절대군주인 세종이 ‘불확실성을 배제한 공평과세를 부르짖었고, 그것을 나름 실행에 옮겼으니 이것이야말로 천고에 빛날 세종의 또다른 업적이 아닐까.

과장이 아니다. 1437년(세종 19년) 7월9일 세부적인 공법안을 만든 호조가 세종에게 아뢴 대목을 보라.

“공법이 만들어지면 백성들은 모두 미리 바칠 조세의 양을 알아서 스스로 납부하게 되므로 번거롭지 않을 것이며…세법은 만세에 행해질 것입니다.”(<세종실록>)

그것이 바로 평균 수확량을 고려해서 매년 일정액의 조세를 징수하는 공법을 도입한 이유이다. 조세의 확실성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꺼져가던 불씨 살린 정인지 

꺼져가던 ‘공법’의 불씨를 되살린 이는 바로 충청도 감사 정인지(1396~1478)였다. 정인지는 공법논의가 중단된지 6년이 지난 1436년(세종 18년) 2월 22일 “풍흉에 따라 수확량과 세율을 조정하는 답험손실법이 가장 알맞지만 그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공법을 시행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정인지는 특히 “‘공법보다 좋지않은 법이 없다’는 <맹자>의 언급은 후대의 실수로 전해진 것”이라 단언했다.    

정인지가 누구인가. 바로 세종이 ‘공법’을 과거(중시·重試)의 책문 시제로 출제했을 때 ‘답험손실법의 폐단이 너무 크니 공법을 시행해야 한다’는 출제자의 의도에 꼭 맞는 정답을 써서 급제자 12명 중 장원(수석)을 차지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정인지는 세종의 공법 시행에 실무책임자가 되었다. 

그랬으니 1446년(세종 28년) 6월18일 세종은 “경(정인지) 등이 중시(과거)에서 책문의 답안을 썼고, 경이 충청감사에 있을 때 공법 재추진의 상소를 올려 청했기 때문에 내가 결단을 내렸다”고 치켜세웠다.

세종 말년에 개발된 신기전, 조선시대에 사용된 로켓추진 화살이라는 평을 듣는다.

■세수증가보다 민생이 먼저 

물론 세종은 황희 등의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일부 도(전라·경상)에서 시범으로 실시하면서 최대한 반영해가며 공법의 틀을 짜갔다. 그 와중에 “전라·경상도민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실시한다”는 ‘가중 다수결’의 개념까지 설파한 것이다.(<세종실록> 1443년 10월 27일) 시험 운영 중 드러난 문제점은 그때그때 수정·보완했다.

단적인 예가 1438년(세종 20년)부터 공법을 시험 운용하자 단 1년 만에 세수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공법 시험 시행으로 세수가 늘었지만 예전 답험손실법의 폐단으로 드는 부당한 비용의 일부를 오히려 세수로 환수했다”고 밝혔다.(<세종실록> 1439년 5월4일)

그렇지만 세종은 공법 시험 시행에 따른 세수증가를 당연시하지 않았다.

1441년(세종 23년) 7월 5일 우의정 신개(1374~1446)는 “공법을 시범시행중인 전라도(52%↑)와 경상도(70%↑)는 물론 처음 시행하는 충청도(108%↑)에서도 세수가 급증했다”면서 백성의 가중된 부담을 우려했다.

그러자 세종은 “내가 백성을 괴롭혀 세수 증대를 꾀하려고 하는 줄 아느냐”고 묻고는 “그저 답험손실법의 폐단을 없애고 민생을 편리하게 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설득했다.


■세종 덕분에 창고가 넘쳐난 조선

결국 세종은 논의중단과 재개, 그리고 시험 운용을 통해 공법을 아주 세밀하게 다듬어갔고, 1444년(세종 26년) 윤 7월23일 ‘전분 6등과 연분 9등’의 공법을 마침내 확정했다.

결부법(면적이 아니라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는 토지계산법)을 근간으로 해서 비옥도에 따라 각 전답의 면적을 6등분으로 나눠 1차 공평과세를 이루는 것이 전분 6등법이다. 또 해마다 풍흉에 따른 계량적인 세율로 조세를 징수하여 2차 공평과세를 실현하려는 것이 연분 9등법이다. 덧붙여 이전까지는 농부의 수지척(손가락 길이)으로 어림잡아 계산하던 제도를 폐지하고 표준자(주척)을 기준으로 한 과학적인 양전척을 사용하도록 했다. 

공법은 한마디로 부정부패를 원천봉쇄하는 제도를 마련해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었다. 처음엔 원망했던 백성들도 차츰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이렇게 세종이 즉위후부터 30년 가까이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심지어는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전국의 17만명이 참여한 여론조사까지 실시하면서, 미세조정을 거쳐가며 완성한 공법은 이후 조선의 공식 세법이 되었다. 1460년(세조 6년) 편찬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으나 말이다. 

성종시대에 들어 “백성들은 세종께서 만든 전분 6등, 연분 9등의 공법을 편리하게 여겼고, 참으로 만세토록 지켜 시행해야할 법”(<성종실록> 1474년 7월24일)이라고 했고, “공법이 완성되자 백성들이 원망했지만 오래 행한 뒤에는 도리어 편하게 여겼다”(<성종실록> 1478년 1월17일)고 했다.


■세종의 업적에서 추가해야 할 공법

1551년(명종 7년) 7월4일 영의정 이기(1476~1552)는 “예전 성종조에 와서는 창고가 다 차고 쌀을 저장할 곳이 없었다”면서 풍성했던 조선왕조의 ‘리즈 시절’을 회상했다.

“<경국대전>에 정해진 공법은 지극히 자세하고 정밀하여…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게 중용을 지켰는데…창고가 다 차고 쌀을 저장할 곳이 없었는데…백관은 물론이고 기술자들의 녹봉과 보수가 차고 넘쳤습니다.”

세종이 그렇게 조세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면서 이룩한 국가의 재정수입으로 조선은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다.

흔히들 세종대왕의 업적을 논할 때 훈민정음 창제를 첫손으로 꼽고 ‘대마도 정벌’과 ‘4군6진 개척’, ‘앙부일구’해시계)·‘자격루’(물시계)·측우기 등 과학기술의 발명, 신기전 등 각종 화약무기의 개량 개발,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서 ‘농사직설’ 편찬, 한성을 기준으로 한 역법 ‘칠정산’의 편찬 등을 열거한다.

그러나 그러한 업적 가운데 국민투표를 방불케하는, 그야말로 왕조시대에 걸맞지 않은 ‘전 백성 여론조사’까지 실시해서 이룩한 조세제도, 즉 공법의 확립을 빼놓는다면 지하의 세종대왕께서 섭섭해하실 것 같다. 왕위에 오르는 그 순간부터 26년간이나 민주적 절차에 의해 절차탁마하며 공들여온 ‘확실한 조세제도’였으니까 말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이 기사는 오기수의 단행본인 ‘<세종 공법>’(조율·2016년)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또한 소진형의 논문인 ‘세종시대 공법 논쟁에서 나타난 조세개혁과 인정의 관계, 그리고 그 범주 및 의미’(<정치사상연구> 24, 정치사상학회, 2018)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