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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출산 도중 사망한 비운의 여인 미라(상)

최근 대만에서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아주 다정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의 미라가 발견됐습니다. 뭐 형체는 비록 흉하지만 아이를 안고 있는 품새에서 따뜻한 모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미라 뿐 아니라 모두 48구의 유해가 확인됐는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기원전 2000년 쯤 발생한 강진 때 엄마가 아이를 보호하려 했던 모습이 아니냐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이집트처럼 일부러 시신을 미라로 만들지는 않지만 이따끔씩 생생한 미라가 발견되곤 합니다. 특히 회곽묘를 썼던 조선시대 무덤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묘곽과 관에 흠이 없도록 싸바르는 회 때문에 관 내부가 완정 밀봉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발견된 조선시대 미라 가운데는 아주 드라마틱한 미라가 있습니다. 2002년 경기 파주 파평윤씨 묘역에서 발견된 모자 미라입니다. 왜 이 미라를 두고 극적이냐고 할까요. 바로 어떤 여인이 아이를 낳다가 죽은채 미라가 됐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막 출생하기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미라의 자궁 속에는 태아가 남아있습니다. 아! 조금만 버텼어도 태아는 나왔고, 산모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텐데.. 너무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이번주 이기환의 팟캐스트 80회는 ‘출산 도중 사망한 산모…아! 5분만 참았어도’ 입니다.(편집자)

 

지금은 교하·운정신도시로 변모한 경기 파주시 교하·다율·당하·와동동 일대는 파평 윤씨 가문이 터전을 잡고 살던 곳이다.
특히 조선조 세조의 장인인 정정공 윤번(1384~1448년)의 후손들의 묘가 집중돼 있다. 묘역에는 윤번과 우의정을 지낸 윤사흔, 공양군 시호를 받은 윤계겸, 문정왕후의 아우이자 소윤(小尹)의 거두인 윤원형과 그의 애첩 정난정 등 부원군 3명과 정승 7명, 승지 12명, 참판 30명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파평 윤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운 윤신달(893∼973년)로 알려져 있다. 가문은 윤관(?~1111년)이 여진을 정벌, 이름을 떨친 뒤 명문으로 도약했다. 문무를 겸비한 윤관은 국무총리격인 문하시중에 올랐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모두 재상직에 취임하는 등 번성을 이뤘다. 파평 윤씨는 조선시대 들어 더욱 위세를 떨친다. 특히 윤안숙의 가문은 무려 4명의 왕비를 배출했다. 세조비인 정희왕후는 윤번의 딸이고, 성종비인 정현왕후는 윤곤의 손자인 윤호의 딸이다.

 

경기 파주 당하리 파평 윤씨 묘역에 있던 무연고묘. 이곳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인의 미라가 확인됐다.  

또 중종의 전비(前妃)인 장경왕후는 윤번의 아들(윤사윤)의 손자인 윤호의 딸이다. 그리고 계비(繼妃)인 윤번의 아들(윤사흔)의 증손인 윤지임의 딸이다.
이 가운데 정정공(貞靖公) 윤번의 후손이 3명이나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정공파의 시조인 윤번은 자신의 딸을 수양대군에게 혼인시켰는데, 그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딸은 정희왕후로 봉해지고, 자신은 세조의 장인인 부원군으로 도약한다.
이 정정공파의 직계후손이자 중종의 왕비인 장경왕후와 문정왕후, 그리고 두 왕후가 낳은 인종과 명종, 또한 이들을 매개로 처절한 권력다툼을 벌이는 대윤(大尹) 윤임과 소윤(小尹) 윤원형, 그리고 윤원형의 첩 정난정 등은 드라마 <여인천하>와 <정난정>의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 바 있다.

 

■비밀의 문을 연 파평 윤씨 여인의 무덤

지난 2002년 9월 6일 파평 윤씨 종중은 이장작업을 한창 벌이고 있었다. 윤돈인(1509~1584년)의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광주 김씨의 묘를 이장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묘역의 정화작업을 위해 묘역6기를 한 곳으로 모으는 작업이었다. 이 자리에 당시 고려대 박물관 연구원이자 경기도 문화재위원이었던 김우림씨와 박성실 단국대 교수 등이 전문가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세벽 7시부터 시작된 그날의 이장작업은 점심 무렵이 되자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때 종중 땅을 관리하고 있던 윤훈덕씨가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저기, 포클레인이 있는 김에 하나 더 조사했으면 싶네요.”
윤훈덕씨가 윤돈인의 무덤 상단 약 10미터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저기에서 작년(2001년)에 상단부가 파헤쳐진 무연고 무덤을 하나 확인했는데요. 도굴이 진행되었던 것 같은데….”

파주 교하 일대에 집중된 파평 윤씨 정정공파의 묘역도.

그 말을 듣고 있던 김우림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문중사람과 전문가, 장비, 장의업체가 모여 있으니 한번 작업해볼까요?”
작업이 시작됐지만 만만치 않았다. 포클레인으로 회곽묘를 노출시키면서 무덤의 주인을 가릴만한 지석이나 명문 유물 등을 찾으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회곽묘 내부를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회곽묘는 너무도 단단했고, 회곽의 이음새도 보이지 않았다.
“돌처럼 굳어버린 회곽이 얼마나 단단한지…. 할 수 없이 포클레인에 달린 브레이커(breaker)를 이용해서 분쇄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어요.”
회곽묘는 보통 석회와 세사(細沙), 황토를 3:1:1로 섞어 회다짐을 하여 무덤 구덩이와 곽의 6면에 싸바르는 무덤조성양식이다. 유가의 예법을 가르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권장한 회곽묘의 특징은 이렇다.
“회(灰)는 나무뿌리를 막고 물과 개미를 방지한다. 석회는 모래를 얻으면 단단해지고, 흙을 얻으면 들러붙어서 여러 해가 지나면 굳어져 전석(塼石)이 된다. 이에 따라 개미와 도적이 모두 가까이 오지 못한다.”
그랬다. <주자가례>의 표현이 옳았다. 이날 포클레인의 브레이커로 돌처럼 단단히 굳어진 무연고 회곽묘를 노출시키고, 목관이 드러날 때까지 무려 1시간이나 걸렸다.
드디어 외관을 열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내관의 천판 위에서 글자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자씩 읽어내려 가자 ‘坡平尹氏之柩(파평윤씨지구)’, 즉 파평윤씨의 무덤이라고 적힌 명정(銘旌ㆍ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깃발)이 내관 천판을 덮고 있었다.

■"나는 윤씨 가문의 여인이랍니다."

‘파평윤씨지구’라 함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남자가 아니라 여인임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이름이 아니라 어느 가문의 딸이라는 딱지만 붙였던 조선의 여인들이었기에…. 만일 남성이라면 ‘坡平尹公○○○’라는 분명한 이름과 관직명이 적혀있었을 것이다. 다시 조심스럽게 내관의 뚜껑을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욱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신을 덮은 한자가 완벽한 상태로 노출됐다. 한지를 걷어내자 홑치마와 누비단저고리, 겹저고리, 솜장옷 등이 차례차례 보였다. 발굴단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시신을 꽁꽁 감싼, 전혀 썩지 않은 완벽한 형태와 화려한 색상의 염습의(殮襲衣ㆍ죽은 사람의 몸을 씻기고 입히고 묶는 옷)가 있다는 것은…. 결국 시신이 썩지 않고 미라상태로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어요.”
소름이 돋았다.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미라가 확인된 예는 물론 있었다. 하지만 미라가 나오면 후손들이 그냥 이장절차를 마무리 짓거나, 혹은 화장한 뒤 뼈만 묻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조상의 시신(미라)을 연구용으로 학계에 기증한다는 생각은 언감생심이었다.
김우림은 파평 윤씨 관계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고려대팀이 이 미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습하고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파평 윤씨 문중은 논쟁끝에 시신(미라) 기증을 결정했다. 무연고 묘에서 나온 미라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지 문중 차원에서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미라는 관째로 고려대 박물관으로 옮겨갔다. 법의학 전문가인 김한겸 고려대 의대교수가 연구분석을 맡았다.

병인윤시월이라고 적힌 명정. '윤시월'이라는 명문이 무덤의 연대를 1566년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이다.

시신을 감싼 모든 옷가지를 벗기자 어렴풋 미라의 형체가 노출됐다. 연구팀은 이 상태로 고려대 의대 해부학 교실에서 옮겨갔다. 그런데….”
시신의 홑바지가 노출됐을 때 허리끈에서 무언가 한글로 쓰인 글자가 보였다. ‘병인윤시월’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그저 ‘병인년시월’이라고 쓰여 있다면 애매했을 것이다. 그러나 ‘병인윤시월’, 즉 ‘윤’자가 보였다는 것은 시대 추정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병인년 가운데 시월에 윤달이 드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니까…. 연대추정에 결정적인 단서였죠.”
이 ‘병신년윤시월’은 1566년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살아 있는 듯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과 미라의 얼굴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여인의 머리는 머리끈을 이용해 머리카락을 고정시킨 모습이었다. 악수(幄手ㆍ손에 감싼 헝겊)와 습신(시신에 신기는 신발), 겹버선, 충이(充耳ㆍ시신의 귀를 막는 솜)를 차례로 벗겨냈다. 그때까지 수습한 유물은 관을 포함해서 103건에 이르렀다. 그 중에 머리카락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머리카락을 감쌌던 종이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것들은 여러 종류의 한글편지였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주된 관심은 온전한 형태로 노출된 조선여인의 미라였다. 이 여인은 과연 누구이고, 과연 어떻게 죽었을까.

■미라의 피부는 아직 탱탱했다

김한겸 교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얼마나 흥분이 됐던지…. 그러나 시신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 흥분은 전율로 바뀌었습니다.”(김한겸 교수)
“얼핏 보기에도 영양상태가 좋아 보였습니다. 살짝 피부에 손을 대 보니 그 탄력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팔을 잡자 움직였어요. 이것은 시신에 아직 수분이 남아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지요. 수분이 없어지면 탄력은 떨어지게 돼있으니까.”
또 피부에서 하얀 시랍화(屍蠟化) 현상이 보였다. 시랍(屍蠟ㆍadipocera)은 시신이 밀랍같이 변화하여 부패되지 않고 오랫동안 원형을 지니는 현상을 뜻한다. 김교수는 피부의 시랍을 처음에는 ‘곰팡이’로 판단했다. 그런데 시신을 살피던 김교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시신의 옆구리(복부) 부분이 심하게 부풀어 올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현상일까. 김교수는 일단 이 부풀어 오른 복부 속의 형체가 ‘암 덩어리’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짜릿했다. 수 백 년 전 암으로 사망한 여인에게서 확인될 수 있는 암 덩어리. 만약 그렇다면 ‘암 연구’에 획기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미라의 배가 부풀어 오른 것을 두고 의료진들은 '암덩어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뱃속 태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미라에 대한 X레이와 CT촬영 결과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부풀어오른 복강과 골반강 안에서 태아의 골격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암덩어리가 아니라 뱃속 태아였던 것이다. 게다가 태아는 정상 분만 체위인 두위의 골격이었다. 결국 이 여성은 분만 중에 난산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의료진의 흥분은 하늘을 찔렀다.
“세상에…. 이것이 과연 모자(母子) 미라인가. 우리가 정말 보고 있는 것이 수 백 년 전의 모자 미라란 말인가.” 
임신 중 사망한 모자 미라가 남아있기는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임신 중 사망하는 경우 부패가스가 장기에 차서 태아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아가 그대로 뱃속에 남아있다니…. 흥분, 놀라움 속에 진행 중이던 CT 촬영 결과를 서둘러 확인했다. 그랬더니 X레이 촬영에서 보였던 태아의 모습이 더 확연하게 드러났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MRI(자기공명영상)를 찍어봅시다.”
하지만 제동이 걸렸다. 영상의학과의 반응은 지극히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이집트 미라도 MRI 촬영이 불가능해요. 물기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촬영이 되는데 미라에는 물기가 없으니 촬영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만 둘 수 없었다.
“일단 찍어보죠. 찍고 나서 판단합시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미라에 아직 수분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라 MRI 촬영이 가능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촬영하는 것처럼 속속들이 찍히고 있었다. 의료진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종합적인 검사결과를 풀어보았다. 우선 두개골.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두개골 안에는 공기와 액체, 뇌의 잔여물이 세 층으로 선명했다.
어머니 미라의 몸체와 사지, 피하지방층, 그리고 척추를 포함한 근골격, 흉부 및 복부의 장기들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특히 관심의 초점인 태아는 복강 내에서 확연하게 보였다. 여성인지라 피하지방층은 풍부했다. 다음으로 찬찬히 태아 미라를 관찰했다. 어머니의 복강에는 많은 양의 공기가 있어서 부풀어 오른 자궁의 외연이 쉽게 보였다. 
자궁강에서도 공기가 많아서 태아의 전신윤곽이 선명하게 보였다. 자궁 안에는 만삭 크기의 태아가 정상 분만 체위로 자리 잡고 있었다.
태아의 두개골 안에서도 어머니처럼 공기와 액체, 뇌의 잔여물이 보였다. 태아의 키는 36센티 정도였다.
의료진은 미라의 외음부를 살짝 벌려 보았다.
“그런데 세상에! 태아의 태지(胎脂ㆍ태아의 몸 표면을 싸고 있는, 회백색의 지방과 같은 물질. 양수의 침범을 막는다)와 함께 머리카락이 보이는 것이 아니겠어요?”
때마침 산부인과 전문의가 찾아와 이 산모의 상태를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태아는 ‘분만 2기’로 판정할 수 있네요. 태아의 머리가 모체의 질(膣)의 전장을 통과하여 외음부 가까이까지 도달했으니까….”
자연분만은 의학적으로 1~4기로 나눌 수 있다. 규칙적인 진통이 시작된 후 자궁경부가 완전히 열리게 되는 1기와, 자궁경부가 완전히 열리고 나서 태아가 만출 되기까지의 2기, 태아 만출 후 태반이 나올 때까지의 3기, 태반이 만출까지 이루어진 뒤 분만 후 1시간 동안을 4기로 나눈다.
산부인과 의사는 혀를 끌끌 찼다.
“아! 정말 안타깝네요. 산모가 5분만 참았더라도 아기를 낳았을텐데요.”
여기 누워있는 이 산모는 아기를 낳기 직전에 세상을 떴으며, 아기도 엄마와 함께 세상의 빛을 보기 일보 직전에 죽은 것이었다. 이렇게 비운의 죽음을 당한 산모와 아기였지만 후세에는 엄청난 자료를 안겨준 셈이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대발견이라 할까. 왜냐면 분만 도중에 사망한 산모와 태아 미라가 한꺼번에 확인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일이었으니까요.”

 

MRI 촬영 결과 태아와 태변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5분을 버티지 못하고…
이때부터 이 모자 미라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펼쳐졌다. 자연과학, 의학, 고고학, 국문학, 역사학자들이 총 출동했다.
자연과학과 의학자들이 나섰다. 분만도중에 사망한 이 모자 미라의 직접 사인은 무엇이었을까. 모자 미라에 대한 체질인류학적 계측이 실시되고 부검 및 조직검사가 이어졌다. 부검은 김한겸 교수와 저명한 법의학 전문가인 황적준 교수 등이 나섰다. 우선 미라를 유심히 관찰했다. 산모는 약간 살이 찐 비만형이었고, 영양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치아감정결과 산모는 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가련한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지 못할 산고를 겪고 급기야 사망에 이른 것이다. 여성의 키는 153.5센티미터였다. 이는 20~21살 현대여성의 키(1997년 국민체위조사보고서)인 160.6센티미터에 비해 7센티미터 가량 작은 것이다. 상ㆍ하지의 근육은 손가락으로 누르면 함몰될 정도로 탄력성이 유지돼있었다. 코는 납작하게 가라앉았고, 입술은 가지런히 닫혀있었다. 유방은 전반적으로 가라앉았으나 약간 솟아올랐다. 음모는 유지돼 있는 상태였다.

시신을 둘러싼 각종 습의를 벗기고 있는 모습

연구진은 외음부를 살짝 벌려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로 질 입구에서 태지(Vernix caseosa)에 둘러싸인 태아의 머리와 머리카락이 보이는 것이었다.
태아의 머리카락은 5~6센티미터 정도였다. 산부인과 전문의의 소견대로 산모는 마지막 분만의 순간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이다.
부검의들은 사인과 태아의 성별확인을 위해 제한적인 부검을 시작했다.

“내부 장기들이 모두 얇아지고 줄어들어 마치 복강이 비어있는 듯 했어요. 하지만 내부의 장기들은 모두 확인됐습니다.”
자궁은 복강 우측 부위 전체를 점유하고 있었다. 위(胃) 안에서 30㎎ 정도의 흑갈색 내용물이 확인됐다. 소장에서도 노란색의 소화물이 관찰됐다.
내용물을 분석한 결과 꽃가루와 규조류(珪藻類) 식물이 분명했다. 장 속에서는 식물성 섬유소가 보였다. 채소류가 이 산모의 중요한 음식물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소장과 대장 안, 그리고 관액에서 선충류(線蟲類ㆍ기생충류)의 흔적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대장에서는 약간의 대변도 보였는데, 여기서도 기생충류가 확인됐다. 
“이 역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었어요. 우선 상류사회에 속하는 여성이 음식을 날로 혹은 설 익혀 먹었다는 증거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미라에서 ‘충란(蟲卵)’을 가지고 기생충 감염의 증거를 찾아냈다는 보고가 없었으니까.”
놀라운 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골격근과 심근의 경우 가로무늬(횡문ㆍ橫紋)이 뚜렷하게 관찰됐고, 연골세포도 뛰어났다. 또 있다.   

“위샘세포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확인됐다는 것…. 이 또한 획기적인 발견이지요.”
최첨단 의학이 발전된 지금에도 위샘세포는 너무도 쉽게 가지 융해가 일어나기 때문에 재빨리 고정하지 않으면 관찰하기 어렵다. 의료진은 자궁을 열어 보았다. 자궁벽은 2~3㎜ 정도로 얇아져 있었다. 태아는 좌측으로 비스듬히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태아의 음낭과 음경이 뚜렷한 남자아이였다. 머리는 산도(질)에 진입한 상태였기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네. 단 5분만 참았다면….”  
누구랄 것도 없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자궁벽을 유심히 살피던 중 긴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자궁의 우측 부위에 3×4㎝ 크기로 별 모양의 파열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것은 광범위한 출혈이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자궁벽과 오른쪽 복벽이 흑갈색으로 변색되었고….”
비운의 이 여인은 출산을 단 5분 남기고 그만 자궁파열에 의한 저혈량성 쇼크(실혈사)로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조금만 참았다면 온 가족이 ‘대를 이어줄 사내아이를 낳았다’며 가문의 축복을 받았을 여인이 아니었겠습니까.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죽은 태아도 얼마나 귀여움을 독차지 했겠습니까.”
종합하면 이 20대 여성은 분만 도중에 발생한 자궁파열로 인한 심한 출혈로 인해 저혈량성 쇼크로 사망한 산모였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