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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출생의 비밀'…고려 현종의 부모사랑 깃든 현화사 석등 공개

북한 땅 개성에 현화사라는 절이 있다. 북한의 국보유물(제139호)인 7층석탑으로 유명한 절이다. 이 절은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이 불우하게 타계한 부모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불우하게 돌아간’이라는 사연이 아주 흥미롭다. 이 절을 창건한 현종은 태조 왕건의 여덟번째 아들인 왕욱(王郁·?~996·훗날 안종으로 추존)과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런데 현종의 어머니인 헌정왕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개성 현화사에 있었던 석등. 현화사는 고려 현종의 ‘불우한 부모’를 추념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이 절의 석등이 반출돼 1911년 일본인 골동품상인 곤도가 조선총독부에 팔아넘긴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즉 헌정왕후는 태조 왕건의 아들인 대종(?~969)의 딸인데, 경종(재위 975~981)의 부인(왕비)이기도 했다. 당시 고려 왕실에서 근친끼리의 혼인은 흔했다. 즉 헌정왕후는 사촌지간인 경종의 부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헌정왕후가 남편 경종이 서거한 뒤 배다른 작은 아버지인 안종과 사통해서 현종(재위 1009~1031)을 낳았다는 것이다. <고려사> ‘후비열전’을 보자.

“남편 경종이 훙서하자 헌정왕후는 왕륜사 남쪽의 사택으로 나가 살았다. 일찍이 꿈에 송악산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나라 안에 흘러넘쳐 다 은빛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아들을 낳으시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가지리라’고 하자, 왕후는 ‘내가 과부가 되었는데 어찌 아들을 낳겠느냐’고 했다.”

그런데 이때 안종의 집이 왕후의 거처와 가까왔다. 두 사람이 결국 눈이 맞아 통정했고, 아이까지 임신했다.

“그렇지만 산달이 가까워 와도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다가 992년(성종 11년) 7월…만삭 때 비로소 그 사실이 알려지자 성종은 안종을 유배보냈다. 왕후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목을 놓아 울부짖다가 그 집으로 돌아갔는데 겨우 대문에 닿자마자 태동(胎動)이 있어 대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개성 현화사 석등을 보존처리하고 있는 모습. 고려 현종 부모의 파란만장한 삶이 녹아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에 성종이 유모를 골라 그 아이를 길렀으니 그 이가 바로 현종이다. 현종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어머니를 추존해서 효숙왕태후로 삼고 능을 원릉이라 했다. 현종은 어떤 면에서 불륜에 근친상간까지 더한 아버지(안종·태조 왕건의 아들)와 어머니(왕건의 손녀이자 왕건의 손자인 경종의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임금이었다.

훗날 왕위에 오른(1009년) 현종은 1018년(현종 9년)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인 현화사를 창건했다(<고려사>). 이후 현화사에서는 왕실의 행차와 법회가 열렸다. 현종은 창건 2년 뒤인 1020년(현종 11년) 삼각산 삼천사 주지였던 법경을 초대 현화사 주지로 임명했다. 이때 7층석탑을 만들어 부처의 사리를 공양했다. 그런데 석탑을 만들면서 석등도 함께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석등은 지금 북한에 없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상인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로부터 이 석등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당시 정원을 꾸미기 위해 조선의 폐사지에 놓여있던 탑이나 석등 등을 무단으로 철거해갔다. 이 현화사 석등을 총독부에 판 곤도는 악명높은 자였다. 곤도는 1907년 1월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궁내대신(장관)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1843~1939)가 경천사 10층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해 일본으로 반출한 일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개성 고려박물관에 서있는 현화사 7층석탑. 북한의 국보 문화재이다.   

1907년 1월 순종 황제의 결혼 가례에 일본 정부 특사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한 다나카는 골동품상인 곤도에게 “고종이 허락했으니 경천사탑을 해체 반출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곤도는 이 지시에 따라 높이만 13m에 이르는 섬세한 부조의 걸작 석조유물인 이 대리석 탑을 해체 반출한다. 이때 총칼로 무장한 일본인 120~130명은 만류하는 주민들을 위협하고는 경천사탑을 해체한 뒤 10여 대의 달구지로 실어갔다. 바로 이 곤도라는 자가 현화사 석등 마저 손에 넣었던 것이다.

곤도가 조선총독부에 판 이 석등은 2005년 10월28일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이후 현재 자리에 세워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7년 석등의 전체적인 상태 보강과 각 부재의 강화처리 및 취약부분을 해체해서 3D스캔 촬영 및 보존처리를 진행했다. 이 석등은 고려의 왕실 사찰인 현화사의 명성을 알려주듯 규모가 크고 당당하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은 네 개의 기둥돌로 구성하여 사방이 트여 있으며, 듬직한 지붕돌 위에는 불꽃 모양의 보주 장식이 돋보인다. 현화사 석등은 논산 관촉사, 금강산 묘길상 마애불 앞의 석등 등과 함께 고려 석등 가운데 수준 높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번 낙성식 이후 석등 앞에 함께 배치한 배례석(拜禮石)은 영주 부석사 등에서 보듯이 공양이나 예배를 드리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강삼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사는 “이 배례석의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으나 석등과 함께 배치되던 시설이라는 의미를 살려 현화사 석등 앞에 전시했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해체·복원처리가 완료된 현화사 석등을 지난 17일 원 위치에 설치하고 오는 30일 재설치를 기념하는 낙성식을 개최한다. 낙성식의 하이라이트는 점등식이 될 것이다. 열이 나지 않는 Led전등으로 임시로 불을 밝힌다. 배기동 박물관장은 “불밝힘 의식을 통해 옛 개성 현화사를 밝히던 석등의 모습을 재현하고, 선인들이 이루고자 했던 무명(無明)을 밝히는 석등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