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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포석정의 비밀…경애왕은 '놀자판'이 아니었다.

 

“옛날 견씨(견훤)이 왔을 때는 승냥이나 범을 보는 것 같더니 지금 왕공(왕건)이 이르러서는 마치 부모를 보는 듯 하구나.”(<삼국사기> ‘신라본기·경순왕조’
 931년 3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이 경주를 방문하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감읍한다. <삼국사기>는 이어 “왕건의 부하 군병들은 엄숙하고 조용했으며 어떤 조그만 물건에도 손대지 않았다”고 부연했다. 그렇다면 경순왕이 ‘승냥이나 범’으로 치부한 견훤 때는 어땠는가.
 “견훤이 927년 겨울 11월에 경주에 들이닥쳤다. 견훤은 후궁에 숨어있던 경애왕을 핍박하여 자결케 하고 왕비를 강음(强淫)했다. 부하들은 경애왕의 비첩들을 난통(亂通)했으며 공사의 재물을 노략질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경애왕조’)

경주 포석정. 경애왕이 견훤이 침략하는 사실도 모르고 술판을 벌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견훤·경애왕·왕건·경순왕의 운명
 <삼국사기>는 한 술 더 뜬다.
 “왕(경애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의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적의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놀자판’ 경애왕과 ‘인간말종’ 견훤, 그리고 ‘하늘이 내린 명군’ 왕건, 그리고 그 왕건의 은혜에 감읍하며 천년 사직을 바친 경순왕….
 <삼국사기>의 기록은 절묘한 시나리오를 이루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훤과 경애왕은 망하거나(견훤) 죽을 수 밖에(경애왕) 없었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초한전쟁을 벌인 2200년 전 유방과 항우를 보라.   
 우여곡절 끝에 진(秦)나라 수도 함양을 점령한 유방은 가혹한 진나라의 법령을 모두 폐지한 채 이른바 ‘3장(章)의 법’만을 약정한다. ‘3장의 법’이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이거나 남의 재물을 훔치는 자만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은 모두 폐지했으며, 유방의 군대는 함양의 재물을 절대 탐내지 않았다.
 그러나 뒤늦게 함양에 들이닥친 항우는 진나라 궁실을 3개월 간이나 불태웠고 재화와 보물·아녀자들을 약탈했다.
 또 아버지(진시황)가 세운 강대국 진나라를 즉위 3년 만에 잃은 ‘진 2세 호해’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남겼다. 백성을 핍박하는 아방궁 축조를 말리는 대신들에게 “황제가 귀한 것은 하고 싶은 일을 내 맘대로 하는 것 때문인데 무슨 소리냐”고 호통 쳤다. 사마천은 그런 호해를 두고 “마치 사람의 얼굴로 짐승의 소리를 내는 꼴(人頭畜鳴)”이라고 한탄했다. 

1934년 일제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물 1,2호로 등록하고. 고적 1호로는 경주 포석정을 지정했다. 신라의 망국을 조선의 망국으로 연결짓고,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인식을 불어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백성의 마음을 잡는 자가 천하를 잡는다
 그 예는 최근에도 있었다. 1921년 불과 50여 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이 28년 만에 그 막강한 국민당 정부를 물리치고 중국대륙을 통일했다.
 그런데 이 극적인 성공의 이유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홍군이 추구한 ‘백성 속으로’ 방침이었다. 그러면서 채택한 홍군의 ‘3대 규율’과 ‘8대 사항’은 중국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3대 규율’이란 ①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르며 ②노동자·농민의 것은 무엇 하나 가질 수 없고 ③토호들로부터 빼앗은 것은 공동 소유한다는 것이다.
 ‘8대 사항’은 ①인가를 떠날 때 잠자느라 사용한 문짝을 제자리에 걸어 놓는다 ②잠잘 때 사용한 짚단은 묶어서 제자리에 놓는다 ③인민에게 예의바르고 정중하게 대하며 가능한 한 무슨 일이고 도와준다 ④빌어 쓴 물건은 되돌려 준다 ⑤파손된 물건은 모두 바꾸어 준다 ⑥농민과의 거래는 정직하게 한다 ⑦구매한 모든 물건은 값을 지불한다 ⑧위생에 신경 쓰고 변소는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운다는 등의 내용이다.
 사실 얼마나 사소한 규칙인가.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백성을 불편하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니 말이다.
 “천자의 마음에 들면 제후 노릇밖에 못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잡으면 천자가 된다”는 옛말은 전적으로 옳다.

 

 ■경애왕은 한겨울에 놀자판을 벌였나
 그러나 하나 더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경애왕과 견훤은 패배자였고 왕건은 승리자였단 말이다. 만약 왕건이 패했다면 역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건을 ‘인간말종’으로 몰아붙였을 터이다.
 ‘역사=승자의 기록’임을 감안하고 하나 돌이켜보자. 과연 경애왕은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흥청망청 연회를 즐기다가 견훤의 침략을 맞아 속수무책으로 능욕을 당했을까.
 포석정은 과연 연회장이었을까.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놀자판’을 벌였던 포석정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사적 1호’의 이름을 붙였을까.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한가지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경애왕이 927년 11월(음력)에 견훤이 쳐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였다”는 바로 그 대목이다.
 이미 두 달 전인 음력 9월에 이미 견훤이 경주 인근인 영주까지 쳐들어오자 왕건에게 급히 원군을 청했던 터였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점. 아무리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경애왕이 몰상식한 술판을 벌였을까. 게다가 한겨울(음력 11월)인데 노천에서 여흥을 즐겼을까. 

 

 ■포석정은 놀이터인가
 사실 포석정은 지금까지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유배거유적(流盃渠遺蹟)이라고 해석돼왔다.
 유상곡수연의 원류는 중국에 있다.
 353년 3월3일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현의 후이치(會稽)산 북쪽에 난정(蘭亭)이란 정자에 당대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 등 명사 41인이 모였다.
 그들은 개울물에 몸을 깨끗이 목욕하고 모임의 뜻을 하늘에 알리는 의식을 행하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했다.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 하였고, 이때 읊은 시를 모아 서문을 왕희지가 썼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난정회기(蘭亭會記)>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왕궁에 유배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바로 잔을 띄우면 흘러 돌아오도록 한 시설을 말한다.
 경주의 포석정 포석이 바로 왕희지 등의 유상곡수연과 중국 왕궁의 유배거 시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창조해낸 신라 특유의 독특한 시설이라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결국 이러한 시설은 왕족이나 귀족층의 놀이 시설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돼왔다. 이렇다보니 결국 놀이만 즐기다가 나라가 망한 꼴이었다는 결론이 가능했던 것이다.

 

 ■경애왕이 포석정에 간 진짜 이유
 포석정은 과연 왕실의 놀이터였을까.
 <화랑세기>를 보면 포석사(鮑石祠), 또는 줄여서 말하는 포사(鮑祠)라는 대목이 나온다. 과연 포석정과 포석사(혹은 포사)는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포석사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祠堂) 또는 묘(廟)라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이 포석사에 삼한을 통합한 후 사기(士氣)의 종주로 받들어진 문노(文弩)의 초상화를 모셨다고 한다. 화랑 중의 화랑으로 추앙받는 문노는 제8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재임 579~582)였다. 그런 문노의 화상이 포석사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또한 문노와 그 부인이 된 윤공이 그 포석사에서 결혼했다. 당시의 임금인 진평왕이 그 혼례식에 참석했다.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혼인식이 열린 곳도 포석사였다. 포석정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나아가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안고 있다.
 포석정이 자리 잡고 있는 경주 배동 주변에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와 관계있는 나정(蘿井)과 천관사(天官寺)·천은사(天恩寺) 등의 유적이름에서 확인되듯 무언가 신성한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신궁이 설치된 장소도 월성(月城)의 남쪽으로 기록돼 있는데, 도당산(都堂山)을 거점으로 한 그 주변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유사>를 보면 박혁거세가 최초로 궁실을 조영한 장소도 이 일대였다. 박씨의 능이 모두 이 일대에 집중돼있다는 점은 박씨가 이곳을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경애왕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술판을 벌이려, 그것도 한겨울에 노천인 포석정으로 간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란에 빠진 나라의 안녕을 간절히 빌기 위해 왕실과 귀족들을 동원해서 포석사로 간 것이었다. 거기서 간절히 1000년 사직의 유지를 빌다가 그만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해석해야 자연스럽게 풀린다.

 

 ■포석정 사적 1호가 되다
 여기서 일제가 왜 포석정을 사적 1호로 지정했는 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찾아보자.
 일제는 1934년 8월27일 <관보>를 통해 조선의 보물 문화재를 지정한다. 국보라 하지 않았다. 내지(일본 본토)가 아닌 식민지의 문화재였기에 보물이라 한 것이다. 내선일체를 부르짖었기에 일본의 국보는 식민지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었다. 국권을 상실한 조선의 국보는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보물 1호 남대문, 2호 동대문, 사적 1호 포석정 등이 등록됐다. 왜 남대문 동대문 포석정이 우선순위로 꼽혔을까.
 분명했다. 남대문(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빠져나온 문이었다. 동대문 역시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한 문이었다. 그러니까 남대문과 동대문은 조선의 기념물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일본의 전승기념물로 문화재 등록이 된 것이었다.
 포석정 역시 ‘신라의 망국=조선의 망국’으로 여기려는 일제의 숨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적이 쳐들어왔는 데도 흥청망청 놀았던 신라망국의 상징’을 사적 1호로 삼은 것…. 그러니까 ‘너희들은 결국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식의 패배주의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