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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허리 21.5인치, 8등신 소녀가 죽은 까닭

‘나이 16살, 키 152.3㎝, 허리 21.5인치.’
지난 2006년 11월 29일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 이곳에서 여성의 인골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됐다. 무덤의 주인을 따라 순장(殉葬)된 비운의 여성이었다. 고고학·법의학·인류학·생물학·해부학 등 각계 전문가가 모였다.
 

첨단과학으로 복원한 송현이

■ 21.5인치 개미허리 소녀
 
이들은 온갖 첨단과학을 동원, 여성의 몸을 복원했다. 겨우 16살의 소녀였다. 키도 현대의 16살 소녀(159.6㎝·2004년 기준)에 비해 6㎝ 이상 작았다. 하지만 복원된 소녀의 몸매는 요즘 여성들을 경악시켰다.

먼저 소녀의 허리둘레. 요즘 그 나이 또래의 허리(26.2인치)보다 무려 5인치나 가는 21.5인치였다. 가히 ‘개미허리’, ‘모래시계’였다.

소녀는 8등신 미녀였다. 신장을 머리길이(19.3㎝)로 나눠보니 7.94등신이었다. 요즘 여성들의 ‘로망’이었던 것이다. 조사단은 이 소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법의학 측면에서 소녀를 관찰하니 흥미로운 사실을 더 발견했다. 정강이뼈와 좌우 종아리뼈에서 비정상적인 뼈가 툭 튀어나온 것이다. 이것은 소녀가 반복적으로 무릎을 꿇고 뭔가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두말할 것도 없다. 이 가녀린 소녀는 주인을 뼈가 빠지도록 섬기다가 주인의 사망과 함께 순장됐던 가여운 신세였던 것이다.  
 

■ 비참한 순장의 역사
 
비단 ‘송현이’ 뿐이 아니었다.

부여는 “사람을 죽여 100여 명까지 순장시켰다.(殺人殉葬 多者百數·<삼국지>·위서 동이전>)
또 고구려에서는 “248년, 왕(동천왕)이 죽자 새 왕(중천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무덤에 와서 따라죽는 이가 많았다(至墓自死者甚多)”(<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순장제도는 502년(신라 지증왕 3년)이 되서야 폐지됐다.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는데, 이를 폐지했다(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삼국사기>·신라본기)는 것이다.
사람을 생으로 죽이는 행위는 예로부터 두 가지로 나뉘었다. 짐승과 함께 사람을 제사 지내는 ‘인생(人牲)’과 죽은 자와 함께 묻는 ‘인순(人殉·순장)’이었다.
은(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 때 점(占)을 친 내용을 귀갑(거북)에 기록한 글(갑골문)을 보자.
“당·대갑·대정·조을에게 제사 지내려는데 강인 100명과 양 100마리를 올릴까요?(御自唐大甲大丁祖乙百羌 百宰)”
당·대갑·대정·조을은 모두 은(상)나라 왕의 조상들이다. 강인(羌人)은 중국 서북쪽에 살던 유목민들이었다.
은(상)나라는 주변 이민족과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벌였다. 그러면서 사로잡은 전쟁포로들을 노예로 활용하다가 제사가 있는 날이면 그들을 죽여 제물로 바친 것이다. 문제의 갑골문은 점을 치면서 조상들을 위한 제사에 양 100마리는 물론 강족 사람 100명을 제물로 바칠 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은(상)시절 사람의 머리가 담긴 그릇. 사람제사의 증거이다

■ “백인으로 바칠까요”
 
피부가 하얀 사람이거나 아예 백인들이 제물로 ‘애용’됐다. 은(상)나라 때 정인(貞人·점을 친 관리)이 점을 친 뒤 그 내용을 새긴 갑골을 보자.

“오늘 저녁 무정왕(기원전 1250~1192년)을 위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 때 피부가 하얀 강족3명을 제물로 올릴까요?(唯今夕用三白羌于丁)
“백인으로 요제(제사의 일종)를 지낼까요?(燎白人)”
 
그래서일까. <예기>·‘단궁 상(檀弓 上)’은 “은(상)나라 사람들은 흰색을 중시했다(殷人尙白)”고 했다. 그런데 흰색을 사랑했던 전통은 은나라의 역법과 제사를 그대로 따라했던 부여까지 이어졌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등을 보면 그 내용이 나온다.

“부여의 땅은 동이의 땅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다. 부여는 은나라 정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것이 가장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을 먹고, 춤을 춘다.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또한 나라의 복색으로 흰색을 숭상했다. 흰옷에 넓은 소매 도포와 바지가 있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在國衣尙白 白衣大袂)”  
부여가 은(상)의 달력을 써서 제사를 올리고, 은(상)의 색깔인 흰색을 숭상했다? 심상치않은 일이다. 역법(曆法)은 왕권국가의 상징이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역법을 바꿔 ‘하늘의 뜻’에 따라 정권이 교체됐음을 알리는 것이 전통이었다. 

또한 나라의 국색(國色)을 바꾸는 것도 범상치 않은 일 이다. 오행(五行)에서 말하는 상극(相剋)의 원리에 따라 숭상하는 색을 정하는 일은 옛 왕조를 제압한다는 심오한 뜻도 담고 있다. 색을 바꾸면 관복도 바꿀 뿐 아니라 나라에사 사용하는 모든 기물, 즉 마차와 제사에 쓰는 제기 등을 바꾼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에 검토할 기회가 있겠지만 부여는 은(상)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은(상)과 부여는 같은 동이족이니까.
 

 

은(상)시절 사람제사를 지낸 뒤 머리만을 거두어 모아두었다. 1976년 은(상)말기 도읍인 인쉬(殷墟)에서 발견된 191기의 제사구덩이에서는 무려 1178명의 희생자가 쏟아져 나왔다.

■ 가축과 다름없는 신세 
 
어떻든 갑골문에 따르면 은(상)나라 후기(기원전 1300~1046) 273년간 최소한 1만4197명이 사람제사 혹은 순장으로 희생당했다. 1976년 은(상)말기 도읍인 인쉬(殷墟)에서 발견된 191기의 제사구덩이에서는 무려 1178명의 희생자가 쏟아져 나왔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목 잘린 청장년이었다. 불쌍한 여성과 어린아이들의 유골도 있었다.  

무정왕의 부인인 부호(婦好)의 묘에서는 개와 사람이 함께 순장된 채 발견됐다. 사람이 가축과 다름없는 신세였던 것이다. 청년 노예임이 분명한 인골 가운데는 머리와 허리가 잔인하게 잘린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순장 직전에 저항하다가 무참하게 살해돼 순장된 것이다.


동양 뿐이 아니었다. 서양에서도 기원전 97년 로마 원로원은 사람제사를 법률로 금지했다. 또 1487년 멕시코 아즈텍 테노츠티틀란 보수공사 과정에서 나흘간 죄수와 노역자 8만400명이 학살된 기록도 있다. 보수한 건축물의 안정을 위한 이벤트라나 뭐라나.

사람 제사와 순장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반인간적인 행위라는 지탄을 받을 만 하다. 하지만 당대에는 보편적인 풍습이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강족 100명과 양 100마리를 제사 지낼 것을 묻는 갑골.(출처:<갑골문자전 겸 갑골문 해독>, 양동숙 저, 서예문인당, 2005)

■ 첨단과학으로 부활한 송현이
 
생사람을 제물로 바치거나, 무덤에 밀어넣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전지전능한 하늘신과 조상제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던 시대였다. 노예제도가 성립되던 과정에서 신권사회가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순장 또한 무덤 주인의 삶이 사후에도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행된 풍습이었다.

그러나 1500년 만에 홀연히 나타난 16살 소녀 ‘송현이’를 보자. 영원불멸을 꿈꿨던 무덤주인을 사후 삶을 위해 가녀린 소녀는 그만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나 웬걸. 죽어서도 살기를 원했던 무덤 주인의 몸은 발견되지 않았다. 도굴꾼의 발길에 의해 산산조각 났는지, 뼈의 흔적만 살짝 남아있을 뿐이었다. 반면 완전한 상태의 인골로 
남은 송현이는 첨단과학의 힘을 빌려 부활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겸 문화체육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