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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황태자 금관' '기생 금관'…서봉총 금관

 “마-블러스!(경이롭구나!)”
 1926년 10월 10일 경주 노서동의 고분 발굴장에서 이국(異國)의 감탄사가 터졌다.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재위 1950~73)였다. 일제는 당시 일본을 방문 중이던 황태자 부부를 위해 이벤트를 펼치고 있었다. 마침 경주에서 봉황이 장식된 금관이 발견된 것에 착안했다. 일제는 유물 일체를 노출시켜 놓고 황태자 부부에게 발굴의 피날레를 장식하도록 한 것이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북유럽·그리스·로마의 고분을 발굴한 경험이 있던 고고학자였다. 경주를 방문한 황태자는 일제가 반쯤 노출해놓은 금제 허리띠와 금제 장식 등을 조심스레 수습했다. 발굴단의 마지막 한마디가 황태자를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이 금관을 전하께서 수습해주시옵소서.”
 황태자가 금관을 들어올리자 환성과 박수가 터졌다. 일제는 스웨덴의 한문명칭인 서전(瑞典)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서봉총’이라 이름 붙였다. 이 서봉총 금관은 10년 뒤인 1935년 9월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다.
 당시 평양박물관은 경성박물관으로부터 대여받은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을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다. 전시회가 끝난 뒤 뒷풀이 연회가 펼쳐졌다. 내로라하는 평양기생들도 총출동했다. 이 때 사고가 터진다. 술판이 한창 벌어졌을 무렵, 서봉총 금관을 차릉파(車綾波)라는 기생의 머리에 씌운 것이다. 금제 허리띠와 금 귀고리, 금목걸이까지 휘감았다. 당시 평양박물관장은 서봉총 발굴에도 참여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였다. 기생 차릉파가 경순왕(56대)에 이어 신라 제57대 왕으로 등극한 것이 아닌가. 이 사건은 이듬해인 1936년 6월 뒤늦게 폭로된다. 차릉파는 기생재벌의 반열에 오를만큼 유명세를 탄다. 이효석의 일본어 작품인 <은은한 빛(ほのかな ひかり)>”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숱한 화제를 뿌린 서봉총의 발굴보고서가 90년 남짓만에 출간됐다고 한다. 발굴 당시의 금관과 다른 모양이라는게 밝혀졌단다. 기생 차릉파에게 금관을 씌우는 과정에서 훼손됐을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연회에 참석한 일본인들이 신라금관을 쓴 기생을 ‘신라 여왕’이라 여기고 마음껏 농락하지 않았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더 언짢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