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모기향 고분’이 아니다…‘황금새다리’는 왜 초라한 무덤에서 나타났나

이기환기자 2023. 11. 29. 17:35

일제강점기 일인학자들이 혈안이 되어 파헤친 지역이 있다. 가야고분이 집중되어 있던 영남 지방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조선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 반드시 그 근거를 이곳(영남의 가야고분)에서 찾아낼 것”(<매일신보> 1915년 7월24일자)이라는 일인학자 구로이타 가쯔미(㎘)의 큰소리에 그 이유가 나와있다.
그러나 막상 마구잡이로 파헤친 고분 및 산성 중에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증거’는 털끝만큼도 찾아내지 못했다. 
구로이타는 결국 “막상 임나일본부라고 해도 조사하면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임나일본부 추정할만 하나, 그 자취는 이미 사라져서 이것을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게 유감”이라고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돌아오지 못한 부부총 유물
그중 대표적인 고분이 1920년 11월 조사된 경남 양산 부부총(북정리 10호분)이다. 고분의 출토품은 휘황찬란했다. 관과 관모, 신발 등 금동 유물과, 금은동제 팔찌,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관모, 관장식 등 489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특히 금동관이 주목을 끌었다. 10개월 뒤인 1921년 9월 사상 처음으로 발굴된 경주 금관총의 ‘금관’과 마치 쌍둥이처럼 유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재질, 즉 금동관(양산 부부총)과 금관(금관총)이라는 것만이 달랐다. 
또 자작나무 껍질 관모와 둥근고리큰칼 같은 장신구와 말갖춤새도 경주 왕릉(금관총 등)의 출토품과 다르지 않다. 다만 신라 중앙(왕·왕귀족)과 지방(호족)세력간의 신분차 만이 엿보일 뿐이다. 
일제는 이 부부총 유물을 가만두지 않는다. 1938년 출토 유물(489점)을 몽땅 일본 도쿄(東京)제실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으로 반출한다. 그런데 이 부부총 유물 489점은 1965년 한·일 수교에 따라 반환된 문화재(1432점)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 이유가 1965년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작성한 ‘한일회담 문화재 관계 참고집’에 등장한다.
즉 “부부총 유물을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내 한국실에 진열하겠다”는 일본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포기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런데 앞뒤에 구구절절 써놓은 해명이 가관이다.
‘일본에 양보한 양산 부부총 유물 489점 중 작은 구슬류가 250점. 점수에 연연해서는 안됨.’
‘우리나라에 이보다 우수한 유품(금관총·서봉총·금령총)이 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음.”
누가 점수에 연연했다는 말인가. 또 금관 아닌 금동관이라 내줘도 괜찮다는 말인가. 부부총 금동관은 금관총보다 10개월 앞서 출토된 의미있는 유물이다. 대체 대한민국 정부의 해명인지, 일본 정부의 강변인지 헷갈릴 정도다.

 

■수상한 돌무더기
양산 부부총 유물의 귀환은 그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좌절된다.
다만 부부총이 발굴된 양산 북정리와, 이웃 신기리 고분군은 1963년 사적으로 지정·보호되었다.
그러나 개발붐이 어김없이 양산에도 불어닥쳤다. 1989년 말 택지조성계획을 세운 토지 소유주들이 ‘이미 도굴로 인해 훼손된 토지 일부를 사적 범위에서 풀어달라’는 민원을 강하게 제기했다. 결국 이 민원이 받아들여졌다. 
문화재 조사 후 풀어줄 곳은 풀어준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급기야 1990년 4월13일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정리 고분군의 조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7월말부터 이웃한 신기리고분군으로 막 옮겨갈 참이었다. 그때까지 별다른 발굴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조사단(동아대박물관)의 눈에 유독 밟히는 지점이 있었다. 
부부총에서 서남쪽 20m 떨어진 곳에 쌓여있는 조그마한 돌무더기였다. 그러나 주변은 근대의 민묘가 둘러싸여 있었다. 특히나 그 돌무더기는 한 민묘의 축대에 걸려 있었다. 그러니 민묘를 쌓은 뒤 남은 것을 모아둔 돌무더기로 다들 여겼다. 
그러나 그대로 ‘발굴 끝’을 외치면 이 돌무지는 중장비의 삽날에 찍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판이었다. 발굴단은 왠지 찜찜했다. 발굴단장은 당시 동아대박물관 조교(나동욱 전 부산박물관장)에게 “자네가 한번 발굴해보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혼자 땡볕 아래 비오듯 땀을 흘리면서 삽과 호미질, 곡괭이질을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죠.”

 

그러던 어느 날 돌무더기 서쪽 끝에서 유의미한 유구가 걸렸다. 무덤 돌방의 모서리가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노출된 고분은 작은 돌방에 뚜껑돌이 내려앉은 채 틈 사이로 들어온 암갈색 흙이 반쯤 채워진 상태였다.
“첫눈에 실망감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도굴분 같아서 유물이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뙤약볕에서 생고생한 것을 떠오르자 오기가 솟아올랐다. 깨진 도기편이라도 건지자는 마음이 생겼다. 과연 목긴항아리 한 점이 동쪽으로 넘어진 채로 출토됐다. 더 파내려가자 매끈매끈한 은제 허리띠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계급장 따먹기 하던 때의 철판 같이 너무 생생해서 유물인지 선뜻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시작에 불과했다. 잠시 후 갑자기 누런 황금빛의 둥근 원형체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금동관 조각이었다.
“갑자기 숨이 멎는 듯 했습니다. 가슴이 콩당콩당 뛰기 시작했습니다.”

양산 부부총 유물 489점은 1938년 일본으로 반출된 뒤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65년 한일 국교수립 때 귀환한 1432점의 유물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이때 ‘일본에 양보한 양산 부부총 유물 중 구슬류가 250점에 달하며 우리나라에 이보다 우수한 유품이 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고 해명했다.


■출토품 6건이 무더기로 보물 지정
그저 모아둔 돌무더기로 치부되었던, 그래서 도굴의 화를 피할 수 있었던 신라 지방세력의 고분이 현현하는 순간이었다. 
이 고분 역시 양산 부부총 등 인근의 무덤양식과 같은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이다. 돌로 무덤방을 만든 뒤 한쪽을 터서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무덤의 구조이다. 이런 무덤구조에서 도굴꾼이 침입하면 끝장이다. 방안에 들어있는 유물을 몽땅 쓸어갈 수 있다. 그러나 도굴을 피했다면 어떨까. 무덤 안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다. 
박물관 조교가 발견한 ‘도굴없이 싱싱한 고분’이 바로 그랬다. 고분은 소규모(무덤방 길이 280㎝×폭 100㎝×높이 1m)였다.그러나 그 속에 든 유물의 수준과 상태는 상상을 초월했다.
금제 새다리 한 쌍과, ‘출(出)’자 금동관, 금제 굵은고리귀고리 2쌍(4점), 금제팔찌 한쌍이 우선 눈에 띄었다. 청동제 자루솥과 은제 허리띠 장식, 은제 장도 장식집과 철제가위, 곡옥과 구슬옥, 금실 등도 보였다. 총 출토유물은 24건 159점에 달했다. 이중 새다리·굵은고리귀고리(2쌍)·팔찌(한쌍)·청동 자루솥·은제 허리띠 장식 등 6건이 한꺼번에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모기향 무덤이냐” 농담했다
그런데 이 고분의 ‘시그니처’ 유물이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금제 새다리’다.
새다리는 길이 2.8㎝,에 발가락 길이 0.6㎝ 정도되는 아주 작은 금제유물이다. 그러나 국내 고분에서 이런 ‘새다리’ 유물이 이 고분에서 처음 출토되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이 고분에 ‘금조총(金鳥塚)’이라 했다.
사실 이름이 맞지는 않는다. ‘새다리’라면 ‘조족(鳥足)’이고 황금으로 제작되었으니 원칙적으로는 ‘금조족총’이라야 옳다.
아마도 ‘금조족총’이라는 명칭의 어감이 좋지 않으니 ‘황금새’ 무덤이라는 의미로 ‘금조총’이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금조총’ 명칭 때문에 한때 일본 학자들이 짓궂은 농담을 걸었단다.(김재현 동아대교수) 
왜냐면 일본에서 ‘긴초(금조·金鳥)’는 유명한 ‘모기향’ 상표 이름이기 때문이다. 일본판 ‘F킬러’ 같은 상표라는 것이다. 
따라서 ‘금조총’ 명칭을 두고 일본에서는 “모기향 고분이 발견되었다는 거냐”고 우스갯소리를 주고 받았단다.


■무덤 속에서 웬 ‘새다리’?
각설하고, 이 순금제 새다리는 학다리처럼 중간이 앞으로 굴곡지게 만들었다. 
발가락이 4개가 벌어진 형태로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표현되었다. 
다리 위는 납작한 일그러진 원형에 3개의 구멍이 삼각형을 그리듯 둥글게 뚫어져 있다. 
이 구멍을 통해 새의 몸통과 금제 다리를 연결했을 것이다. 새의 몸통은 보이지 않았다. 몸통과 연결 못은 아마도 나무와 같은 다른 재질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썩어 없어진…. 그렇다면 나무 몸통에, 순금제 새를 붙인 그런 새의 형상이었을까.
그러나 왜 몸통 따로, 다리 따로 재질을 달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왜 새 형상의 조형물을 무덤속에 넣었을까. 여기서부터는 상상의 영역이다. 연구자들은 이 대목에서 <삼국지> ‘위서·동이전·변진조’)를 인용한다.
“변진 사람들은 장례에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데, 이는 죽은 자가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새는 예부터 하늘세계와 지상세계를 연결해주는 영매로 여겨졌다. 따라서 금조총 출토 새다리는 무덤 주인공의 영혼을 하늘세계로 연결하는 극락조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신라3대 명품귀고리
금조총에서 확인된 으뜸 유물 중 하나가 ‘금동관’이다. 나뭇가지(出자형·3개) 및 사슴뿔(2개) 모양인 세움장식을 갖춘 금동관은 전형적인 신라관이다. 불과 20m 떨어져 있는 부부총의 금동관(5세기말)과 시기차(금조총은 6세기초)만 있을뿐 양식은 똑같다. 신라중앙정부가 양산 지역의 최고실력자에게 내린 사여물로 판단된다. 
금조총 출토 유물 중 또하나의 명품은 중심고리에 금알갱이를 붙여 장식한 금제 귀고리일 것이다.   
귀고리에 알알이 붙여넣은 수백개의 금알갱이를 보라. 지름 0.6~1.2㎜ 정도에 불과한 알갱이를 그토록 정성스럽게 붙여놓았다. 그 엄청난 끈기와 집중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 빼어난 디자인 감각은 또 어떤가. 그래서일까. 
금조총 출토 ‘금알갱이 장식 귀고리’는 경주 보문동(1915) 및 황오동 출토품(1949)과 함께 ‘신라 3대 명품 귀고리’로 꼽힌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한결같이 보물급 유물이었다
또 한 쌍의 금제귀고리도 보물로 지정됐다. 중심고리와 노는고리의 표면은 장식이 없어 심플하지만 중간장식과 드리개에는 역시 금알갱이로 표현한 명품 귀고리이다. 또한 금제팔찌(보물)는 무덤의 주인공이 여성임을 짐작케한다. 안쪽 지름이 6.5㎝에 불과한데, 성인 남성의 손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이 팔찌는 사각형의 금판을 둥글게 휘어 주조했다.
이러한 팔찌가 천마총·부부총·창녕 계성 등에서도 보인다. 6세기초 신라에서 대유행한 디자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춢 
무덤 주인공의 배(복부) 부근에서 수습된 ‘허리띠’ 장식은 띠고리(1점)·띠꾸미개(30점)·띠끝장식(1점) 등이었다. 
이중 띠꾸미개(30점)는 박물관 조교가 ‘계급장 따먹기’를 연상한 바로 그 철판이었다.
이밖에 액체나 음식을 끓이거나 데우는데 사용된 용기인 청동제 자루솥(보물)이 확인됐다. 
또 금제 구슬(지름 0.9㎝) 52개와 상감구슬 1점, 굽은옥 2점이 무덤 주인공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이런 장식구는 경주·창녕·양산 등지에서 출토되는 관(冠)이나 모자 장신구, 목걸이나 귀고리의 드리개로 쓰인다.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에 참고해볼만한 자료가 나온다.
“그들은 구슬을 보배로 삼고, 이 구슬을 옷에 장식하기도 하고….”
금조총의 장신구는 무덤 주인공의 옷이나, 주인공을 덮었던 이불과 같은 것에 매달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금동관을 썼으면서 초라한 곳에 묻힌 여인은? 
그렇다면 금조총의 주인공은 과연 어떤 신분의, 누구일까. 
앞서 실마리를 던졌듯이 팔찌의 안지름(6.5㎝)으로 미루어 보면 주인공은 여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 여성의 지표유물인 굵은고리귀고리와 자루솥, 가위, 작은칼 등이 출토됐다. 남성의 무덤에서 흔히 확인되는 무구(전쟁에 쓰이는 도구)와 말갖춤새 등이 보이지 않았다.(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장)
그럼 ‘무덤 주인공=여성’으로 상정해보자. 무덤 속 유물로 미뤄봤을 때 이 여성의 신분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제 금동관은 물론 당대 최고명품 귀고리와 팔찌, 허리띠 등을 착장한 인물이 아닌가.
그러나 한가지 해석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그런 높은 신분의 여인이 왜 양산지역 실력자들의 무덤이 모인 북정동·신기리 고분군 중에서 가장 초라한 곳에 겨우 둥지를 틀었을까. 1990년까지 누구도 고분의 존재를 몰랐을만큼…. 
금조총보다 20m 정도 위, 양지바른 곳에 대규모(길이 5.4m×너비 2.2m×높이 2.5m)에 조성한 부부총과는 어떤 관계인가.
사실 이와 같은 의문점을 풀어줄 사료가 없다. 


■박제상 혹은 김서현의 후예?
우선 조사된 고분 가운데 가장 위상이 높은 부부총(5세기말 조성)의 주인공부터 상상해보자. 
그런데 양산은 신라의 충신인 박제상과, 김유신(595~673)의 아버지인 김서현(생몰년 미상)의 고향으로 알려져있다. 
삽량주(양산)의 간(干·지도자)였던 박제상(369~419)은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있던 눌지왕의 두 동생(복호·미사흔)을 구한 뒤 장렬하게 순국한 충신이다. 진평왕(579~632) 시대에 활약한 김서현은 삼한통일의 일등공신이다.
사실 부부총의 조성연대가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기에 박제상이나 김서현(생몰년 미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것 같다.하지만 부부총 근처에는 김서현과 만명부인(574~?)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부부총은 박제상이나 김서현 본인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가문과 관련이 있는 고분이 아닐까. 
그렇다면 부부총보다 약 30년 정도 늦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조총의 여인은 누구일까.

‘금조총’ 명칭 때문에 한때 일본 학자들이 짓궂은 농담을 걸었다. 일본에서 ‘긴초(금조·金鳥)’는 유명한 ‘모기향’ 상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조총’ 명칭을 두고 일본에서는 “모기향 고분이 발견되었다는 거냐”고 우스갯소리를 주고 받았단다.


■지체높은 경주여인이 왜? 
온갖 호사를 부린 부부총 바로 밑에, 혹여 누가 보면 안된다는 듯이 초라한 무덤에 묻혀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외양은 그렇게 보잘것 없이 만들어 놓고는 정작 내부에는 경주산 명품을 아낌없이 넣어 죽은 여인의 넋을 위로해주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금조총 여인이 부부총에 묻힌 남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 사이였을까. 이를테면 30여년 전에 죽은 남편의 후처 같은…. 어떤 경우든 경주의 지체높은 왕·귀족 출신 여인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모종의 정치적인 사연 때문에 초라한 무덤에 장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타고난 여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그럴듯한 견해도 제기된다.
그러나 좀체 정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금 양산시립박물관이 12월7일까지 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행사로 ‘금조총 이야기’ 특별 기획전을 열고 있다.
다른 유물보다 국내에서 유일무이하다는 ‘금제 새다리’, 즉 ‘금제조족’은 꼭 한번 보고싶다. 더불어 이 고분의 이름을 ‘금조총’이 아니라 ‘금조족총’으로 바꾸는 것은 어떤가. 고분의 성격을 명확하게 하려면 ‘금조족총’이 맞기는 한데, 어쩐지 어감은 그저그렇다.(이 기사를 위해 이한상 대전대 교수, 김재현 동아대 교수, 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장, 나동욱 영남성곽연구소장, 박창열 동아대 석당박물관 팀장 이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

<참고자료>
동아대박물관, <양산 금조총·부부총>(고고조사보고 19책), 1991
동아대석당박물관, <금조총(금동관을 쓴 여인 황금새와 묻히다)>(개교 71주년 특별전 도록), 2017
이한상, ‘금조총 금속공예품의 특징과 의의’, <금조총>(특별전 도록), 동아대석당박물관, 2017
나동욱, ‘나의 금조총 발굴이야기’, <금조총>(특별전 도록), 동아대석당박물관,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