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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똥!덩!어!리!’...박제가는 왜 ‘중국어공용론’까지 설파했을까

이기환기자 2023. 12. 28. 09:00

‘대련(對聯)’이라는 서예의 형식이 있습니다. 새해 맞이나 집안의 경조사, 장수축하 등을 알리는 글귀를 한 쌍으로 만들어 문기둥이나 문짝에 붙이는 것을 뜻합니다. 중국에서는 명·청 시대를 거치면서 대중화했답니다.

조선의 ‘대련’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작품이 유명하죠.

이 ‘대련’을 조선에 처음 도입한 이가 바로 초정 박제가(1750~1805)로 알려져 있는데요.

초정은 북학파 실학자로 유명하지만 뛰어난 문장가이자 시·서·화로도 명성을 떨친 분입니다.

하지만 정작 초정이 도입했다는 ‘대련’ 글씨는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첫 공개된 ‘박차수=박제가’의 서예

그런데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가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개인 소장)을 저에게 보여주었는데요.

그것은 박제가의 직함과 이름, 그리고 낙관이 선명하게 찍혀있는 ‘대련’ 글씨였습니다.

해행서(행서와 해서가 섞인 글씨)로 된 ‘장량·가의’ 대련입니다.

‘일찍이 장량이 처자와 함께 웃고(嘗笑張良如處子). 감히 가의를 선비라 한다(敢言賈誼是書生)’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곁에는 ‘조선 군기시 정 겸 내각검서 박제가(朝鮮 軍器寺正 兼 內閣檢書 朴齊家)’라 썼고요. 그 밑에는 ‘자왈차수(字曰次修·자는 차수다)’로 읽히는 낙관이 보이는데요. ‘박제가의 자(字·다른 이름)’가 ‘차수’입니다.

 

이 작품은 청나라 문학가인 장사전(1725~1785)의 시에서 따왔습니다.

장량(?~기원전 186)은 기원전 218년 진시황을 철퇴로 습격한 인물이죠. 훗날 한고조 유방(재위 기원전 202~기원전 195)의 책사로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었고요. 한나라 건국 후 홀연히 은퇴한 뒤 신선처럼 살았다죠.

가의(기원전 200~기원전 168)는 한나라의 율령과 관제·예약 등 제도를 정비한 인물인데요. 훗날 조정의 시기와 모함 때문에 좌천되었는데요. 이때 초나라 애국시인 굴원(기원전 340~기원전 278)에 빗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글과 시로 읊었답니다. 아마 청나라인이 박제가에게 당대 유명한 문학가인 장사전의 싯구를 써주십사 했던 것 같아요.

 

■비정규직에게 내린 정3품의 임시벼슬

이 대련 작품을 쓴 박제가의 직함이 ‘군시기 정 겸 내각 검서’로 표현되어 있죠. 그때가 1790년이었는데요.

박제가는 5월27일 청나라 건륭제(재위 1735~1796)의 팔순절에 파견된 사은사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데요.(10월) 그런데 정조에게 귀국보고 하는 자리에서 다시 ‘청나라 방문’을 ‘명’ 받습니다.(10월24일)

정조가 “청나라 황제가 조선의 원자(순조) 탄생을 축하해줬다”는 보고에 반색한 겁니다. 정조는 “황제의 축하를 그냥 넘길 수 없다”면서 막 돌아온 박제가에게 “자네가 한번 더 다녀오라”는 명을 내린 거죠.

정조는 그러면서 규장각 검서관(임시직·5~9품)이던 박제가에게 ‘군기시 정’(정3품) 벼슬을 임시로 얹어준 겁니다.

 

물론 외교사절로 파견되는 박제가이니만큼 그에 걸맞은 벼슬을 임시로 내린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검서관 직함이 무엇입니까. 입신 출세할 수 없는 양반가 서얼(자) 출신을 위해 규장각 내에 부설한 잡직(체아직)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비정규직’ 혹은 ‘계약직’ 관리라 할까요. 이들의 임무는 규장각 각신을 보좌하고 문서를 필사·교정하는 일이었죠. 그런 관리에게 임시지만 정3품이라는 고위직을 하사하고 재파견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대련’ 작품은 1790년 중국 재방문 당시 박제가가 청나라 문사와 교유하며 써준게 틀림없다는 겁니다.

청나라 화가 나빙(1733~1799)이 1790년 귀국하는 박제가에게 그려준 스케치 초상화. 나빙은 “멋진 선비 만난 기념으로 초상을 그린다”면서 “이별의 정이 가장 마음 슬프게 만들 뿐”이라는 전별시를 썼다. 나빙이 그려준 초상화의 모습처럼 박제가는 키가 작고 수염이 많으며 다부진 체격이었다.

 

■절친이 써준 프로포즈 글

말이 나왔으니 주인공인 박제가와, 그 유명한 저작물인 <북학의> 이야기를 거르고 넘어갈 수 없겠네요.

무슨 거창한 사상이나 철학 이야기는 빼고요. 초정 박제가는 1750년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1700~1760)의 외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러나 어머니(전주 이씨)가 소실(첩)이었기 때문에 서자라는 신분적인 한계를 안게 됩니다.

박제가는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이었다고 하고요. 수염이 많았다고 하네요. 농담도 잘했고요.

특히 만주어와 중국어에 능통해서 주변 사람들의 찬탄을 받았고요.

 

“박제가의 시는 상대할 이가 없어서 시단에서 우이(牛耳·우두머리)를 잡을만 하고 평생토록 부서진 벼루를 먹을 만큼 글씨를 연습했으며 경사(經史·경전과 역사서)가 굶주린 뱃속에 가득 차 있다.”(<홍애집> 권3)

또한 1792년 첩장가를 드는 박제가를 두고 그의 절친들이 쓴 장난글을 보면 엄청 재미있습니다.(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이때 절친인 유득공(1749~1807)에게 ‘혼서 좀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때 유득공이 쓴 글귀가 휘황찬란합니다.

“족하(신부 아버지)께서는 귀한 딸을 제게 소실로 삼도록 허락해주오…이 몸은 늙어가려 한다오. 향기 나라의 좋은 풍경이요. 술세계의 세월이 되겠지요. 구슬을 헤아려 폐물을 드리려니 부끄러워 향을 가려…”

혜원 신윤복의 ‘건곤일회도’(왼쪽)와 이기원의 <홍애집>(연세대도서관 소장). 초정 박제가가 44살의 나이로 첩장가를 들자 그의 절친들이 장난섞인 글로 놀렸다. 절친 중 한사람인 이기원은 심지어 초정의 성적 능력까지 거론하는 농담글을 남겼다.

 

■첩 장가 들며 놀림감 된 박제가

또 한 분의 절친인 이기원(1745~?)은 혼인을 앞둔 박제가를 주제로 무려 10수에 달하는 시로 놀리는데요.(<홍애집>)

그것을 ‘첩장가 드는 초정(박제가)을 장난삼아 놀리는 시’(戱題朴次修催粧詩)라 합니다.

“영재(유득공)는 초정(박제가)더러 ‘세치 혀를 놀리면 말 4마리도 쫓아오지 못하지’라 품평했지. (그런 그가) 키만 서너치 더 컸다면…누가 따라오겠는가.”

첩장가 드는 ‘키 작은 박제가’를 칭찬하는 척 비꼰 겁니다. 짓궂은 절친은 박제가의 여성편력까지 문제 삼습니다.

 

“안양 기생은 정이 끌리나 너무 어린 것이 아깝고, 가릉 기생은 인연 깊으나 남에게 빼앗겼지. 이번엔…양귀비 같은 여자를 찾으려나.” 너무 어렸다는 안양 기생은 겨우 13살이었고요. 또 가릉 기생은 1790년 중국 방문 길에 평안도 가산에서 만나 정을 나눈 사이였는데 다른 남자에게 갔다는 겁니다. 박제가가 중매쟁이를 통해 신부 집에 적당히 나이를 둘러댔다는 비밀도 누설합니다. “늙은 신랑(당시 44살)이라 신부 집에서 싫어할테니 나이를 보태고 더는 일은 중매쟁이에게 맡겨두네. 침 흘리는 부여 현령(박제가)을 잘 알아차려 주홍실로 합환주를 서둘러 당겨놓게.”

박제가는 직선적이고 불같은 성격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서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정조는 “박제가는 원래 그런 위인이다. 다음에 잘하라 그래라”고 변호해주었다.

 

절친의 시는 ‘성적 능력’을 자랑하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릅니다.

“…나비인지 원앙인지 제 정대로 맡게두네, 긴긴 밤 신방의 붉은 촛불은 침상에서 있던 일의 자초지종을 분명히 비춰주리.”

이 대목에서 이기원은 재미있는 각주를 달았습니다.

“초정은 과연 능력이 있다. 그는 ‘내가 평안도 기생과 하룻밤 잘 때 서까래같은 촛불 두개를 켜놓고 먼동이 틀 때까지 지냈는데, 사람이 몸을 거두자 촛불도 바닥을 보였지’하고 자랑했다.”

 

■‘모두까기’의 달인

최근 초정 박제가를 두고 이러한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한 연구가 주목을 끌었는데요.

그러나 기본적인 박제가를 둘러싼 평가는 지독한 독설과 냉소, 비판 등의 단어로 점철됩니다.

후배이자 동료인 성해응(1760~1839)의 표현을 빌려볼까요.

“박제가는 뛰어난 재능을 자부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었다. 자신을 힐난하는 자를 만나면 기어코 꺾으려 했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 요란했다.”

실제로 정조 시대 노론 벽파의 선봉에 선 심환지(1730~1802)가 박제가를 엄청 꼴보기 싫어했던 것 같아요.

 

심환지는 정조의 거둥을 수행하던 박제가가 호상(胡床·등받이 있는 접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빈정이 상했답니다.

“내가 아래것을 통해 그 점을 지적하자 박제가는 다짜고짜 ‘내가 집에서 가져온 의자인데 뭐가 문제냐’고 화를 벌컥냈습니다. 그의 언행이 매우 불손하니…파직시켜주소서.” 그러나 정조의 반응이 걸작입니다.

“박제가는 원래 경솔해서 격례를 모르는 자다. 뭘 그리 나무라겠는가. 앞으로 잘하라 그래라.”(<정조실록> 1797년 2월25일)

요즘 말로 한다면 정조가 인정한 ‘4가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박제가는 통틀어 4번 중국을 방문(1778년, 1790~91년 두차례, 1801년)했는데요.

29살 때인 첫번째 중국 방문을 다녀온 뒤 저술한 <북학의>를 보면 그 직접화법과 독설에 깜짝 깜짝 놀랍니다.

 

■조선은 똥! 덩! 어! 리!

“너무 더러워 입에도 댈 수 없는 음식이 바로 (조선의) 장(醬)이다…삶은 콩을 맨발로 밟아대는데 온몸의 땀이 발 밑으로 떨어진다. 장에서 종종 손톱이나 몸의 털이 발견된다. 구역질이 난다.”

엄청난 ‘디스’죠. 이건 약과입니다. “한양에서는 날마다 뜰 한귀퉁이나 길거리에 똥·오줌을 쏟아버린다. 그래서 우물물이 모두 짜다. 시냇가 다리나 돌로 쌓은 제방에는 인분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드라마 대사처럼 ‘똥! 덩! 어! 리!’라 외치는 것 같죠. 평소 거침없는 직설화법을 숨기지 않는 박제가의 눈에 18세기 조선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한심한 나라였던 겁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습니다.

<북학의>에서 ‘중국에서 배우자(학중국·學中國)’이라는 말이 20번 쯤 나온답니다.(안대회 교수)

“중국처럼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 수레가 없으니 주택가격은 물론 나막신값, 짚신값도 오르는 것이다.” “중국처럼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벽돌로 성(城)을 쌓아야 한다. 운반도, 가공도 어려운 석성은 버려야 한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도 형편없다. 도저히 팔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조잡하다.”

 

■하도 답답해서…

박제가가 ‘중국! 중국!’을 외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답답해서 그랬습니다. 그냥 두면 조선은 곧 망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폐쇄적인 나라라 판단했으니까요. 철저한 자기부정으로 조선의 허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중국을 상징으로 하는 선진문물의 도입을 재촉하고 있는 겁니다. 그가 보기에 조선의 버팀목이라는 사대부(선비 혹은 유생)는 반드시 ‘도태시켜야 할 부류’였습니다. “국가의 폐단은 가난인데, ‘나라의 좀벌레들’인 사대부만 번성하고 놀고먹는 자들만 늘고 있다. 이들이 천하를 야만족이라 무시하면서 자신들만 중화(中華)라고 떠들고 있다.”

 

박제가는 이런 자들보다는 차라리 서양인들을 기용하라는 혁명적인 주장을 합니다. 즉 “기하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기술에 능한 서양인들을 과감히 관리로 ‘영입’하자”고 제안한 겁니다. 지금의 관점에서도 개혁적인 사고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어 ‘우물론’을 제기하면서 ‘소비의 미덕’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재물은 우물이다. 물을 퍼내면 우물물이 다시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물이 말라버린다.”

소비의 미덕을 이렇게 간결한 비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비단옷을 입지 않으니 비단짜는 사람이 없고, 정교한 도자기를 숭상하지 않으니 나라에 공장과 도공, 풀무쟁이의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조선의 왕안석

박제가의 <북학의>는 당대 조선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세유표>에서 “이용후생을 담당할 이용감을 설치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박제가의 제안을 정부기구 설립 제안으로 구체화 한 거죠.

그러나 당대 조선의 그릇은 초정의 개혁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박제가는 훗날 승하한 정조의 말씀을 되뇌이며 회한에 찬 시를 한 편 짓습니다. “…(정조가) 신을 불러 왕안석에 견주니 그 옥음 아직 귀에 쟁쟁하여라.”(<정유각집> ‘권5·이원’)

왕안석(1021~1086)이 누구입니까. 북송대 위대한 개혁사상가였지만 보수파에 의해 소인배로 낙인찍히고 말았죠.

정조도 박제가가 왕안석에 견줄만한 개혁사상가였지만 너무 앞서갔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겁니다.

박제가는 심지어 “관상감 같은 관청에는 이용후생에 능한 서양인들을 대거 기용해야 한다”면서 “그들은 반드시 나라에 쓸 만한 인재가 될 것”이라는 혁명적인 주장을 편다.

 

돌이켜보면 많은 이들이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제가의 집을 찾았습니다. 중국의 풍속이 궁금했던게죠,

그러나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박제가의 열변에 사대부들은 “왜 오랑캐 편을 드냐”고 어이없어 했답니다.

이 대목에서 박제가의 장탄식이 하늘에 닿습니다. “아. 저들이 우리나라 학문을 이끌고 백성을 다스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완고하니 문화가 크게 발전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이 이상할 것이 없구나.”

그럴만도 했죠. 사대부의 눈에 중국은 청나라 오랑캐였거든요. 오히려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라며 우쭐댔으니까요. 박제가는 “내가 ‘중국의 풍속이 좋다’고 하면 그들은 결코 믿지 않았다”면서 ‘하도 진짜냐. 거짓이 아니냐’고 묻기에 답답한 나머지 퉁명스럽게 대답했답니다. “그래요. 내가 거짓말을 했구려.”

 

■“왜 굳이 하늘 천이라 할까”

너무 답답했을까요. <북학의>에는 지금도 논란을 일으킬만한 박제가의 주장이 실려있습니다. ‘중국어공용론’입니다.

박제가는 ‘중국어는 문자의 근본’이라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중국어로 천(天)은 그냥 천(天·티엔)이라 한다. 우리처럼 ‘하늘 천’이라 하는 겹겹의 장벽이 전혀 없다. 따라서 사물의 이름을 분간하기가 특히 쉽다.”

무슨 말일까요. 중국과 조선은 어차피 한자문화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天’을 그대로 ‘티엔’으로 발음하는데, 조선에서는 굳이 ‘하늘 천’이라 하고, 대화를 나눌 때는 ‘하늘’이라 한다는 겁니다.

조선의 현실을 답답하게 여긴 박제가는 아예 중국어공용론까지 펼친다. 박제가는 ‘하늘 천(天)’자를 예로 든다. 중국에서는 하늘을 그냥 ‘티엔(天)’이라 하는데, 왜 조선에서는 굳이 ‘하늘 천’이라 하고, 대화를 나눌 때는 ‘하늘’이라 하느냐는 것이다. 그냥 ‘천’이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

 

박제가는 그렇기에 “본래 사용하는 말(예컨대 하늘)을 버린다 해도 안될 이치가 없다”면서 “오랑캐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한글을 버리고 ‘중국어를 공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반대파가 벌떼처럼 일어났죠.

“중국은 말이 문자와 동일하다. 따라서 말이 변하면 문자의 소리도 그에 따라 변한다. 우리는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사용한다. 따라서 맨 처음 받아들여 배운, 한자의 소리를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다.”

참으로 일리있는 주장이 아닙니까. 그러나 박제가는 ‘중국과 대등해지기 위해 한자공용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못박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망국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고육책이라 해도, 박제가의 ‘중국어공용론’에 찬성표를 던질 수 있을까요. 과감하고 급진적인 개혁책을 내놓던 박제가의 ‘과속페달’, 혹은 ‘오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버맨’이었을까

그렇더라도 박제가의 진심이 폄훼되어서는 안되겠죠. 어디까지나 모든 주장은 백성을 위한 이용과 후생이었으니까요.

<북학의>를 쓰는 박제가의 심정을 읊은 시가 남아있습니다.

“긴 여행을 마치고 초가에 앉아, 저서의 근심을 오래도록 품고 있다…일신의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수심에 잠긴다. 천 개의 글자로 가슴 속 생각을 풀어내려니, 어느 겨를에 내 한 몸 위해 고민하리오.”(<정유각시집> 제2권)

박제가가 요즘의 학자였다면 어땠을까요. 거침없는 주장에 거친 표현을 서슴치않는 과격한 진보논객에게 십자포화가 집중되었을 겁니다. 이 대목에서 그가 남긴 경고메시지를 한번 볼까요.

조선의 현실을 답답해했던 박제가는 “전쟁이 없는 평화기가 200년이 된 지금 국력을 닦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의 변고가 생길 때 더불어 조선에도 우한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금 아시아에) 전쟁 먼지가 일지 않은 지 거의 200년이 되었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에 온 힘을 다해 국력을 닦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변고가 발생할 때 조선에도 우환이 발생할 것입니다.”

박제가의 경고메시지 이후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일어나고(1840년대) 그후 70여년 뒤에 조선은 국권이 침탈되는 치욕을 겪게 되었죠. 어느날 우연히 보게된 박제가의 ‘대련’ 글씨에 200년전의 스토리를 담아봤습니다.(이 기사를 위해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와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박제가, 안대회 옮김, <북학의>, 돌베개, 2013

송응성, 최병규 옮김, <천공개물>, 범우, 2009

안대회·이헌창·한영규·김현영·미아지마 히로시, <초정 박제가 연구>, 성균관대 출판부, 2013

안대회, ‘초정 박제가의 인간 면모와 일상-소실을 맞는 시문을 중심으로’, <한국한문학연구> 36권36호, 한국한문학회, 2005

안대회, ‘초정 박제가의 연행과 일상속 국제교류’, <동방학지> 149권, 연세대국학연구원, 2009

이동국 기획 편집,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괴(怪)의 미학’ 도록, 중국국가미술관,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