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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판 세종대왕'이었던 현종…도무지 비판거리가 '1'도 없었다

이기환기자 2023. 12. 16. 08:00

'고려판 세종대왕’, ‘도무지 비판할 거리를 찾을 수 없는 군주’…. 아니 고려 역사에 이런 임금이 계셨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붙인 수사가 아니구요. <고려사>에 분명하게 나오는 표현이구요.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조에서도 “국난에 빠진 고려를 중흥시킨 영명한 군주”라며 롤모델로 삼은 분입니다.

올해들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분이죠. 바로 고려 현종(992~1031, 재위 1009~1031)입니다.

시쳇말로 ‘비판할 거리가 1도 없는 고려판 세종대왕’이라는 극찬을 받고 있습니다.

마침 KBS 대하 드라마인 ‘고려·거란전쟁’이 바로 이 고려 현종시대를 다루고 있는데요. 역사적인 사실에 입각한 정통사극이어서 저도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 말고요.

고려는 이후 오로지 현종의 후손이 고려 왕계를 이어간다. 현종~인종대까지 130여년간을 ‘고려의 전성기’라 한다. 현종은 고려시대 내내 ‘세종대왕(世宗大王·현종)’으로 일컬어졌다.

■12세기 이전 ‘장의사’ 명문기와의 의미

실제로 현종의 자취와 유산이 개성(개경)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고고학 발굴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올해 3월의 일입니다. 서울 자하문 너머 종로 신영동(실제 구기동) 도시형 생활주택 부지에서 의미심장한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죠. 고려시대 건물터(1382㎡)가 확인되었는데요. 건물터의 입지를 보니 개경의 궁궐인 만월대를 빼닮았다는 견해가 있고요. 또 상급품의 고려자기와 함께 수정 구슬로 만든 연주가 동판 위에서 출토되었고요.

유적의 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 명문 기와(‘승안 3년·承安三年’)가 출토됐어요. ‘승안’은 금나라 장종(1189~1208)의 연호(1196~1200)입니다. 따라서 ‘승안 3년’은 1198년(고려 신종 원년)을 가리키죠.

발굴단(수도문물연구원)은 위상이 만만치 않은 건물터가 고려 왕실과 관련된 특수건물인 것으로 추정했는데요.

현종에 대한 평가는 극찬 일색이다. 당대의 사관 최충은 온갖 미사여구로 현종을 평가했으며, 이제현은 “현종의 경우 비판할 거리가 없다”고 단언했다.

지난 8월 또하나 특기할만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어요. 기왕(3월)에 조사된 신영동(구기동) 유적에서 10m 떨어진 곳(구기동) 다가구 주택신축 공사장에서 난방시설을 갖춘 건물터 1기가 노출되었는데요. ‘장의사’로 읽히는 고려시대 명문기와와 함께 청자·도기 조각도 나왔는데요. 대체로 13세기 무렵에 조성되고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런데 ‘장의사’ 명문이 찍힌 기와 등 일부는 ‘12세기 이전’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답니다.

물론 올해 잇달아 발굴된 두 건물터의 연대가 13세기 무렵이라도 ‘현종’과 연결지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데요.

현종에 대한 칭찬릴레이는 조선조까지 이어진다. 세조 연간의 재상 양성지는 “전왕조의 현종은 영명한 군주”(<세조실록> 1457년 3월15일)라 평가했다.임진왜란 같은 국난에 빠진 임금의 경계용으로 늘 ‘고려 현종의 고사’를 인용했다.

그런데 ‘장의사’ 명문기와 등이 12세기 이전 제작되었다면 더더욱 ‘현종(재위 1009~1031)과 직접 관련’을 논할 수 있겠네요.

사실 ‘장의사’라는 사찰은 이 두 건물터에서 남쪽으로 350m 떨어진 현 세검정초교 자리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사찰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당간지주’(보물)가 학교 안에 서있거든요. 이것도 궁금한 대목입니다. 12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일 수도 있는 ‘장의사’ 명문 기와가 왜 원위치(세검정 초교)에서 350m 떨어진 곳에서 확인되었는지….

12세기 이전에는 장의사의 본래 위치가 두 건물터(지금의 발굴현장)에 있었다가 세검정초교 쪽으로 이전한 건지, 아니면 장의사의 사역이 그만큼 넓어서 세검정초교~발굴현장 사이를 전부 아우르고 있었는지….

구기동 고려시대 건물터에서 확인된 ‘장의사’명 기와. 이 건물터에서는 12~13세기 기와와 청자편 등이 출토됐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고려 국왕들의 삼각산 행차

두 건물터는 기존 장의사 자리(세검정 초교)와 삼각산(북한산) 승가사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건은 분명합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은 ‘장의사-삼각산 승가사’와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전하고 있어요.

개경에서 정사를 펼치는 고려 국왕이 승가사(굴)과 장의사에 행차하는 기사가 속출한다는 겁니다.

즉 “1090년(선종 7) 10월19일 왕(선종·1083~1094)이 승가굴과 장의사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그렇고요.

9년 뒤인 1099년 9월28~윤9월5일 선종의 뒤를 이은 숙종(1095~1105)의 삼각산 행차도 눈길을 끌죠.

지난 3월 서울 신영동(구기동) 도시형 생활주택 부지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건물터(1382㎡). 확인된 건물지 가운데는 잔존 면적(길이 20.1×너비 5.5m)만 33.44평에 이르는 것도 있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왕이 왕비 및 원자와 대각국사 의천(숙종의 동생·1055~1101)과 함께 삼각산 승가굴에 행차해서 재를 올린 뒤 갖가지 선물을 하사했다”는 겁니다. 1104년(숙종 9) 8월5일에는 “남경에 행차한 숙종이 승가굴에 직접 들러 재를 올리고 속옷을 바치면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이후에도 예종(1105~1122)이 3차례에 걸쳐 승가굴과 장의사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보이고요. 1167년에는 의종(1146~1170)이 승가사와 장의사에 들렀다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장의사와 승가사 사이에 조성된 ‘두 건물터’는 삼각산(승가사)과 장의사를 찾아온 국왕이나 왕실, 귀족들이 머무는 숙소가 아니었을까요.

지난 3월 고려시대 건물터가 발견된 곳에서 10m 떨어진 곳에서 확인된 또다른 고려시대 건물터. ‘장의사’ 명 기와와 함께 난방시설도 노출됐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왕이 된 사생아

개경의 고려 국왕이 왜 멀리 떨어진 삼각산 승가사까지, 지체 높은 몸을 이끌고 올라가 재를 올렸을까요.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죠. 이 장면에서 ‘현종’이 ‘짜잔~’하고 나타납니다.

사실 고려 현종에게는 숨기고 싶은 출생의 비밀이 있었죠. 우선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성행했다는 것을 염두에 둡시다.

현종의 아버지 왕욱(王郁·추존왕 안종·?~996)은 태조 왕건(877~943, 재위 918~943)의 여덟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헌정왕후(?~992)인데요. 헌정왕후는 친언니인 헌애왕후(964~1029·목종의 어머니·천추태후)와 함께 태조의 7번째 아들인 왕욱(王旭·추존왕 대종)의 딸(들)이었습니다. 두 자매(헌애왕후·헌정왕후)는 경종(태조의 넷째 아들인 광종의 맏아들)의 3번째와 4번째 부인이 되었습니다. 두 자매가 사촌 오빠(경종)과 혼인한 겁니다.

발굴조사된 고려건물터에서 불과 350m 떨어진 곳에, ‘장의사터’가 남아있다. 그곳이 사찰임을 알리는 당간지주(보물)가 서있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그렇다면 현종의 부모인 왕욱(안종·추존왕)과 헌정왕후는 삼촌-조카 사이가 되는 겁니다. 복잡한 관계죠.

그런데 삼촌-조카사이인 왕욱과 헌정왕후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섭니다. 왕욱이 남편(경종)이 승하한 뒤 사가(私家)에 나가있던 헌정왕후와 덜컥 사통해서 아들을 낳은 겁니다. 그 아들이 바로 훗날 현종이 됩니다.

“남편(경종)이 죽고 사가에서 살던 헌정왕후가 꿈에서 눈 오줌이 온 나라에 흘러 은빛바다를 이루었다. 술사가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될 것’이라 풀이했다. 헌정왕후는 ‘과부인 내가 어찌 아들을 낳겠느냐’고 쓴웃음을 지었다.”(<고려사> ‘후비열전’)

올해 발굴된 고려건물터는 장의사와 승가사 사이에 자라집고 있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그러나 점쟁이의 말이 맞았습니다. 서로 가까운 곳에 살던 삼촌-조카가 눈이 맞아 훗날 임금이 되는 아들(현종)을 낳은 겁니다. 결국 이와 같은 불륜행각이 들통이 나면서 왕욱(안종)은 유배를 떠났고요.

헌정왕후는 목놓아 울부짖다가 갑자기 태동(胎動)을 느껴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요. 아이는 삼촌-조카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는데요. 사생아가 임금이 된 경우는 고려 현종이 유일합니다. 어린 현종에게는 ‘대량원군’의 칭호가 붙었습니다,

삼각산 승가사 뒷편 석굴에 조성된 등신좌상의 광배에 ‘태평4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태평’은 요(거란) 성종의 연호(1021~1031)이니 ‘태평 4년’은 현종 15년(1024년에 해당된다.

■비정한 이모의 암살기도

그런데 경종의 맏아들인 목종(980~1009, 재위 997~1009)이 성종의 뒤를 이어 등극하자 상황이 급변합니다.

대량원군(현종)의 이모지만 목종의 친어머니인 헌애왕후가 ‘견제’에 들어간 겁니다. ‘천추전’에서 아들(목종)을 대신해 섭정한 헌애왕후는 그때부터 ‘천추태후’로 일컬어지며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데요.

그러나 아들인 목종의 성적취향(동성애) 때문에 후사를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후계구도를 두고 암투가 벌어집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현종의 후손인 선종, 숙종, 예종, 의종 등이 승가사와 장의사를 여러차례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문화재청 제공

천추태후가 내연관계인 김치양(?~1009)과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민겁니다. 천추태후 입장에서 조카인 대량원군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대량원군은 이모(천추태후)의 강압으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는데요.

그때 대량원군이 ‘강제 출가’한 곳이 바로 삼각산(북한산) 신혈사(진관사로 추정)였습니다.(1006·목종 9)

권력에 눈이 먼 이모는 조카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삼각산에 (천추)태후가 자주 사람을 보내 해치려 했다. 신혈사의 노승이 방에 땅굴을 파서 그를 숨기고, 그 위에 침상을 설치했다”(<고려사> ‘세가·현종 총서’)는 기사가 보입니다.

올해 발굴조사로 확인된 고려시대 건물터는 승가사와 장의사를 방문한 고려 국왕들의 숙소나 쉼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꼬끼오와 어근당’

그 와중에도 대량원군은 차기 대권을 위해 암중모색을 했던 것 같아요. 그 무렵 대량원군이 지었다는 시 두 편을 볼까요.

“백운봉에서 흘러나온…물이 바위 아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머지않아 용궁(龍宮)에 도달하리라.(…不多時日到龍宮)”

“…꽈리 튼 새끼뱀…너무 오래…숲 아래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하루 아침에 용이 되는 것 어렵지 않으니(一旦成龍也不難)…”심상치않은 시죠. “내가 곧 옥좌에 오를 것”이라고 선언한 것 같아요.

재미있는 일화가 또 있어요. 대량원군이 꿈에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답니다.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성행했다. 현종의 부모인 왕욱(안종)과 헌정왕후는 삼촌 조카 사이였다.

술사의 꿈풀이가 기막혔습니다. “닭 우는 소리는 ‘꼬끼오(고귀위·高貴位, 높고 귀한 자리)’이고,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御近當· 임금 자리가 가깝다)’이니 이는 왕위에 오를 징조”라 했다는 겁니다.

어떤 술사의 꿈풀이인지 모르지만 천고에 빛날 표현이 아닙니까.

이쯤에서 거두절미하고요. 결국 강조(?~1010)의 정변(1009년)이 일어나 김치양 부자가 죽임을 당하고요.

대량원군, 즉 현종에게도 우호적이었던 목종도 결국 시해당하고 마는데요.

경종의 부인인 헌정왕후는 남편(경종)의 승하 이후 사가에 나가 산다. 그러나 삼촌인 왕욱(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과 사랑에 빠져 임신한다. 그 사실이 오빠(성종)에게 발각되어 왕욱이 유배를 떠난다. 충격을 받은 헌정왕후는 갑자기 산통을 느껴 아이를 낳은 뒤 승하한다. 그렇게 태어난 사생아가 현종이다.

■만장일치로 왕위에 오르다

흥미로운 대목이 또 있어요. 그 혼란한 와중에 천추태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대량원군’을 차기대권 0순위로 꼽았습니다.천추태후의 아들인 목종조차 “이제 태조의 후손은 오직 대량원군만이 남아있다”(<고려사> ‘열전 채충순’)고 단언했는데요. 좀 이상하기는 합니다. 29명의 부인에게서 25명의 아들을 둔 태조 왕건의 후손이 모두 사라지고 ‘대량원군만 남았다’는 건가요. 목종과 후사를 논의한 최항(?~1024) 같은 신하도 “왕위를 계승할 분은 오직 대량원군”이라고 했고요.

정변을 일으킨 강조도 목종을 폐위시킨 뒤 대량원군을 모셔와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만큼 “다른 성씨(김치양의 아들)에게 사직이 돌아가면 큰일난다”(<고려사> ‘열전·채충순’)는 위기의식이 컸던 거구요.

그때 성군의 자질이 ‘낭중지추’로 드러난 대량원군이 유일한 대안으로 꼽혔던 겁니다.

목종의 어머니이자 대량원군(현종)의 이모인 천추태후는 자신이 김치양과 사통해서 낳은 아들을 차기 국왕으로 올리기 위해 조카인 대량원군을 강제로 출가시킨다. 천추태후는 급기야 조카를 죽이려고 갖은 음모를 꾸미지만 삼각산 신혈사 고승의 기지로 위험을 벗어난다.

■조롱당한 임금

그렇게 만장일치로 등극한 현종에게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거란의 성종(재위 982~1031)이 ‘강조의 정변’을 문책한다면서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죠.(1010년 11월)

고려조정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절대다수의 신하들이 항복을 권했지만 강감찬(948~1031) 만이 홀로 나서 현종에게 몽진(피란)을 권합니다. 그렇게 전라도 나주까지 피란길에 나선 현종은 여러차례 곤욕을 치릅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하급관리들이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느냐”며 조롱했구요.

한밤중에 숙소로 쳐들어온 자들 때문에 현종이 가까스로 몸을 피한 적도 있습니다. 전주에서는 거의 반란에 가까운 무력시위를 벌여 현종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건국초 아직 민심이 고려조정에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전쟁은 양규(?~1011)의 대활약이 빛을 발해 현종이 거란에 입조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끝나는데요.(1011년 1월11일)

대량원군은 비록 곤궁한 처지에 있지만 결국 왕이 되겠다는 시를 읊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또 꿈에 ‘닭 울음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다고 하자 술사는 “닭울음 ‘꼬끼오’는 고귀위(高貴位·높고 귀한 자리)’이고,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御近當· 임금 자리가 가깝다)’이라는 뜻이니 왕위에 오를 징조”라 풀이했다.

■흥화진대첩, 귀주대첩

그러나 현종은 거란에 입조하지 않았습니다. 또 거란이 요구한 강동 6성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성과 보루를 꾸준히 쌓아 또다시 벌어질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강감찬 같은 인물을 서북면행영도통사의 책임을 맡겨 대비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3차 고려-거란 전쟁(1018~1019)에서 두 차례 대첩이 있었죠.

첫번째는 소가죽으로 강둑을 막아 터뜨린 흥화진(의주) 대첩이구요. 두번째는 철수하는 거란군을 귀주성 인근 구릉에서 격멸한 귀주대첩이 있습니다. 10만 거란대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명 뿐이라죠. 이후엔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답니다.

강조의 변(1009)으로 천추태후의 애인인 김치양과 목종이 시해되자 태량원군은 만장일치로 국왕(현종)에 추대된다. 태조 왕건의 후손이 남아있었을테지만 목종은 물론 정변을 일으킨 강조, 그리고 다른 대소신료들은 한목소리로 ‘대량원군만이 태조의 후손’이라고 꼽는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현종은 본격적으로 고려의 기틀을 잡아갑니다. 모든 사치와 호화스러운 의식과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들의 횡포도 엄금하는 한편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에 힘씁니다.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도 도모합니다.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팔관회를 부활시키고요. 설총(658~?)·최치원(857~?) 등을 추봉하고 문묘(공자묘)에 그들의 신주를 모셨습니다. 거란군의 침략을 불심(佛心)으로 물리치려고 초조대장경의 제작에 착수, 6000권의 대부분을 완성했습니다. 1018년(현종 9) 5도양계체제라는 군현제의 골격을 구축했습니다. 중앙집권으로 지방의 민심을 다잡고자 한 겁니다.

제2차 거란침입을 효과적으로 맞은 현종은 거란의 ‘입조’ 요구도 ‘강동 6주 반환’ 요구도 거절하고 전국에 성과 보루를 쌓아 전쟁에 대비한다.

■세종대왕(현종)께서…

그후 고려는 오로지 현종의 후손이 고려 왕계를 이어가는 데요.

덕종(1031~1034)·정종(1034~1046)·문종(1046~1083)·선종(1083~1094)·숙종(1095~1105)·예종(1105~1122)·인종(1122~1146) 등으로 이어집니다. 이 현종~인종대까지 130여년간을 ‘고려의 전성기’라 합니다.

‘현종=세종대왕’이란 표현은 <고려사> ‘세가·고종’에 나와 있어요.

즉 1254년(고종 41) 10월19일 몽골의 계속된 침략에 고달파진 고종(1231~1259)이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신 태묘에 나가 “국난을 극복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데요. 이때 ‘현종=세종대왕’으로 지칭합니다.

“세종대왕(世宗大王·현종)께서…큰 난리를 평정하여 중흥과 반정(反正)의 공을 세워….”

본래 ‘세종’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거나 중흥시킨 군주에게 올리는 묘호(왕의 사후에 붙이는 호칭)입니다.

물론 고려 현종이 정식으로 ‘세종’의 묘호를 받지는 않았는데요. 그러나 고려시대 내내 위기에 빠진 나라의 기틀을 잡은 ‘세종대왕’으로 예우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차 고려-거란 전쟁(1018~1019)에서 두 차례 대첩이 있었다. 첫번째는 소가죽으로 강둑을 막아 터뜨린 흥화진(의주) 대첩이다. 두번째는 철수하는 거란군을 귀주성 인근 구릉에서 격멸한 귀주대첩이 있었다. 10만 거란대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명 뿐이었다. 이후엔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다. |전쟁기념관 소장

■‘무결점 국왕’

보통 어떤 인물, 심지어 임금을 평가하는 사관들의 잣대는 ‘칼’ 같은게 보통이죠. 그 분의 장점도 나열하지만 단점 또한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습니다. 예컨대 후대의 인물인 이제현(1287~1367)은 “문종의 치세는 가히 전성기라 일컬을 만하다(可謂盛矣)”(<고려사>)고 평가했는데요. 그러나 말미에 “불교를 과하게 숭상하여 궁궐보다 사치한 절을 쌓았다”고 꼬집었어요

그런데 현종은 어떨까요. 완전히 ‘무결점 성군’으로 추앙됩니다. 당대의 사관인 최충(984~1068)과 이제현의 평가를 볼까요.

“현종은…오랑캐와 화호를 맺고, 전쟁을 멈추고 문덕을 닦으며, 세금과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해서…전국이 평안하고 농업과 잠업이 풍년이 들었다. 나라를 중흥시킨 왕(中興之主)이다.”

이 정도도 무결점 평론인데요. 이재현의 ‘한줄 정리’가 눈길을 끕니다.

“현종과 같은 경우 ‘나는 비판할 거리가 없다(如顯宗 所謂吾無間然者乎)’는 것이다.”(<고려사절요> ‘현종 1031년 5월25일)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현종은 고려의 기틀을 하나하나 잡아간다. 이때부터 고려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조선조에서도 칭찬릴레이

조선조 들어서도 고려 현종과 관련된 평가가 ‘극찬’으로 일관됩니다.

세조 연간의 인물인 양성지(1415~1482)는 “전왕조의 현종은 영명한 군주”(<세조실록> 1457년 3월15일)라고 극찬하구요.

또 선조 대의 류성룡과 윤두수 등은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는 선조의 양위 소동에 계속 고려조 현종의 고사를 인용하며 반대합니다. 즉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받아 나주로 파천했지만 결국 고려의 중흥을 이뤘다(훌륭한 덕을 갖춘 군주가 되었다)”고 계속 강조합니다.(<선조실록> 1593년 윤11월 29일, 1594년 9월19일 등)

어떻습니까. 우리가 잘 몰라뵈서 그렇지 고려 현종, ‘찐’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군주가 아닙니까.

그런 분의 흔적, 자취가 요즘 서울시내 한복판에 잇달아 등장하고 있죠. 후대의 임금들은 ‘성지순례코스’로 현종이 고초를 겪었던 삼각산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이 기사를 위해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장과 이태원 팀장이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도 고견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임지원, ‘고려 현종의 국정운영 연구’, 경북대 박사논문, 2021

남동신, ‘북한산 승가대사상과 승가사상’, <서울학연구> 제14호, 서울시립대서울학연구소, 2000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구기동(67-3번지) 다가구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전문가 검토회의 자료집), 2023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구기동(67-3번지) 다가구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약식보고서), 2023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신영동(248-32번지 일원) 도시형생활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자료집,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