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군함도', 영화가 실화를 능가할 수 없는 이유

이기환기자 2017. 7. 30. 16:24


일본 나가사키에서 남서로 20여㎞ 떨어진 곳에 섬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무인도가 있었다.

하시마(端島)였다. 1810년 무렵 부근의 어민이 이 섬의 표면에 노출된 석탄층을 발견했다.

이후 어민들은 석탄캐기를 부업으로 삼았다.

그러다 1869년 나가사키의 업자가 채탄사업을 시작했지만 1년만에 문을 닫았다.

그후에도 계속해서 3개 회사가 1~3년 정도 탄광을 운용하다가 큰 태풍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1886년 처음으로 36m에 달하는 지하수직갱도를 파고 채굴을 시작했다.
그러다 1890년 ‘전범기업’ 미쓰비시(三菱)가  소유자인 나베시마 손타로(鍋島孫太郞)에게 10만엔을 주고 탄광을 구입한다.

탄광은 곧 ‘노다지’가 되어 일본 제국주의 근대화의 축을 담당하게 된다. 미쓰비시는 6차례에 걸쳐 매립공사로 섬을 처음의 3배 크기로 확장시킨다. 그래봐야 2만평도 채 되지 않았다.
좁은 땅에서 양질의 석탄이 쏟아지자 미쓰비시는 10층짜리 콘크리트 아파트는 물론 극장·종교시설·학교시설·기숙사·체육관까지 세운다.

군함이 떠있는 모습이라 해서 ‘군함도’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러나 ‘지옥섬’이었다. 지하 1000m까지 뚫은 해저탄광의 막장은 45도를 오르내렸다.
1941년부터 본격 시작된 ‘산업보국전사운동’에 따라 이 섬에 끌려간 조선인들은 생지옥 같은 환경에서 하루하루 버텼다.

1인당 0.5평도 채안되는 좁은 방에서 7~8명이 버텼다.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막장에서 똑바로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누운채 하루 12시간 이상 석탄을 캐야 했다.

쉬고싶다면 몽둥이로 때렸고, 지나가던 갱부들이 한 대씩 때리도록 전봇대에 묶어두기도 했다.

견디다못해 신체절단 등 자해까지 꾀한 이들도 있었고, 도망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한 이들도 있었다. 1939~45년 사이 이 섬에서 죽은 조선인이 120여 명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다.

1943~45년 사이 강제 동원된 조선인만 500~800명 사이라 한다.
최근 개봉된 영화 ‘군함도’(사진)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역사왜곡과 스크린 독점. 작품성 등을 둘러싼 논란 또한 만만치 않다.

하기야 70여 년 전 지옥섬 군함도에서 벌어진,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스토리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그려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실화가 영화의 상상력을 압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논란 속에서도 한가지 결코 잊지 않아야할 대목이 하나 있다. 2015년 유네스코가 군함도 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일본측에 내건 조건이 하나 있었다. 각 시설에 ‘전체 역사, 즉 조선인의 강제노역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을 적시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본은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