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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도 천대했던 가야, 유네스코가 세계유산 대접해준 이유는?

이기환기자 2023. 10. 8. 09:40

“1000년 전 김부식이 천대했던 ‘가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며칠전 한국의 ‘가야고분군’이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7개 가야고분군은 유곡리 및 두락리(전북 남원)·지산동(경북 고령)·대성동(경남 김해)·말이산(경남 함안)·교동 및 송현동(경남 창녕)·송학동(경남 고성)·옥전(경남 합천) 고분군입니다.
유네스코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습니다.

■천덕꾸러기에서 백조로?
이 대목에서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요. 그동안 한국 역사에서 가야의 존재가 얼마나 무시당했습니까.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죠. 맨처음 인용했지만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만 봐도 그렇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 등 3국의 역사만 기술하지 않았습니까. 가야사는 쏙 빼놓았죠. <사국사기>가 아닌 <삼국사기>가 된 겁니다.
완전히 뺀 것은 아닙니다.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백제사’, 즉 ‘백제본기’ 등에는 등장하지 않고요. 
다만 ‘신라본기’에 종종 ‘가야국’ 이야기를 끼워 넣었습니다. 기원후 77년(탈해왕 21) ‘가야와의 황산진 전투’를 시작으로 “지원군을 보내 가야를 공격하는 포상8국을 물리쳤다”(209), “가야가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212)는 기사가 보입니다. 
또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고구려와 말갈의 공격을 격퇴했다”(481), “가야국 왕이 혼인을 청했다(522)”, “법흥왕이 변방 순행 중 가야국 왕을 만났다”(524)는 내용도 있네요. 급기야 “532년(법흥왕 19) 금관국왕 김구해가 항복했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김구해는 김유신(595~673)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이후 “554년(진흥왕 15)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562년(진흥왕 23) 9월 배반한 가야를 토벌했다”는 가야의 멸망소식을 전합니다.
<삼국사기> ‘잡지·지리’는 ‘김해소경’을 설명하면서 ‘금관국’의 역사를 요약 소개합니다.
“김해소경은 옛 금관국(가락국 혹은 가야)이다. 시조 수로왕~10대 구해왕에 이르렀고, 532년 항복하여….”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전은 “김유신의 12대조인 수로왕이 기원후 42년 가야를 건국하고, 후에 금관국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부연설명 했습니다. 제법 구체적이죠. 금관가야 만이 아닙니다. 
‘대가야국’ 이야기도 <삼국사기> ‘잡지·지리’에 나옵니다.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진흥왕이 멸망시키고….”

<삼국사기>에는 ‘가야본기’는 편찬하지 않았지만 ‘신라본기’ 속에 가야관련 기사들이 잇따르고 있다. 가야와의 전투, 가야에 보낸 지원군의 활약, 인질로 보낸 가야왕자, 순행중 만난 가야왕 관련 내용을 수록했다.

■가야는 왜 ‘따로 국밥’을 지향했을까
이상하죠. <삼국사기>에 따르면 10대 500년 이어간 금관국과, 16대 520년 존속한 대가야가 분명히 존재했죠. 
그쯤되면 ‘금관국본기’, ‘대가야국본기’ 등은 아니더라도 ‘가야본기’ 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은 왜 ‘가야’의 역사를 무시한 걸까요. 일반적인 설명은 이거죠.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삼국과 같이 통일된 하나의 고대 국가를 이룬 적이 없다는 겁니다.
12개(전기) 혹은 22개(후기)의 소국으로 느슨한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겁니다. 가야는 고대 국가의 첫번째 조건인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국’에 편입되기에는 ‘자격 미달’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가야는 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을까요. 
가야 연맹 제국은 모두 소백산맥 및 지맥과 낙동강 및 그 지류로 형성된 작은 분지를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비근한 예로 대가야는 고령 서북쪽에 가야산(1430m), 서쪽에 비계산(1126m)과 두무산(1038m)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죠. 이러한 분지로 형성되어 있으니 낙동강 물길로만 왕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일왕국의 길이 어려워졌죠. 
분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낙동강을 터전 삼아 살았습니다. 큰 일이 생겼을 때 인근 소국과 연합해서 대처하는 길을 모색했죠. 그렇게 10~20여개 소국이 ‘각자도생’을 원칙으로 성장한 겁니다.

“532년(법흥왕19) 금관국왕 김구해(김유신의 증조부)가 항복했다”는 기사와 554년(진흥왕 15) 신라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기사가 보인다. 마지막으로 “562년(진흥왕 23) 9월 배반한 가야를 토벌했다”는 가야의 멸망소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한다

■다양성의 가치가 평가됐다?
전기 가야 연맹체의 맹주인 금관국(가락국)을 예로 들어볼까요.
낙동강과 바다(남해)를 동시에 접한 금관국은 교역을 통한 경제를 나라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굳이 무력으로 주변 소국을 정복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삼국유사> ‘기이·가락국기’에 등장하는 김수로왕 탄생신화를 봅시다. 
“서기후 42년 하늘에서 내려온 6개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중 한사람은 대가야의 왕이, 나머지 5사람도 가야의 임금이 됐다”고 했죠. 그뿐 아니고요. 통일신라 최치원(857~?)은 <석이정전>에서 흥미로운 대가야 전설을 전합니다. 
즉 “가야산신이 천신과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인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인 뇌질청예 등을 낳았다”는 겁니다. 대가야왕과 금관국왕이 형제라는 이야기죠. 
그런 점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참 흥미롭습니다. ‘주변국과의 자율·수평적 관계’를 유지했고, 그것을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증거’여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가 인정된다는 거잖아요. 
언제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해 <삼국사기>에서도 ‘자격미달’의 평가를 받았던 ‘가야’였는데….
이제는 자율성·다양성의 모델이라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니….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하기야 금관국 및 대가야 설화를 곱씹어보면 ‘다양성의 지향’, 뭐 그런 의미로도 충분히 해석될 수 있겠네요.

<삼국사기> ‘잡지·지리’조에는 금관국(금관가야)과 대가야국의 역사를 짧게 정리했다. 즉 ‘김해소경은 옛 금관국(가락국 혹은 가야)이다. 시조 수로왕~10대 구해왕에 이르렀고, 532년 항복했다”고 했고,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진흥왕이 멸망시켰다”고 설명했다.

■만년 2인자의 견제 때문? 
각설하고요. 제가 이번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7개 고분군을 훑어보았는데요.
역시 최근 발굴 성과가 두드러진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 눈이 가더군요.
함안은 가야연맹체 가운데서도 아라가야(안라국)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데요.
여러분은 가야 하면 전·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국인 금관국과 대가야국 등 2개국만 아시죠.
그러나 전기 연맹체(2~4세기말) 에서도 2인자, 후기연맹체(5세기 전반~6세기 중후반)에서도 2인자로서 존재감을 발휘한 나라가 있었는데요. 그 나라가 바로 안라국입니다. 왜 2등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런 인식 때문에 잘 몰랐을뿐 안라국의 위상은 만만치 않았답니다. 
오죽하면 이런 견해가 있어요. 전기의 금관국, 후기의 대가야가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2인자였던 안라국의 견제 때문이었다, 뭐 이런 이야기입니다.

<삼국유사> ‘기이·가락국기’에 등장하는 김수로왕 탄생신화. “서기후 42년 하늘에서 내려온 6개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중 한사람은 대가야의 왕이, 나머지 5사람도 가야의 임금이 됐다”고 했다.

■“임나일본부 찾겠다”고 큰소리 뻥뻥
말이산 고분군에는 1.9㎞ 정도되는 구릉에 127기의 대형고분(지름 10~35m)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즐비한 대형 고분 덕분에 함안은 일제강점기부터 주목을 끌었던 곳입니다. 
일제가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여기서 찾겠다”고 혈안이 되었죠. 예컨대 일본학자인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는 김해·함안 지역 조사에 나서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분명 여기에 있다. 내 손으로 임나일본부를 찾겠다’(<매일신보> 1915년 7월24일자)고 큰소리 뻥뻥 쳤습니다.
그러나 1910~17년 사이 4차례의 조사결과 구로이타의 장담은 헛소리로 판명됐죠. 
“막상 일본부라고 해도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 조사결과 일본부의 자취 사라져서 찾을 방법이 없는 게 유감이다.”
한마디로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통일신라 최치원(857~?)은 <석이정전>에서 흥미로운 대가야 전설을 전했다고 한다. 즉 “가야산신이 천신과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인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인 뇌질청예 등을 낳았다”는 것이다. 대가야왕과 금관국왕이 형제라는 이야기다.

■속속 밝혀지는 2인자의 위상 
그러나 이후에도 일제가 뒤집어쒸운 ‘임나일본부’의 악령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죠.
그러던 중 1992년 6월6일 아침 신문 배달 소년이 함안 도항리 아파트 신축공사장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을 발견해냅니다.
굴착기로 파헤쳐지기 일보 직전 가까스로 발견·신고한 철조각은 말갑옷이었습니다.
동수묘·삼실총·쌍영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묘사된 것과 거의 흡사한 말갑옷이었습니다. 고구려 벽화와의 친연관계를 볼 때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과 관련있는 유물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2018년 말에는 아라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는 가야리에서 높이 8.3m에 달하는 토성벽(잔존길이 2㎞ 정도)이 확인됐습니다.
왕궁터에서는 망루, 무기고, 강당, 내무반, 취사반 등 부대 건물터 14개동이 노출됐습니다. 수도방위사령부가 연상됩니다.
또 말이산 13호분에서는 전갈 및 궁수자리 등 125개의 별자리가 새겨진 무덤 덮개돌이 확인됐습니다. 
이중 6개의 별로 구성된 궁수자리는 북두칠성을 닮았다고 해서 ‘남두육성’이라도 하는데요. 북두칠성이 하늘과 죽음을 의미한다면, 남두육성은 땅과 생명을 뜻하죠. 13호분에서는 중국제 모방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제 허리띠장식과 일본 최고위무덤에서만 보이는 녹각제 칼손잡이 등이 출토됐습니다. 강한 국제성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죠. 

■금관과 청자
2021년 7월에도 말이산 45호분 출토 유물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금동관 조각들을 찾아냈는데요.  
무엇보다 이 금동관(길이 16.4㎝·높이 8.2㎝)이 백제나 신라로부터 받은 사여 혹은 수입품이 아니라 자체 제작품일 가능성이 짙다는 점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 아라가야산 금동관은 다소 거칠게 제작되었는데요. 
그러나 두 마리의 봉황(추정)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며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아라가야만의 디자인입니다. ‘출(出)’자나 사슴뿔 모양인 신라제나, 풀(꽃) 형태 장식인 대가야제와는 사뭇 다른 독창적인 금동관입니다. 4개월여 뒤(2021년 11월) 말이산 75호분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자가 또한번 화제를 뿌렸습니다.
5세기 중국 남조(유송·420~479)에서 제작된 연꽃무늬 청자그릇이 분명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천안 용원리와 서울 풍납토성, 영남 옥야리·내동리 등에서 출토된 청자그릇과 쌍둥이라 할만큼 깊은 친연관계를 보였답니다. 청자를 매개로 5세기 동북아시아에서 활발한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안라인수병의 정체
이와같은 발굴성과를 계기로 아라가야와 관련된 문헌기록이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우선 <삼국사기>의 아라국(안라국·아라가야) 관련 기사가 눈에 띕니다. ‘포상8국의 전쟁’ 기사인데요. 
<삼국사기> ‘신라본기·나해 이사금’조는 “209년(나해 이사금 14) 포상 8국의 공격을 받은 가라국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삼국사기> ‘물계자 열전’은 “포상 8국의 침입을 받은 나라는 (가라가 아니라) 아라”라고 상반되게 표현했습니다. 공격의 대상을 두고 <본기>는 ‘가라’, <열전>은 ‘아라’라고 달리 표현한 겁니다. 
지금까지는 이 포상8국의 전쟁이 안라(아라가야)의 배후지원 아래 골포(마산)·칠포(칠원)·고사포(고성)·사물국(사천) 등 8국이 가라(금관가야)를 공격한 사건으로 해석되었는데요.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안라, 즉 아라가야가 포상8국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라는 견해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맞든 안라국의 위상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증거해줍니다.
또하나 주목을 받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광개토대왕 비문>의 고구려 남정(400년) 기사 중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문구입니다. ‘고구려 남정기사’는 광개토대왕이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한 왜를 쫓아냈다는 내용인데요. 
그중 ‘안라인수병’의 문구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등장했죠. 그런데 요즘에는 ‘안라’를 ‘안라국(아라가야) 별동대’ 혹은 ‘안라국 수비대’로 해석하는 견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 안라국군대가 고구려·신라편인지, 백제·왜 편인지는 설왕설래 합니다.
어쨌거나 안라국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올 정도로 만만치않은 세력이었다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국제회의 주도한 안라
최근들어 아라가야의 위상을 영원한 2인자에서 1인자로 올리는 시도도 엿보입니다.
즉 <남제서> ‘동남이열전·가라’조에 “(479년) 가라왕 하지가 남제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보국장군 본국왕’에 제수했다”는 기사가 보이는데요. 지금까지는 남제의 작위를 받은 ‘가라왕 하지=대가야왕’이라는 해석이 통설이었는데요. 
후기 가야의 맹주가 대가야라는 고정관념 때문이었죠.
그러나 5세기 중후반 중국에서 제작된 청자가 말이산 고분에서 출토되자 새로운 해석이 나왔습니다.
<남제서>의 ‘가라왕 하지’는 대가야왕이 아니라 다름아닌 아라가야 왕을 가리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적극적으로 인용하기를 주저했던 <일본서기>의 아라가야(안라국) 관련 기록도 부각됩니다    
“임나는 안라를 형(兄) 혹은 아버지(父)로 여겨 오로지 안라의 뜻을 따른다”(<일본서기> ‘흠명기·544)’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가 안라(아라가야)를 형님으로 모신다는 얘기죠. 
<일본서기>를 보면 529년 남부 가야 제국이 안라국을 중심으로 자구책을 모색하고, 이에 안라가 백제·신라·왜의 사신을 초빙하여 새롭게 조성한 고당(高堂)에서 국제회의를 주도합니다.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고, 신라가 탁기탄(경남 밀양)을 멸망시키는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이 국제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안라(아라가야)가 당대의 국제정세를 주도한 유력한 나라였음을 암시해주죠. 

■최후의 몸부림
이 무렵(540년대) 가야연맹은 대가야(북부)와 안라(남부) 등 남북 이원체제로 굳어졌는데요. 
안라국은 541년과 544년 두차례에 걸쳐 6~7개 소국 대표들을 이끌고 백제의 사비(부여)에서 1·2차 국제 회담을 엽니다. 
하지만 두차례 사비회의는 백제와의 입장차 때문에 결렬되고 맙니다. 안라는 백제의 압력을 무력화시키려고 고구려와 밀통하여 고구려-백제간 독산성 전투를 유발시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백제군의 승리로 끝났고요.(548) 
이후 가야연맹은 백제의 부용국으로 전락하게 되죠. 
6년 뒤인 554년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는 등 대패하게 됩니다. 
이때 가야연맹 제국도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게 되었고요. 반백제 독립정책의 선봉에 섰던 안라국은 가야제국중 가장 먼저 신라에 투항합니다.(560) 그후 2년 뒤인 대가야가 멸망함으로써 가야의 5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고요.
여하간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가야역사가 새롭게 부각될 것 같은데요.
솔직하게 말해 가야에 대한 연구가 일천한 상태에서 세계유산에 등재된 감이 있어요. 예를 들면 전북 남원 유곡리·두락리 지역을 왜 가야 영역으로 묶는지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세계유산 등재가 가야사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네요.(이 기사를 위해 가야고분군 세계유산추진단의 하승철 조사연구실장과 최석화 연구원이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기사와 관련된 자문을 해주었습니다.)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수로왕에서 월광태자까지>, 푸른역사, 2002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3-왕들의 나라>, 푸른역사, 2004
주보돈, <가야사 새로 읽기>, 주류성, 2017
김경복·이희근, <이야기 가야사>, 청아출판사, 2010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2021
동아세아문화재연구소, <함안 말이산고분군 13호분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0
두류문화재연구원, <함안 말이산 고분군 정비사업부지내 유적>(학술조사보고서 50책), 2021
경상문화재연구원, <함안 말이산 고분군 57·128호, 석1호묘>(발굴조사보고서 89책),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