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근형·구구단·신세한탄·가요·망부가…백제 '빅5' 목간 열전
종이가 발명(혹은 개량 또는 완성)된 것은 기원후 105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는 오랫동안 폭넓게 쓰이지는 못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듯 나무(혹은 대나무)를 활용한 목간(혹은 죽간)이 보편적인 서사자료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책(冊)’이라는 한자는 목(죽)간을 매단 모습의 상형문자에서 비롯됐죠. ‘전(典)’자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죠.
사실 경제성과 내구성 측면에서 목(죽)간은 종이에 견줘 몇 수는 위였습니다.
왜냐. 목간은 주로 습기가 많은 우물이나 연못, 저수지, 배수지 같은 곳에서 집중 출토됩니다. 나무는 산소가 차단된 물 속에서 좀처럼 부식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 수천년 동안 보존될 수 있거든요.
■‘구구단·남근형’ 목간의 정체
해방 이후 지금까지 확인된 삼국~조선시대 명문 목간은 730여점 되는데요.
그중 오늘의 주인공인 백제영역에서 출토된 명문 목간은 100여점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빅4’ 목간이 있습니다. ‘구구단 목간’과 ‘남근형 목간’, 백제가요 ‘숙세가 목간’, ‘신세한탄 목간’입니다.
2011년 부여 쌍북리에서 확인된 구구단 목간은 ‘九〃八一 八九七□□ 七九六十三(9981 897□ 7963)…’이 쓰여있습니다.
국내에서 처음 출토된 ‘구구단’ 자료였죠. 단순히 적거나 외우려고 기록한 구구단 목간은 아닌 것 같고요. 관청에서 물품을 출납하면서 썼던 ‘실용 구구단 목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능산리에서 출토된 ‘남근형 목간’(22㎝)도 시선을 잡아 끌었죠. 목간에 새겨진 명문 중 ‘道□立立立’이라는 글자가 특히 남우세스러웠습니다. 가뜩이나 남근 형태의 목간인데, 또 굳이 ‘길에 서라(立)! 서라(立)! 서라(立)!’고 세번이나 강조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연구자들이 머리를 싸매 그럴듯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즉 남근형 목간은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나성의 대문 및 중심도로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아냈는데요.
그렇다면 백제인들이 지금의 서울 세종로 격인 사비(부여) 중심도로에서 ‘길의 신’에게 제사를 드린 것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겁니다. 예부터 남근은 나라의 안녕과 악신 및 질병의 추·예방을 위해 숭배되고 신성시됐거든요.
“이제 남근이 섰다! 섰다! 섰다! 그러니 사악한 귀신과 도깨비들은 썩 물렀거라!”
■‘백제 가요’에 ‘신세한탄 인사청탁’ 목간까지
또 하나는 역시 능산리에서 확인된 ‘좀 있어 보이는’ 목간인데요.
“숙세결업(宿世結業) 동생일처(同生一處) 시비상문(是非相問) 상배백래(上拜白來)”라는 명문이 돋보였어요.
공식적으로는 ‘숙세(전세)에 업을 맺었기에 (현세에) 함께 같은 곳에 태어났습니다. 잘잘못을 서로 물어(논하여) 우러러 절 올리며 사뢰옵니다’라고 해석되었는데요. 그러나 국문학자(김영욱 서울시립대 교수)은 색다르게 해석했습니다.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으로 우리 함께 한평생 살아가는데 세속의 시비 쯤이야 가려서 무엇하겠소.”
국문학자다운 맛깔스러운 해석이죠. 이렇게 되니 백제인 특유의 여유를 담은 소박한 가요로 읽힙니다.
영락없는 충청도 사람의 가요라는 겁니다. 이 ‘숙세가’ 목간은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백제 시가’라 할 수 있어요.
또 2010년 부여 구아리에서는 신세한탄과 함께 인사를 청탁하는 편지 목간이 확인됐는데요.
편지는 “이 몸이 빈궁하여 하나도 가진 게 없으며 벼슬도 얻지 못하고 있나이다(於此貧薄 一无所有)”라고 신세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인사청탁으로 이어져요. “좋고 나쁨에 대해서 화는 내지 말아달라(不得仕也 莫瞋好邪)”는 당부와 함께 “음덕을 입은 후 영원히 잊지 않겠다(荷陰之後 永日不忘)”하는 읍소로 마무리합니다.
문맥을 보면 편지만 보낸 것이 아니라 선물(혹은 뇌물)까지 함께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당서> ‘동이전·백제’조는 “관리가 뇌물을 받으면…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한다”고 했거든요. 만약 백제의 사법당국에 이 목간이 적발되었다면 해당관리는 평생 금고형을 받았겠네요. 재미로 따지면 이 ‘신세한탄’ 목간은 백제의 ‘빅4’에 충분히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난수표 같은 목간의 출현
지난 2022년 3~4월 부여 동남리 아파트 건설공사장에서 명문 목간 5점이 확인되었습니다.
3점은 물품에 붙이는 꼬리표였고요. 다른 2점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문서용으로 보이는 이 2점에는 마치 난수표처럼 무언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요. 4번에 걸친 전문가 자문회의와 판독회를 거쳐 겨우 단서를 찾았답니다.
당시 보도자료를 볼까요. ‘목간1’에서는 ‘날짜(12월10일)’와 ‘금(金)’자, 중량 단위를 뜻하는 ‘주(主)’자가 파악됐습니다.
‘주(主)’와 관련해서는 1971년 무령왕릉 출토 은제팔찌에서도 ‘230주(主)’라는 중량 표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출납’을 의미하는 ‘내(內)’와, ‘물품의 이동’을 뜻하는 ‘보낼 송(送)’ 혹은 ‘맞이할 역(逆)’자가 보였습니다. ‘재고 없음’을 지칭할 수 있는 ‘망(亡)’자도 파악됐습니다.
‘목간2’는 곡물의 일종인 ‘피(稗·고대 작물의 일종)’와 함께 ‘이동(送 혹은 逆)’, ‘연령 등급(丁)’, ‘사람 이름’, ‘용량 단위(斗)’ 등의 글자가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보도자료는 지금의 조달청 관리가 물품을 출납하면서 기록한 문서 혹은 장부로 파악했습니다. 또한 백제의 도량형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했습니다.
이 명문 목간에는 대중의 시선을 끌 ‘아이템’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보도자료는 “세로로 쓴 문서 행간의 빈 공간에 이음표(′)를 표시한 뒤 그 다음 줄에는 글자를 180도 돌려 거꾸로 써내려갔다”고 설명했습니다.
말하자면 현장 관리가 문서를 써내려가다가 공간이 없으면 빈쪽을 찾아 거꾸로 써서 이어나갔다는 뜻이죠.
■“금 줄테니 금제품 만들라”는 의미?
동남리 목간은 학계에서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속속 발표되는 연구자들의 발표논문을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명문이 잘 보이지 않는데다 워낙 소략한 일종의 메모 형식이었거든요.
연구자 나름대로 글자를 판독하고, 해석했지만 볼수록 미궁에 빠지더라고요. 그것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전달할 깜냥이 저한테는 없었습니다. 이용현 전 경북대 인문학술원 교수의 논문(‘백제 왕도 출납 문서의 일례’, <백제학보>43호, 백제학회, 2023)에서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보였는데요.
먼저 ‘목간2’에는 ‘피역(稗逆)’이라는 제목 아래 ‘와진(瓦進)+인명(人名)+정(丁·성인남성)+5두(五斗)’의 서식으로 모두 8명(앞·뒷면 각 4명씩)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와진(瓦進)’은 기와를 제작하는 실무 일꾼을 뜻하고요. 따라서 ‘목간2’는 ‘기와 제작에 동원된 실무인력 8명에게 각각 피(곡물) 5두씩 지급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메모장이라는 거죠.
그럼 ‘목간1’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금공품 담당 관리가 금(金)의 출납과 사용처를 기록한 문서라 해석합니다.
앞면은 ‘날짜(월일)과 망(亡·금이 출납되어 없어짐)+부역(夫逆·기술자인 부가 수령해감)+금(金)+양주(兩主·금의 수량 단위)’ 형식과, ‘날짜(월일)+내납(內納·금이 납입됨)’ 형식으로 되어 있고요.
뒷면은 ‘물품명+작용(作用·만드는데 소요된)+금(金)’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물품을 만드는데 쓴 금이 얼마’라는 내용인데요. ‘금으로 만든 제품’이니 ‘어떤 물품=금공품’이 된다는 겁니다.
이 ‘목간1’에는 금의 출납과, 제작 완성품의 납입 과정이 최소 6차례(11월8~12월20일)에 걸쳐 적혀있습니다.
그때마다 ‘릴레이식’으로 기록했고, 쓸 공간이 모자라면 옆의 빈자리를 찾아 ‘돌려쓰기’ 했다는 겁니다.
이용현 교수는 “각 행의 기록마다 서체와 붓의 농담(짙고 옅음)이 약간씩 다르다”면서 “이것이 한번에 쓴 것이 아니라 여러번에 걸쳐 나눠 썼음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돌려쓰기 신공’ 발휘
이용현 교수의 설명 중에 웃음보가 터진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돌려 쓸 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아보기 쉽게 55도(金)~80도(日) 정도로 각도를 틀어 방향을 표시했다는 겁니다.
정말 ‘목간1’의 앞 뒷면 맨 아랫 부분의 글자(日과 金)를 보면 옆으로 뉘어져 있습니다.
나중에 볼 때 헷갈리지 않게 ‘내가 거꾸로 돌려쓴 내용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표시해둔 겁니다.
1400년전 백제인의 ‘깨알 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이용현 교수의 논문에서 대중성의 일단을 보았습니다.
■급히 소환된 ‘관산성 전투’
얼마전 서체연구자인 손환일 한국서화문화연구소장의 논문이 학술지(‘부여 동남리 목간의 서체와 내용’, <백제연구> 78호, 충남대백제학연구소, 2023년8월)에 실렸는데요. 논문의 부제(‘관산성 전투와 백제급료 지급 기록’)가 제 눈길을 잡아 끌더군요. 먼저 관산성 전투를 살펴볼까요. 워낙 유명하죠. 신라에게는 영광을, 백제에게는 악몽을 안겨준 전투였죠.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413~491)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면서(475)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죠.
그러다 다시 보다 넓은 평야지대를 찾아 사비(부여)로 옮겨 중흥을 꾀합니다.(538)
성왕(523~554)은 신라 진흥왕(540~576)과 손잡고 북벌을 단행했고, 한강하류 6개군을 점령하죠. 그러나 553년 진흥왕의 배신으로 천신만고 끝에 이룬 고토수복의 꿈은 산산조각나죠.
이때 성왕의 아들인 창(위덕왕)이 복수의 칼을 가는데요.
부득이 <일본서기>를 인용하자면 “태자인 여창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정벌을 고집했다”고 했답니다.
이때 원로대신들이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만류했지만 여창은 “늙었구려. 어찌 겁을 내시오”라 하면서 출전을 고집했답니다. 급기야 554년 7월 태자가 가야 연합군까지 동원하여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는데요.
그러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지키던 신주 주둔의 군대까지 빼돌려 관산성 포위에 나섰습니다.
전황이 심각해지자 아버지(성왕)는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서는데요. 하지만 성왕은 관산성 근처에서 신라 매복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맙니다. <삼국사기>는 “554년 7월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좌평(장관) 4명과 연합군 2만9600명이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때 천신만고 끝에 사지를 빠져나온 태자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이가 창왕(위덕왕·554~598)이었습니다.
■‘망’, ‘부’보다 ‘망부(죽은 남편)’
대체 이 동남리 명문 목간과 관산성 전투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건가요.
손환일 소장은 6~7세기 유행한 중국 남북조의 필법과 동남리 목간의 서체를 비교·분석해서 글자를 판독해나갔는데요.
출토된 목간 5점 가운데 가장 핵심인 ‘목간1’을 중심으로 볼까요.
판독결과 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간지, 즉 ‘갑술(甲戌)’을 읽었답니다. 확실하게 보이는 ‘갑(甲)’ 자 다음의 글자는 초서체로 쓴 ‘술(戌)’자가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목간의 제작연대는 ‘갑술년’이라는 얘기죠.
역시 초서로 쓴 ‘성(成)’자도 보이고요. 그에 따라 ‘성련금(成鍊金·금을 정련했다)’는 의미로 고쳐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보입니다. 보도자료에 ‘인경(因涇)’으로 해석된 구절은 ‘국경(國經·국가가 주도한 불교사경 제작)’으로 고쳐보았습니다.
사실 한문은 어디서 끊어 읽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천양지차가 됩니다.
동남리 목간의 경우 그동안 ‘망(亡)’과 ‘부(夫)’자를 떼어놓고 ‘망’은 ‘재고없음’, ‘부’는 ‘기술자’로 따로따로 해석했고요.
‘역(逆)’자 역시 ‘송(送)’자로도 읽혀 물품의 출납을 의미하는 ‘돌려받다(逆)’와 ‘보내다(送)’ 등으로 해독되었는데요.
그런데 손환일 소장은 ‘망부(亡夫)’를 문자 그대로 ‘죽은 남편’으로 해석했고요.
‘역(逆)’은 ‘금(金)’자와 붙여 ‘역금(逆金·정련되지 않은 금)’으로 판단했습니다.
■‘망부=관산성 전사 좌평 4명?’
그래놓고 ‘목간1’을 해독하면 대강의 내용이 파악됩니다.
“갑술년 11~12월 사이, 망부(죽은 남편) 1·2·3·4, 즉 4명을 위한 ‘사경 제작’에 쓰일 ‘정련되지 않은 금’(역금)을 궁궐에 바쳤다. ‘사경 제작은 국가주도로 이뤄졌다’(국경)”는 겁니다.
목간에는 부인 4명이 두 달 사이에 죽은 남편을 위해 바친 금의 양이 일자별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적게는 2냥(26g)에서 많게는 5냥(65.25g)까지 차이가 납니다. 모두 합하면 12냥13주(166g)에 이르죠.
궁금하죠. 왜 이 부인 4명은 죽은 남편 4명을 위해 이만한 금을 국가에 바친 걸까요.
이 대목에서 554년, 바로 ‘갑술년’에 일어난 ‘관산성 전투’가 소환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성왕’조는 “554년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좌평(장관) 4명과 연합군 2만9600명이 죽었다”고 했죠. 이 대목입니다. 좌평 4명…. 동남리 목간의 ‘망부’ 4명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좌평 4명’일 가능성을 제기한 겁니다. 물론 100% 맞냐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어느 사료에도 정답이 나와있지 않으니까요.
■‘난수표 목간’이 ‘빅4 목간’으로?
그러나 성왕의 뒤를 이은 창왕(위덕왕)이라면 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창왕은 관산성 전투의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할 분입니다.
<일본서기>는 “왕위에 오른 뒤 패전을 자책하던 창왕은 555년 8월 신하들에게 ‘출가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잘못을 뉘우쳤으면 됐다”면서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키고, 왕은 갖가지 공덕을 이루라”고 달래죠. 출가를 단념한 창왕은 잇달아 사찰을 창건하고 죽은 이의 혼을 달래며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고 애씁니다.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그 증거가 나왔죠. 출토된 사리감에서 ‘창왕 13년(567), 왕의 누이(성왕의 딸)가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절은 창왕(위덕왕)이 죽은 아버지(성왕)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해석됩니다. 10년 뒤(577)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를 건립합니다. 동남리 명문 목간 역시 창왕의 불사와 연결지을 수 있답니다.
창왕이 관산성 전투(554년 7월)에서 순국한 원혼을 달래려고 ‘국가 주도의 사경 불사’(국경·國經)를 위해 금을 모았고요. 그때 전사한 4좌평의 부인이 거액의 금을 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스토리라면 동남리 출토 목간은 백제의 ‘빅4’ 목간에 꼽힐 수도 있겠네요. 뭐 어떤 분은 그러실 지 모르겠네요.
난수표 같은 글자 몇 자로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냐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출토유물을 단서로 그럴 듯한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것 또한 연구자나 기자의 몫이죠. 시쳇말로 얘기가 되는 논문이나 거리가 되는 주장 및 견해가 있다면 저는 냉큼 받아 소개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이 기사를 위해 이용현 전 경북대 인문학술원 교수와 손환일 한국서화문화연구소장, 고상혁 동국대WISE캠퍼스 겸임교수, 황창한 울산문화재연구원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손환일, ‘부여 동남리 출토 목간의 서체와 내용’, <백제연구> 78호, 충남대백제학연구소, 2023
이용현, ‘백제 왕도 출납 문서의 일례-부여 동남리49-2 유적 목간1, 2의 분석시론’, <백제학보>43호, 백제학회, 2023
고상혁, ‘부여 동남리 49-2번지 신출토 목간 소개’, <신출토 문자자료의 향연>(한국목간학회 38회 정기발표회), 2023
울산문화재연구원, <부여 동남리(49-2번지) 공공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 문화재 시굴·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윤선태,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주류성, 2007
정훈진, ‘사비도성에서 발견된 구구단 백제 구구표 목간’, <한국의 고고학> 통권 32호, 2016년 6월
김영욱, ‘백제 이두에 대하여’, <구결연구> 제11집, 태학사, 2003
국립부여박물관, <백제목간>, 소장품조사자료집, 국립부여박물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