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명량 발굴 ‘소소승자총통’…소총부대장 출신 이순신과는 어떤 관계?

이기환기자 2024. 6. 25. 21:15

‘40억원대 고려청자 1억원에 팔려던 잠수부 도굴단 덜미…’. 2011년 11월18일 기막힌 문화유산 도굴범 기사가 각 언론에 실렸다. 도굴범들은 해삼·어패류를 채집하던 잠수부들이었다. 이들이 불법 인양한 문화유산 30여점 가운데는 13~14세기 보물급 유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도굴범들이 덜미가 잡힌 이유가 어이없었다. 보통 바닷속에서 인양되는 유물에는 이끼류와 패각류 등이 붙어있기 마련이다. 이 경우 ‘아주 묽게 희석시킨 염산’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야 한다.

1588년판 ‘개인화기’

2012년 명량대첩 해역인 전남 진도 고군면 앞바다에서 인양된 조선시대 총통 3점에는 ‘소소증자총통’이라는 명칭과 함께 1588년 4월 전라 좌수영에서 장인 윤덕수가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염산을 들이 부었다

하지만 조급했던 도굴범들은 묽게 희석시키지 않은 강염산으로 유물을 마구 닦아댔다. 그러자 청자 본연의 미가 퇴색되었고, 표면에 바른 유약까지 벗겨져 나갔다. 이게 문제가 되었다. 밀거래 과정에서 가격이 뚝 떨어졌고, 도굴범과 거간꾼, 구매자 간 갈등이 빚어졌다. 덕분에 문화유산 사범단속반이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거래 현장을 잡을 수 있었다.

이들이 암약한 곳은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명량)에서 4.3㎞ 정도 떨어진 전남 진도 고군면 일대 해역이었다.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도굴범들이 지목한 지점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중발굴조사에 들어갔다.(2012년 9월)

예상대로 12~13세기 강진 및 해남산 고려청자가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2% 부족했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물이 혹시 보이지 않을까.

염산 뿌린 도굴범들

2011년 명량대첩 해역에서 잠수부 도굴단에 의해 불법 인양된 13~14세기 청자들. 도굴범들은 불법 인양된 유물에 붙은 패각류와 이끼류를 염산으로 닦아냈다. 그 바람에 청자 표면의 유약이 벗겨나가고, 청자 본연의 멋을 일었다. 이들이 덜미가 잡히는 바람에 도굴지점이 특정됐고, 국립해양유산연구소의 정식 발굴 끝에 소소승자총통이 확인됐다.|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윤덕수의 1588년 작 개인소총

긴급 발굴이 시작된지 두 달 여가 지난 2012년 11월12일 아침이었다.

조사해역은 울돌목의 거센 조류에 갯펄이 물에 뒤엉켜 시야가 10~20㎝ 정도가 될 정도로 확보되지 않는 곳이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해저를 더듬어가며 청자통형잔을 수습한 잠수사들이 불쑥 솟아오르는 물체 하나를 잡았다. 잠수사들이 배(씨뮤즈호)에 올려놓은 물체는 청동 총통(조선시대 화약무기) 이 분명했다.

손잡이 부분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총통 인양 지점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다. 19일과 21일에도 같은 종류의 명문 총통이 인양되었다. 분석 결과는 놀라웠다.

이순신 장군의 해역

소소승자총통이 인양된 곳은 명량대첩(1597년 9월16일)의 현장인 울돌목(명량)에서 4.3㎞ 정도 떨어진 전남 진도 고군면 일대 해역이었다. 또한 명량대첩의 전초전인 벽파진 해전(9월7일)의 현정이기도 하다.|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3점의 총통은 길이(57.3~57.8㎝), 무게(1920~2020g), 총구 내경(1.3㎝)이 거의 일정했다.

‘만력 무자년(1588년·선조 21) 4월 (전라) 좌수영에서 만든 소소승자총통…장인 윤덕수(萬曆戊子 四月日左營 造小〃勝字…匠尹德水)’라는 명문내용은 같았다. 3점의 총통 안에 흙과 종이, 화약 등이 확인됐다.

종이(지환)는 화약에 불을 잘 붙게 만들고 화약을 다져주기 위해 넣는 물질이다. 흙은 무엇일까. 폭발가스의 누출을 막으려 약실과 총열 사이의 틈을 메워준 진흙(토격)의 잔재일 수 있다. 이 총통 3점은 발사 직전에 바다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총통 외에도 임진왜란 당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 돌탄환(석환·石丸)도 6점 확인됐다. 지름 8.5~9.8㎝ 정도인 석환은 크기로 보아 대형화포 중 하나인 지자총통(地字銃筒)에서 쏜 것으로 추정된다. 지지대를 갖춘 기계식활(쇠뇌)의 부속품인 방아쇠(노기)도 인양되었다.

해전의 추억

임진왜란 당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 돌탄환(석환·石丸)도 6점 확인됐다. 지름 8.5~9.8㎝ 정도인 석환은 대형화포 중 하나인 지자총통(地字銃筒)에서 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지지대를 갖춘 기계식활(쇠뇌)의 부속품인 방아쇠(노기)도 인양되었다.|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승자총통 개발자 ‘김지’

인양된 소소승자 총통은 조선시대 휴대용 개인화기인 ‘승자총통’ 계열의 무기다.

이들 승자계열의 총통이 개발된 것은 16세기 후반이었다. 남으로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고, 북으로 여진의 위협이 가시화하자 신무기 개발을 고심하게 되었다. 이때 전라·경상 병사를 지낸 김지(1540~?)가 제작한 신무기가 바로 ‘승자총통’이다,

“작고한 병사 김지가 새로 만든 승자총통이 북방의 사변에서 적을 물리칠 때 많은 힘이 되고 있다. 상(선조)이 김지에게 증직을 명하고 그의 아들에게 관직을 제수했다.”(<선조실록> 1583년 6월11일)

조선시대 소총

발굴 인양된 소소승자총통 3점은 길이, 구경, 무게가 거의 같았다. 특히 총구의 내경은 1.3cm로 같았다.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김지가 언제 승자총통을 개발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존하는 실물 유물 중 1575·1577년에 제작된 승자 및 소승자 총통이 보인다. 최소한 1570년대에 만든 무기임을 알 수 있다. 개발된 승자총통이 위력을 발한 전투가 1583년 1~8월 이어진 ‘니탕개의 난’이다. 귀화 여진인인 니탕개 등이 이끄는 여진족 3만여명이 함경도 북부를 침입했다.

“오랑캐 무리가 종성부성을 포위했다…성 위에 있던 아군이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오랑캐가 성 아래로 몰려왔다. 아군은 그 틈을 이용하여 총(승자총통)을 난사하여 철환을 비오듯 퍼부으니 오랑캐들이 패주했다.”(<선조실록>1583년 5월17일)

또 1588년 여진전 정벌을 주도한 북병사 이일(1538~1601)도 “적을 제압하는데 승자총통 만한 것은 없다”고 극찬했다.

아녀자용 총?

세종 연간에 개발된 조선판 ‘권총’인 세총통. 길이 13cm에 구경은 0.9cm에 불과했다. 철흠자라는 집게를 손잡이로 사용했다. 새총 같기도 하다. <세종실록>은 ‘아녀자도 쏠 수 있다’고 설명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다연발 화살총

김지의 ‘승자총통’은 과연 어떤 무기였을까. 사실 조선은 개국초부터 개인 화약 무기 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세종 연간에는 다양한 소형화기를 제작했다. 화약 추진체로 화살 2개, 4개, 8개를 한꺼번에 쏘는 쌍전·사전·팔전총통 등 일발다전 총통을 개발했다. 그중 길이 13㎝, 구경 0.9㎝에 불과한 ‘세총통’은 ‘조선판 권총’이었다.

조선판 다연장로켓포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 연간(1451년) 개발된 신무기도 있었다. 화약 추진으로 화살 100발을 한번에 쏠 수 있는 다연장 로켓발사기(신기전기 화차)와 사전총통 50개 이상을 장착해서 화살 200개를 동시에 발사하는 사전총통기 화차가 그것이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세종실록>은 “1437년(세종 19) 군기감이 만든 세총통(細銃筒)은 (적정을 살피는 정탐꾼은 몰라도) 말 위에서 싸우는 기병에게 매우 편하고, 위급 시 어린아이나 여성들도 쏠 수 있다”(6월27일)고 설명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 연간(1451년) 개발된 신무기도 있었다. 화살 100발을 한꺼번에 쏠 수 있는 다연장 로켓발사기(신기전기 화차)와 사전총통 50개 이상을 장착해서 화살 200개 이상을 동시에 발사하는 시전총통기 화차가 그것이었다. 또 이시애의 난(1467) 이후 개발한 신제총통과 복전총통, 육총통, 주자총통, 측자총통 등이 있다.

‘화살전용’ 화약무기

조선은 개국초부나 개인화약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화약 추진체로 화살 2개, 4개, 8개를 한꺼번에 쏘는 쌍전·사전·팔전총통 등 일발다전 총통을 개발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나무 대신 진흙 사용

그런데 조선 전기에 개발된 개인화기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화살용’이라는 것이다.

‘화약의 추진력으로 화살을 한꺼번에 정확하게 많이, 멀리 쏘는 것’이 무기개발의 목표였다.

그러나 김지의 승자총통은 달랐다. 화살보다는 쇠탄환(혹은 납탄환)을 쏘기 위해 제작된 개인소총이었다.

화살추진 원리

조선 전기의 개인화기는 화살전용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화약의 추진력으로 화살을 한꺼번에 정확하게 많이, 멀리 쏘는 것’이 무기개발의 목표였다.

‘승자총통’은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고 손으로 화약선에 불씨를 붙여 최다 15발에 달하는 쇠탄환(혹은 납탄환)을 발사하는 구조였다. 기존의 화살 총통에서는 터지는 화약이 새어 나가지 않고, 발사하는 힘을 몰아주고 위해 격목(나무 장치)을 끼워넣었다. 그러나 승자총통에는 격목 대신 토격(진흙)과 종이를 쇠탄환과 함께 다져넣었다.

승자총통의 개발

1570~80년대 전라·경상 병사를 지낸 김지(1540~?)가 개발한 신무기인 ‘승자총통’. 개발되지마자 1583년 1~8월 이어진 ‘니탕개의 난’에서 큰 효험을 보았다. 조선군은 성문 앞으로 몰여오는 여진족에게 승자총통 세례를 퍼부어 패주시켰다.

이렇게 발사 보조장치를 바꾼 의미는 컸다. 발사 때마다 규격에 맞는 격목을 구하고 다시 끼우느라 낭비했던 시간과 정력이 대폭 줄어들었다. 구하기 쉬운 진흙을 다져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게다가 폭발하는 화약이 새지 않게 밀폐시키는 효과도 컸다. 그러니 장전시간이 한결 빨라지게 되었다. 총신도 기존 총통보다 2~3배 길어졌다. 그러니 사거리도, 정확도도 개선됐다. ‘승자총통’의 경우 화약 1냥으로 쇠탄환 15개를 발사하는데, 사거리가 600보(1보 : 125cm)에 달했다.(<화포식언해>) 승자총통으로 여진족의 소요를 막는데 큰 효험을 본 조선 조정은 다양한 승자총통 계열의 무기를 개발제작했다. 그 종류도 차승자·소승자·중승자·대승자·별승자 총통 등으로 분화한다.

‘쇠탄환’ 위주의 개인소총

‘승자총통’은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고 손으로 화약선에 불씨를 붙여 3~15발에 달하는 돌 및 쇠탄환을 발사하는 구조였다. |국립진주박물관 설명자료

■지향사격으로 난사

이 중 가늠자와 가늠쇠, 고리장치가 달려있는 소승자총통이 눈길을 끈다. 승자총통은 기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불을 붙인 심지가 타들어가 화약이 터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왜군의 주력화기는 사수가 방아쇠를 당겨 불심지를 화약에 점화하는 조총이었다. ‘조준사격’이 가능했던 조총에 비해 승자총통은 ‘지향사격’만 할 수 있었다.

진흙 장전장치

조선 전기의 ‘화살전용’ 총통에는 화살추진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화약과 화살 사이에 격목(나무)을 끼워넣었다. 그러나 김지가 개발한 승자총통에서는 격목 대신 진흙과 종이 등을 탄환과 함께 채워넣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소승자총통은 그러한 승자총통의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기 위해 ‘조총의 장점’을 도입한 개량무기였다.

가늠자와 가늠쇠가 설치되어 있고, 총받침대(일종의 개머리판)를 달아 나름 조준사격을 꾀하려 했던….

그렇다고 격발시점을 나름대로 조절할 수 있던 조총의 성능은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승자총통의 장점도 있었다.

나무 대신 진흙

조선전기 삼총통에 쓰인 격목. 승자총통의 개발과 함께 격목 대신 진흙을 사용하자 발사 대마다 격목을 구하고 다시 끼우느라 낭비한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한번에 적게는 3발에서 많게는 15발씩 난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몰려드는 적군을 방어하는 수성전에서 효용가치가 있었다. 1583년 벌어진 ‘니탕개의 난’ 때 종성부성을 공격하던 여진군이 승자총통의 난사를 받아 전멸된 사례가 그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대표적인 승첩인 행주대첩(1593년 2월12일) 때도 그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1만여명의 왜군 기병이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돌격했다…우리 군사들이 대·중·소 승자총통과 진천뢰 등 각종 화기를 쏘자 왜군의 전사자가 130여 명, 부상자가 100여 명 되었다…”(<선조실록>)

기중 새롭게 개발된 소승자총통은 비록 작아진 구경(1.3~1.7㎝) 때문에 쏘는 탄환도 2~3개로 줄었지만 정확도와 비거리는 더욱 향상되었다.

조준사격 가능한 조총

승자총통은 기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불을 붙인 심지가 타들어가 화약이 터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왜군의 주력화기는 사수가 방아쇠를 당겨 불심지를 화약에 점화하는 조총이었다. 사수가 발사 시점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기에 조준사격이 가능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문헌에도 없는 소소승자총통

2012년 인양된 ‘소소승자 총통’은 명칭으로 보아 소승자 계열의 총통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소소승자 총통’과 관련된 문헌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소승자 총통’에서 관찰되는 가늠쇠와 가늠자, 개머리판 부착장치 등도 없다.

그렇다면 1570년대 개발한 ‘소승자총통’보다 1588년 제작된 ‘소소승자총통’의 질이 되레 떨어진 것일까.

조총의 장점 도입

‘조총의 장점’을 도입한 개량무기가 소승자총통이었다. 가늠자와 가늠쇠가 설치되어 있고, 총받침대(개머리판)을 달아 나름 조준사격을 꾀하려 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당대의 무기 제작자들은 여러 전투상황에 맞게 다양한 승자총통을 개발했다. 조총의 장점을 도입한 ‘소승자총통’이 전가의 보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는 조총처럼 방아쇠를 갖춘 격발장치가 개발되지 못한 때였으니까…. 아무리 정교한 소승자총통을 만들어봐야 조준사격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1588년 윤덕수 장인은 가늠자와 가늠쇠, 개머리판 설치장치 등을 없애 무게를 빼고 구경도 줄인 새로운 총통(소소승자)을 개발했을 것이다.

소소승자 총통은 현재까지 알려진 승자계총통 중에서도 구경(1.3㎝)이 가장 작다. 발사하는 탄환 수를 단발(1발)에 가깝게 줄이면서 정확도를 향상시키기 위함이었다.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소소승자총통을 위한 별도의 고정장치도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단다.

조총, 소승자총, 소소승자총의 차이

조선의 무기 제작자들은 여러 전투상황에 맞게 다양한 승자총통을 개발했다. 1588년 윤덕수 장인은 가늠자와 가늠쇠, 개머리판 설치장치 등을 없애 무게를 빼고 구경도 줄인 새로운 총통(소소승자)을 개발했을 것이다.

■소총부대장 이순신

여담이지만 이순신 장군 하면 먼저 해군이 떠오르고 삼도수군통제사의 직함이 눈에 아른거린다.

장군이 한때 소총부대, 즉 승자총통 부대의 소대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즉 이순신은 1587년(선조 20) 10월 북병사 이일의 모함으로 장형을 받은 뒤 첫번째 백의종군의 명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군이 1588년(선조 21) 1월27일 두만강 상류 녹둔도를 점거한 여진의 시전부락을 토벌할 때였다. 이순신은 이때 승자총통 등으로 무장한 소대를 이끌고 참전해 공을 세웠다. 당시의 시전부락 토벌내용을 그린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에는 ‘우화열장’ 직함의 이순신 이름이 적혀있다.

소총부대장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첫 번 째 백의종군 때 벌어진 여진의 시전부락 토벌전(1588)에서 승자총통 등으로 무장한 소대를 이끌고 참전해 공을 세웠다.|육군박물관 제공

■벽파진 해전에서?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넋이 서린 명량해역에서 인양된 소소승자총통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수장된 것일까.

그렇다면 1597년 9월7일 벌어진 벽파진 해전을 떠올릴 수 있다. 벽파진 해전은 칠천량 패전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 장군이 벌인 두번째 전투이다. 또한 9일 뒤에 발발한 명량대첩의 전초전 성격으로 치러진 전투이기도 했다.

벽파진 해전일까

2012년 출토된 소소승자 총통은 언제 수장된 것일까. 먼저 인근해역에서 벌어진 벽파진 해전을 떠올릴 수 있다, 벽파진 해전은 9일 뒤인 16일 발발한 명량대첩의 전초전 성격으로 치러진 전투이기도 했다.

“9월7일 우리 배가 접근해오는 적선 13척을 공격했다. 달아나는 적선을 쫓은 뒤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밤 10시 적선이 포를 쏘며 공격했다. 나(이순신)는 ‘겁먹지 마라’는 엄명을 내렸고, 내가 탄 배가 적선 앞에서 포를 쏘자 적선이 물러났다.”

2012년 인양된 소소승자총통과 석환(돌탄환), 그리고 쇠뇌의 부속품(노기·방아쇠)이 이 벽파진 해전 당시 수장된 것일 수 있다. 또한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 직전(9월14일)까지 이곳 벽파진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둔 중, 혹은 이동간 해저에 묻힌 유물일 가능성도 있다.

명량해전의 증언

1597년 9월16일 왜선 130여척이 명량해협을 향해 진군하자 단 13척으로 무장한 조선 수군도 즉각 반격에 나선다. 이순신 장군은 급히 노를 저어 돌진하면서 지자포와 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댔다. <난중일기> 1597년 9월16일자는 “마치 총통이 발사되는 광경이 바람과 우뢰 같았다. 우리 군사들이 배 위에서 빽빽하게 서서 빗발치듯 쏘아대니 적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고 썼다.

■명량해전에서?

발굴 인양지점에서 4.3㎞ 떨어진 울돌목(명량)은 어떨까.

9월16일 왜군이 130여척을 이끌고 울돌목으로 진격하자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 13척도 맞서 나갔다.

이미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다”고 선언한 장군은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死卽生)살기를 도모하면 죽는다(生卽死)”고 외쳤다. 장군은 솔선수범, 급히 노를 저어 돌진하면서 지자포와 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댔다. <난중일기> 1597년 9월16일자는 “마치 총통이 발사되는 광경이 바람과 우뢰 같았다. 우리 군사들이 배 위에서 빽빽하게 서서 빗발치듯 쏘아대니 적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고 썼다. 장군이 앞장 서자 다른 장수들이 앞다퉈 나섰다.

13척의 배로…

조선군은 왜군을 향해 총통을 빗발치듯 쏘아댔고, 아군을 공격하던 적선 3척이 모조리 전복됐다. 왜군은 결국 133척 가운데 30여척을 잃고 패주하고 말았다. 그후 다시는 조선군 진영을 넘보지 못했다.

“적선 3척에 탄 왜적들이 거제현령 안위(1563~?)의 배에 매달려 서로 올라가려 했다…안위 군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웠고…나(이순신)는 배를 돌려 곧장 반격해서 각종 총통을 빗발치듯 쏘았다. 그러자 적선 3척이 모조리 전복됐다.”

결국 왜군은 출전한 133척 가운데 30여척을 잃고 패주하고 만다. 이후 왜군은 다시 조선 수군을 넘보지 못했다. 13척의 배가 이룬 실로 역사적인 승전보였다. 그렇다면 소소승자 총통과 석환, 노기 등도 격전의 와중에 해저로 빨려들어간 유물이 아닐까. 물론 인양 지점이 명량해전이 벌어진 울돌목과 다소 떨어져 있다는 것이 적극적인 해석을 주저하게 만든다.

하지만 명량대첩로 해역 수중 유적은 여러 유물이 서로 뒤엉켜 발견된다는 특징이 있다. 빠른 물살과, 그에 따라 생기는 소용돌이 현상 때문이다. 어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울돌목에서?

소소승자 총통과 석환, 노기 등도 명량해전의 와중에 해저로 빨려들어갔거나 이동간에 빠진 유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이 빠른 유속을 타고 벽파진 부근까지 밀려갔을 수도 있다.

■진품의 확증, 코어받침대

2021년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발굴 인양한 소소승자총통 3점을 보물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심의기구인 문화재위원회가 두 번이나 ‘보류’ 판정을 내렸다. 한번은 ‘과학적인 조사의 필요성’ 때문에(2023년 7월), 또 한 번은 ‘총통의 제작 체계와 제작과정, 명문 등의 내용 보완 및 검토 필요성’(2024년 2월) 등을 이유로 내세웠다.

그중 첫번째 보류 이유로 꼽은 과학적인 조사는 지난해 말(2023년 12월) 완료됐다.

총통제작의 열쇠

소형총통은 주조할 때 코어가 한 가운데 정확하게 서있지 않으면 총신이 비뚤어진다. 이것을 막기 위해 코어를 정확하게 고정시켜주는 맞물림 코어받침대를 설치한다.|허일권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소형총통은 거푸집을 반으로 나누어 제작하고, 총구 내부를 만들기 위해 코어(내형)를 사용한다. 그런 다음 거푸집과 코어 사이에 쇳물을 부어 총구가 난 총통을 제작한다. 그런데 주조 때 코어가 한 가운데 정확하게 서있지 않으면 총신이 비뚤어진다. 이것을 막기 위해 코어를 정확하게 고정시켜주는 맞물림 쇠(M, L자형)를 설치한다. 코어받침쇠(채플릿)이다.

그런데 주조 때 이 코어받침쇠가 설치된 채로 쇳물을 붓기 때문에 총통의 몸체 내부에 그 흔적이 남는다.(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총의 길이가 길어지는 조선 중기 이후의 소형 총통에 예외없이 관찰되는 흔적이다.

그런데 CT(컴퓨터단층촬영) 조가셜과 인양된 소소승차 총통 3점에게도 그런 코어 받침쇠가 비슷한 위치에서 예외없이 보였다. 가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조의 흔적

주조 때 이 코어받침쇠가 설치된 채로 쇳물을 붓기 때문에 총통의 기벽 속에 그 흔적이 남아있는다. 총의 길이가 길어지는 조선 중기 이후의 소형 총통에 예외없이 보이는 흔적이다.|허일권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설명

■가짜 총통의 망령

또 승자계열의 총통 유물 가운데 해저에서 발굴 인양된 케이스는 딱 한군데 였다.

1994년 해군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이 전남 여수 신덕동 백도 근해에서 인양한 별양자 총통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보물지정이 계속 보류된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소소승자 총통과 관련된 문헌자료가 없고, 심화연구가 필요한 측면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마도 1992~1996년 세상을 들썩거리게 만든 ‘가짜 총통’ 사건의 악령 때문이리라.

1992년 8월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인양했다는 ‘귀함별황자 총통’은 일사천리로 국보(제274호)로 지정됐다.

진품 인정

2012년 인양된 소소승자총통에도 다른 소승자총통에서 확인되는 코어받침쇠의 흔적이 보였다. 진품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허일권 학예사 제공

‘거북선에 장착한 화포가 발견됐다’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었으니 국보 중 국보로 평가받을 만했다. 그러나 이 총통은 어이없게도 4년 만(1996)에 국보에서 전격 해제된다. 승진에 눈이 먼 이충무공 해전유물발굴단장(대령)이 가짜총통을 바다에 밀어넣고는 이를 인양한 것처럼 속인 사실이 적발됐다. 그런데 이 사건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이 여파 탓일까. 국립기관(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이 직접 발굴하고, 과학조사까지 마쳐 진품으로 확인된 소소승자총통의 보물지정이 늦어지고 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국내 수중 발굴의 염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거북선이나, 혹은 판옥선이라도 해저에서 건져내는 것이다. 그런 숙원을 위해 오늘도 해저발굴에 나선다.

(이 기사를 위해 허일권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노영구 국방대 교수, 양순석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유물과학팀장, 이규훈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수중발굴과장, 최영창 국가유산진흥원장, 장한울 육군박물관 학예담당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문화유산청, <2024년 문화재위원회 1차 회의록>, 2023년 2월

국립해양문화유산연구소,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5

국립진주박물관, <조선무기 조사연구보고서:소형화약무기>, 2019

최영창, ‘화약무기의 기원과 발전’, <조선무기 조사연구보고서:소형화약무기), 국립진주박물관, 2019

허일권·김해솔, ‘국내 소형총통류의 형태변화와 제작기술’, <조선무기 조사연구보고서:소형화약무기), 국립진주박물관, 2019

국립진주박물관, <화력조선>(조선무기 특별전 전시도록), 2021

노영구, ‘조선전기 화약무기의 추이’, <화력조선>, 국립진주박물관, 2021

박제광, ‘임진왜란기 조선 수군의 화약병기’, <진도명량대첩로 해역 수중발굴조사보고서>, 국립해양유산연구소, 2015

허일권, ‘조선 청동제 소형 총통의 제작 기술’, 공주대 박사논문,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