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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마지막왕이 의자왕?…아니다. 32대 풍왕이 있다

이기환기자 2023. 11. 23. 00:48

{"originWidth":700,"originHeight":514,"style":"alignCenter","width":915,"height":672,"caption":"충남 부여 가림성에서 느티나무를 찍어 합성한 사진. 반하트 모양의 느티나무 가지를 찍어 합성하는 ‘하트놀이’가 유행이다.

 

‘660년? 663년?’ 백제는 언제 멸망했을까요.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냐구요? 
660년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우지 않았냐구요. 그러나 과연 660년이 맞을까요. 
663년설도 제법 설득력이 있거든요. 그 뿐이 아닙니다. 또하나 착안점이 있습니다.
백제의 독립 투쟁이 <삼국사기> 기록상 672년까지 이어진다는 겁니다. 
마침 올해(2023년)가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지 30년이 지난 때잖습니까. 
게다가 며칠전에 부여 가림성에서 백제~통일신라시대 유구가 확인되었다는 발굴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501년(동성왕 23) 축조된 백제성이 함락된 뒤 신라가 차지·운용했다는 이야기죠. 
또 10월20일 세종시 운주산 기슭에서 의미심장한 행사가 벌어졌는데요. 660년 이후 3년간 벌어진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바친 백제부흥군·왜 연합군의 넋을 기리는 백제고산대제가 열렸습니다. 최병식 주류성출판사 대표가 백제군의 최후 보루였던 주류성 함락일에 맞춰 봉행해왔는데요. 올해로 꼭 30년이 되었답니다.


■금동대향로에 읽힌 멸망사 
우선 백제 멸망과 금동대향로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볼까요.
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12일 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극적으로 발굴된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런데 금동대향로의 출토양상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사찰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여있던 곳이었습니다. 
향로를 나무 물통 안에 숨겨져 있었을까요. 이 대목에서 백제의 멸망 스토리가 ‘소환’됩니다. 

 

일리있는 해석이 등장하는데요. 즉 660년(의자왕 20)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사비(부여)가 함락됩니다.
이 절의 승려들은 불전에 향을 피울 때 쓰던 대향로를 감추려 했습니다. 승려들은 백제가 멸망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감춰두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오판이었습니다. 백제는 그 길로 속절없이 멸망합니다. 나·당 연합군은 나라 제사를 지내던 이 절을 불에 태웠고요. 
공방터 지붕도 폭삭 무너졌습니다. 금동대향로도 이후 1300년 이상 묻혀버린 겁니다. 허언이 아닙니다.
2년 뒤 이 사찰터 목탑지의 중심기둥이 도끼와 같은 흉기로 처참하게 잘린채 확인되었어요. 명문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구요. 절을 유린한 나·당 연합군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멸망, 꿈에도 꾸지 못했다’
너무도 허망합니다. 멸망의 조짐도 감지하지 못했다는 겁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왜냐면 백제 의자왕(641~660)이 신라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던 시기였거든요. 단적인 예로 642년 7월, 의자왕은 신라 미후성을 비롯, 40여개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6년 뒤 신라와 당나라가 648년(백제 의자왕 8·진덕여왕 2) 연합군 결성의 밀약을 맺었습니다. 당 태종은 신라 사신(김춘추·태종무열왕·654~661)을 만나 “당나라가 군대를 보내…백제·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신라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것을 의자왕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의자왕은 사실상 당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한 상태로 운명의 660년을 맞이한 겁니다. 의자왕은 처음엔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등 강국의 위세를 떨친 분이죠. 그러나 어느덧 자만심과 타성에 젖어 독재자로 변질됐으며 성충(?~656)과 흥수(생몰년 미상) 같은 충신들을 몰아냈죠. 또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해 나·당 연합군 결성을 수수방관한 점도 결정적인 패착이었습니다. 결국 백제는 외교실패와 내부갈등으로 속절없이 멸망한 겁니다. 


■치욕의 항복의식
소정방(592~667)이 이끄는 당나라군 13만명이 덕물도(덕적도)에 도착한게 6월21일이구요. 
이후 황산벌 전투 및 나·당 연합군 본격합류(7월9일)-연합군 사비 진격(12일)-의자왕의 사비 탈출 후 웅진(공주)피신(13일)-의자왕 항복(18일)까지…. 황산벌 전투부터 따지면 단 9일 만에 항복하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로써 백제 678년 역사는 공식적으로 종막을 고하게 되었는구요. 8월2일 열린 나·당연합군의 승전의식에서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융(615~682)은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벌이죠. 
“당상에 앉은 태종무열왕(654~661)과 소정방(592~667)은 의자왕과 아들 부여융(615~682)을 당하에 앉혔다. 어떤 자들은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라’고 조롱했다.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흐느꼈다.”(<삼국사기> ‘신라본기·태종무열왕’조)
9월3일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신료 93명, 그리고 백성 1만2000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습니다. 
왕조의 기둥을 뿌리째 뽑아간 형국이었죠. 그러나 백제는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삼국사기>는 의자왕이 항복한 후 열린 승전축하연회(660년 8월2일)에서 “당상에 앉은 태종무열왕(654~661)과 소정방(592~667)은 의자왕과 아들 부여융(615~682)을 당하에 앉혔다. 어떤 자들은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라’고 조롱했다.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흐느꼈다.”고 기록했다.


■가열찬 부흥운동
이때부터 가열찬 부흥투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당나라군이 철수하기도 전인 8월부터 남잠성·진현성(충남 대덕) 등지에 항거의 움직임이 일더니 전 좌평 정무가 두시원악(청양)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을 습격합니다.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은 무왕(재위 600~641)의 조카인 원로왕족 복신(?~663)이었습니다.
복신은 660년 9월초 승려 도침(?~661)과 함께 주류성을 근거지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에 나섭니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생몰년 미상)의 공적을 기리려고 충남 부여에 세운 <당유인원기공비>(보물)도 “도침과 복신이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거병초기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부흥군이 복신의 휘하로 결집되고 있었습니다.  
“흑치상지(630?~689)가 별부장 사타상여(생몰년 미상)와 함께 험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에 호응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는 기록이 이를 증명합니다. 
부흥군이 특히 백제의 서방을 관할하던 임존성(충남 예산)을 확보하자 10일도 되지 않아 3만명이 모였습니다. 
곧 주변의 200여개 성이 호응했답니다. 사비성에 주둔하던 나·당 연합군은 부흥군에 의해 고립되는 등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부흥군은 곳곳에서 진퇴를 거듭하며 나·당 연합군을 괴롭혔습니다. 


■‘빨리 당으로 돌아가라’는 부흥군의 조롱
그 사이 변수가 생깁니다. 당나라가 주적인 고구려 침략전쟁에 전념하는데요. 
신라에게는 평양까지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겼거든요. 그러자 백제부흥군의 운신이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661년 6월~662년 2월 사이 당나라군이 고구려와의 혈투에서 패했습니다. 당나라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649~683)은 백제고토에서 부흥군에게 포위당해 있던 웅진도독 유인궤(602~685)에게 칙서를 내립니다.
“형편이 어려우니 신라땅으로 가든지, 아니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구당서>는 “백제땅에 주둔하던 당나라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장기화된 전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모두 돌아가기를 바랐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유인궤는 “평양을 공격하던 군대가 철수했는데, 웅진의 군대마저 뽑아버리면 백제는 다시 일어설 것인데, 고구려는 언제 멸망시키겠느냐”고 백제 주둔을 고집했습니다.
이 무렵 백제부흥군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부흥군 지도자인 도침은 유인궤가 보낸 사신에게 ‘신분이 낮아 만나 줄 수 없다’고 홀대했구요. 복신은 당군 사령관 유인원에게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전송해주겠노라”고 조롱하기도 했답니다.(<삼국사기>) 실제로 662년 7월 당시 당나라군이 장악한 백제의 고토라고 해봐야 웅진성 정도였답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백제부흥운동과 그 종말. 663년 백제부흥세력의 내분을 틈타 나당연합군이 요충지인 가림성을 피해 부흥군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주류성을 공격했고, 백제와 왜의 연합군과 백강에서 마지막 대회전을 벌였다고 했다. 이때 백제·애 연합군의 전선 400척이 침몰했고, 부흥운동은 종막을 고했다.


■백제 32대 ‘풍왕’ 등극
백제부흥군은 661년 9월부터 새로운 왕국의 면모를 갖췄습니다. 복신 등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풍장)을 백제의 새 임금으로 옹립했어요. 어찌보면 백제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지 1년여 만에 새로운 임금(풍왕)을 내세워 부활한 셈입니다. 풍왕의 등장과 함께 부흥백제왕조의 정통성이 확립됐어요.
그래서 백제의 마지막 왕이 의자왕(641~660)이 아니라 풍왕(661~663)이라는 견해가 있고요. 실제로 순암 안정복(1712~1791)는 <동사강목>에서 ‘백제의 32대 왕=풍왕’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풍왕의 즉위는 내부분열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부흥운동을 이끈 동지였던 복신과 도침이 풍왕의 신하로서 경쟁하는 사이가 된거죠. 결국 복신은 도침을 죽인 뒤(661) 풍왕까지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663년 6월) 
하지만 복신의 반란 음모를 알아차린 풍왕이 선제 공격에 나서 복신을 급습하여 죽입니다. 
내부 분열의 대가는 돌이킬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본서기>는 “663년 8월 백제가 복신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가 곧장 백제를 공격해서 주류성(부흥군의 최후 거점)을 취하고자 했다”(‘천지기’)고 했습니다. 신라는 김유신 등 28~30명의 장수가 지휘하는 5만 정예병을 파견했구요. 

부흥백제국의 도읍지로 알려진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주류성은 ‘이름은 있지만 위치가 어딘지 모르는 지역(三國有名未詳地分條)’으로 분류했다. 충남 홍성 학성산성·한산 건지산성·연기 당산성·세종 운주산성, 전북 정읍의 두승산성, 부안의 우금산성 등이 주류성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


■“주류성이 함락됐다. 백제의 이름이 끊겼다” 
위기에 빠진 풍왕은 왜에 구원병을 요청했구요. 마침내 왜국 장수 여원군신이 이끄는 지원군 1만여명이 수송선 1000여척에 나눠타고 백제로 달려옵니다. 663년 8월 마침내 한반도 남부 서해안의 백강(백촌강·백강구)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집니다.
백제-왜가 한편이 되고, 신라-당나라가 한편이 되어 치른 동북아시아 국제전의 막이 오른 겁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 삼국의 역사서에서 저마다 이 처절한 해전을 생생한 필치로 전합니다.
“왜·백제부흥 연합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친 당나라군과 잇달아 접전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당나라군의 포위공격에 물속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뱃머리를 돌릴 틈도 없었다.”(<일본서기>)
“…당나라 수군이 백강에서 왜병을 만나 4번이나 싸워 모두 이겼고, 왜선 400척을 모두 불태워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자치통감>)

주류성, 가림성과 함께 백제 부흥군의 거점성이었던 임존성(충남 예산). <삼국사기>는 “부흥군이 임존성을 확보하자 10일도 되지 않아 3만명이 모였고,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도 성을 지켜내자 주변의 200여개 성이 호응했다”고 기록했다.

 

“당나라가 수전을 펼치자 신라군은 당나라군의 선봉이 되어 육지(주류성)에서 백제의 정예기병을 깨뜨렸다.”(<삼국사기>)
사서에서 보듯 전투는 백제-왜 연합군의 궤멸로 끝났습니다. 부흥군을 이끌던 풍왕은 몇몇 측근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습니다. 백제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결국 의자왕의 다른 아들들인 부여충승·충지가 지키던 주류성은 9월초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장수 지수신이 마지막 항전을 벌인 임존성 역시 배신자 흑치상지와 사탁상여의 공격으로 11월 함락됩니다. 지수신 역시 고구려로 망명했구요.
이로써 3년3개월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막을 내립니다. <일본서기>는 “주류성이 함락되자 백제인들이 서로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주류성이 항복했구나. 돌이킬 수 없구나. 이제 백제의 이름이 끊기니 (조상의) 무덤을 어찌 가볼 수 있을 것인가.(州柔降矣 事無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일본서기> ‘천지기’)


■백제의 독립투쟁
그래서 ‘백제 멸망=663년설’이 설득력있게 제기되었던 겁니다. 
풍왕의 고구려 망명과 주류성·임존성 등의 함락이 이어진 663년이 맞다는 거죠.
왜 대한제국 멸망 이후 만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무쟁독립투쟁이 벌어졌죠.
백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민들의 무장독립투쟁이  끈질기게 이어집니다. 664년 3월 백제 독립군이 사비산성(부소산성)을 점령했다가 당나라의 웅진도독부에 의해 진압되기도 했습니다.(<삼국사기> ‘문무왕’조) 
최근 백제-통일신라 유구·유물이 확인된 ‘가림성’ 등은 지난 672년까지 백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삼국사기>는 “671년(문무왕 11) 6월 신라가 장군 죽지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백제 독립군의 군량미 확보를 사전에 막으려고 한 고육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가림성 등 일부 성은 신라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삼국사기>는 “이듬해인 672년(문무왕 12) 1월 백제 고성성(사비성)을 공격해서 이겼다. 그러나 2월 가림성을 쳤지만 승리하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672년이면 언제입니까. 신라가 의자왕이 항복한 지 12년, 백강구 전투에서 패한 풍왕이 고구려로 망명한 지 9년이 지난 때가 아닙니까. 그때까지도 나당연합군이 완전히 차지하지 못한 성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백제의 독립운동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고립무원이었던 백제인들의 독립투쟁은 외로운 싸움이었던 겁니다.

663년 8월 백강구 전투를 끝으로 백제의 사직이 완전히 명맥이 끊겼지만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삼국사기>는 “672년 신라군이 백제 고성성과 가림성을 잇달아 공격해서 고성성은 차지했지만 가림성에서는 승리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부흥백제국의 도읍, 주류성은 어디인가 
다시 한번 질문해봅시다. 660년 7월 의자왕의 항복 때일까요. 아니면 663년 9월 주류성 함락 때일까요.
어떤 연구자는 전한·후한, 서진·동진처럼 백제(기원전 18~기원후 660년)와 부흥백제국(661~663)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이후 9년간은 독립운동기였고요. 또하나 궁금증이 남죠. 주류성이 이른바 ‘부흥백제국’이라 이름붙일 경우 주류성은 그 ‘부흥백제국’(661~663)의 도읍이었겠네요. 그러나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쏭달쏭합니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주류성은 ‘이름은 있지만 위치 불명 지역(三國有名未詳地分條)”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정확한 위치를 두고 설왕설래 하고 있습니다. 30년 동안 고산대제를 지내고 있는 세종 운주산성도 그 중 한 후보지로 꼽히고 있고요. 홍성 학성산성·한산 건지산성·연기 당산성, 전북 정읍의 두승산성, 부안의 우금산성(위금암산성)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거다!’하고 단정할만한 증거자료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가림성 사랑나무의 깜찍한 스토리
요즘 백제 부흥군과 독립군의 최후 근거지 중 한 곳이 요즘 MZ세대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바로 ‘가림성 사랑나무’랍니다. 저도 MZ세대 흉내를 내보려고 ‘가림성 사랑나무’를 찾아갔는데요. 
해발 260m의 가림성 남문터까지 올라갈 때까지는 반신반의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올라가보니 우뚝 솟아있는 나무와 함께 가슴이 확 트이는 ‘뷰’가 펼쳐지더군요. 부여 시내는 물론이고 논산, 강경, 서천, 익산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더라구요. 
그럼 남문터 쪽에 서있는 나무에 왜 ‘사랑’자가 붙었을까요. 사랑나무는 키 22m, 가슴둘레 5m40㎝에 달하는 느티나무인데요. 원뿔 모양의 몸집에, 판 모양으로 돌출된 거대한 뿌리 등이 늠름한 자태를 풍깁니다. 수령이 440년 정도라 하구요. 그래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2021년 8월)

가림성 사랑나무의 나뭇가지. 본래가 반쪽 짜리 하트 문양 나뭇가지인데, 이것을 합성해서 온전한 하트 문양을 만든 사진이 유행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왜 나무에 ‘사랑’자가 붙었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옆으로 퍼진 나무 줄기를 보면 뭔가 하트 모양 같기도 하지만 그것도 어사무사하구요. 고개를 갸우뚱 했는데요. 다시 포털 사이트의 ‘사랑나무’ 사진을 검색해보고 ‘아!’ 했습니다. 사진을 합성한 것이더군요. 본래가 반쪽 짜리 하트 문양 나뭇가지인데요. 이것을 합성해서 온전한 하트 문양을 만든다는 겁니다. 이것이 MZ 세대의 하트놀이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이런 센스쟁이들이 있나!’
하기야 요즘 누가 몇백년 몇천년된 고리타분한 유적·유물 보러오나요. 사진찍기에 좋은 ‘뷰’를 찾고, 분위기 좋은 카페 찾고, 볼거리 많은 거리나 길을 찾죠. 비근한 예로 경주 황리단길과 벚꽂길을 한번 보십시요.
부여 역시도 왕릉원이나 박물관 보다는 ‘가림성 사랑나무’가 ‘인생샷’을 찍는 핫플레이스로 각광을 받는 거겠죠.
그래도 저는 옛날사람인 모양입니다. 사랑나무를 보면서 백제멸망이 어떻고, 부흥군이 어떻고, 독립투쟁사가 어떻고 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까요. 이기환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