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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화장실 출토 ‘가로피리’…‘만능뮤지션’ 공자 왈(曰), “음악은 정치다”

이기환기자 2026. 3. 2. 14:19

얼마 전 근래에 보기드문, 아주 흥미로운 고고학 발굴 성과가 공개됐다.(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목간 329점과, 관악기(橫笛·일종의 가로피리) 1점이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관북리는 사비백제 시대(538~660) 왕궁터로 알려진 곳이다. 1982년부터 조사해왔고, 지금까지 대형 건물터와 수로, 도로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이번 조사는 2024~25년 사이 펼쳐진 16차 발굴이었다. 우선 필자의 주된 관심이 아닌 목간부터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자. 
목간은 건물터 3동의 서쪽을 흐르고 있던 수로 안에서 집중 확인됐다. 국내 단일유적에서 출토된 목간 중 최대 수량이라 한다. 이중 ‘경신년(庚申年)’ ‘계해년(癸亥年)’과 같은 간지명 명문이 주목됐다. 또 목간과 함께 출토된 초본식물의 탄소연대값을 측정해보니 433~595년으로 분석됐다. 또 배수로에서 확인된 ‘삼족기(세발 달린 그릇)’는 6세기 중엽으로 편년되었다. 따라서 ‘경신년’과 ‘계해년’은 540년(경신년)과 543년(계해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목간의 연대는 성왕의 사비천도(538) 직후(540~6세기 중엽)로 특정됐다. 

사비백제의 왕궁터인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확인된 조당(朝堂·왕과 신하가 정사를 논하고 조회와 의례를 행한 공간)의 흔적. 일본 나니와노미야(難波宮)의 모식도에 대입시켜 본 그림이다. 목관악기인 가로피리는 조당의 서쪽 건물터에서 30m 떨어진 곳에서 확인됐다.❘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제공

 

■도족이는 칼잡이?
가장 주목을 끈 것은 ‘功四爲小將軍刀足二(공사위소장군도족이)’ 명문이 찍힌 ‘편철(編綴·끈으로 엮은 행정문서) 목간’이다. 
이 목간은 발표 당시 ‘공적이 4개인 도족이를 소장군으로 삼다’는 뜻으로 소개됐다. 말하자면 인사 관련 문서철 중 하나라는 것이다. 
목간이 공개되자 마자 연구자들의 설왕설래가 SNS 상에서 분출되었다. 
즉 ‘공적이 4(四)개가 되어야 소장군으로 삼는데 도족(刀足)이는 공이 2(二)개’로 봐야 한다는 해석도 나왔다. 또 ‘~가 공적 4개로 소장군이 되었는데, 칼 두자루를 함께 받았다’고 보는 이, ‘공이 4개여서 소장군이 된 이가 호위무사(칼잡이) 두 명을 거느렸다’고 해석하는 이 등등….
아무래도 후속 연구가 가열차게 진행될 듯 싶다. 이외에도 필자의 주목을 끈 것은 ‘단온병(斷溫病)’ 목간이다. ‘단온병’과 관련해서 1542년(중종 37) 김안국(1478~1543)이 편찬한 의학서(<분문온역이해방>)에 나와있다. 이 책에서 ‘단온병(斷溫病)’은 ‘더운 열 나는 병’으로 설명하고 있다. ‘더운 열 나는 병’은 전염성 열병 혹은 염병(장티푸스 등)을 가리킨다. 그 ‘단온병’이 1500년 전 사비백제 시대에도 유행했음을 알리는 실증적인 자료다. 

사비백제 왕궁터인 관북리 조당의 화장실 유구에서 확인된 일종의 가로피리(횡적). 처음엔 뒤처리용 막대로 파악했지만 각종 유기물의 분석결과 화장실 유구에 떨어뜨린 목관악기로 확인됐다.❘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제공

■화장실 수수께끼
그러나 필자는 단편적인 내용을 담은 목간보다는 악기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악기는 목간(329점·540~6세기 중반 추정)과는 다른 연대의 문화층에서 출토됐다. 그 간의 발굴 결과 백제는 목간 등의 문화층을 덮고 그 위에 새로운 건물(궁궐)을 조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조당(朝堂·왕과 신하가 정사를 논하고 조회와 의례를 행한 공간)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다. 
이 흔적은 왕궁의 정전(正殿) 앞면에 배치되는 동서 건물군 중 서편 건물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동편 건물군은 미발굴) 

백제 피리는 국보 금동대향로에 표현된 종적(세로피리)가 가장 유명하다. 발굴품과 유사한 횡적, 즉 가로피리는 백제 유민이 673년 제작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상’에 표현되어 있다.

서편 건물군의 발굴결과 조당은 불에 탄 기와가 폭삭 무너진 채로 노출되었다. 그 안에서는 불에 탄 말뼈와 옻칠된 가죽갑옷이 출토됐다. 
이로 미뤄볼 때 6세기 중반 이후 조성된 이 조당건물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공 때 소실된 것으로 짐작된다. 
악기는 발굴된 조당의 서편 건물군에서 동쪽으로 30m 정도 떨어진 직사각형 구덩이에서 확인됐다. 분석 결과 이 구덩이(가로 2m×세로 1m×깊이 2m)는 백제시대 화장실로 특정되었다. 왜냐. 이 구덩이 내부의 유기물에서 다량의 왕겨와 함께 인체 기생충란(1㎥ 당 6만7000여개)이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뒤처리용 나무막대도 보였다. 

음주가무는 흥청망청 놀이가 아니었다. 해마다 씨뿌리기(5월)와 수확기(10월)가 끝난 뒤 하늘과 조성에게 제사를 지낸 뒤 뒤풀이 개념으로 펼쳐진 공식 행사였다.

■가로피리가 왜? 
그런데 이와같은 화장실 유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물이 섞여 있었으니, 그것이 악기다.
대나무 막대는 부러져 30% 가량 유실된 채 놓여있었다. 잔존길이는 약 22.4㎝에 달했다. 처음엔 그저 뒤처리용 막대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막대에는 인위적으로 뚫은 구멍이 4곳 보였다. 얼핏 보아도 목관 악기였다. 한 구멍은 입김을 불어넣는 취공(吹孔), 다른 3구멍은 손가락 지공(指孔)이 분명했다. 악기의 구체적인 정체가 드러났다. 취공이 있는 쪽은 한쪽 끝이 막힌 구조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이 관악기는 횡적(橫笛·가로피리의 일종)으로 판단됐다. 지금까지 실체를 알 수 있는 백제 피리는 국보 금동대향로에 표현된 종적(縱笛·세로피리)가 가장 유명하다. 발굴단은 향로(종적·세로피리)와는 사뭇 다른 횡적(가로피리)의 등장에 다소간 실망감을 비쳤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에 표현된 횡적, 즉 가로피리의 사례도 있다. 백제 유민이 673년 제작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상’에 표현된 가로피리(횡적)가 그것이다. 

역사가 사마천은 "음악에 나라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표현된다"면서 "음악은 정치와 일맥상통한다"고 설파했다.

■백제 피리 연주자 
이 대목에서 문헌자료를 보자. <삼국사기>는 중국 문헌인 <통전>과 <북사> 등을 인용, 백제의 악기를 열거하면서 ‘적(笛)’을 거론하고 있다.
“<통전>은 ‘백제음악…춤추는 자 2명은 자색 큰소매와 치마저고리를 입고…가죽신을 신었다. 악기는 쟁(箏·현악기)·적(笛)·도피필률(桃皮필률·피리)·공후(공후·현악기)가 있다’고 했다…<북사>는 ‘백제에 고(鼓)·각(角)·공후·쟁·우(우)·지(지)·적(笛) 등의 악기가 있다’고 했다.” 

춘추시대 정나라의 음악, 즉 정풍(鄭風)은 망국의 음악으로 악명높았다. 사마천과 공자, 계찰등 "매우 가냘픈 정나라 음악은 음란해서 백성들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면서 "정나라 음악은 망국의 음악"이라고 규탄했다.

<삼국사기>는 “백제에 ‘적(笛)’이 존재했다”고 했지, 종적(세로피리)인지, 횡적(가로피리)인지 특정하지는 않았다. 
일본의 역사서 <일본후기> 등은 “횡적·공후·막목(莫目·관악기)·무용 등 백제악사 4명을 정했다”(809)고 했다. 또 일본의 법령을 엮어 모은 <유취삼대격>은 “백제 악생을 20명에서 13명으로 줄여 7명으로 정했는데, 횡적생 1명은 줄이지 않았다”(845)고도 했다. 
또 <삼국사기>는 “238년(고이왕5) 봄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면서 ‘북과 피리’(고취·鼓吹)를 사용했다”(‘백제본기’)고 전했다. 
기록에 등장하는 피리(吹)는 필시 적(笛)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백제음악에서 일종의 피리인 적(笛)이 으뜸되는 악기였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요즘 같으면 기타와 드럼은 물론 보컬까지 소화하는 ‘만능 뮤지션’이었다. 거문고를 뜯고, 경(磬·타악기)도 치며, 노래도 잘 불렀다. 공자는 거문고 스승인 사양자로부터 연주곡을 배운 뒤 “이 노래를 지은 이는 (덕치의 롤모델인) 주나라 문왕(文王)일 것”이라 했다. 사양자는 “맞다. ‘문왕조(文王操)’”라 대답했다.

■공자는 만능뮤지션
그런데 대체 악기가 뭐 그리 중요한 발굴품이라고 호들갑을 떠느냐는 의문이 나올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음악하면 떠올리는 사료가 있다. <삼국지>나 <후한서> 등 중국 사료에 등장하는 삼한(三韓)의 풍속이다. 
“해마다 씨뿌리기(5월)와 수확기(10월)을 마치고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얼핏보면 밤새도록 음주가무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기사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라. 한 해에 두번 농사 잘되기를 기원하고, 또 풍성한 수확을 줌에 감사드리며 하늘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 후의 음주가무는 본행사(하늘제사)를 위한 뒤풀이 행사였던 것이다. 그랬다.

‘음악’은 동양에서 단순히 흥청망청 즐기는 대상이 아니었다. 옛 사람들은 악기 하나, 노래 하나에도 심원한 뜻을 새겼다. 

<삼국사기>는 “거문고의 길이 3자6치6푼은 1년 366일을 상징하고 너비 6치는 천지와 사방을 뜻하며 위가 둥글고 아래가 네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본받은 것”이라 설명했다. 또 가야금의 12줄은 사시(四時) 즉 사계절, 기둥의 높이 3촌은 삼재(三才), 즉 천(天)·지(地)·인(人)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무릇 음악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잘 다스리는 시대의 음악은 편안하고 즐거운데 이는 조화로운 정치를 의미하며 어지러운 세상의 음악은 원망스럽고 노여운데, 이것은 어그러진 정치를 뜻하며, 망국의 음악은 슬프고 생각에 잠기게 하는데 이것은 백성들의 곤궁함을 의미한다”고 했다. 
단적인 예로 공자는 요즘 같으면 기타와 드럼은 물론 보컬까지 소화하는 ‘만능 뮤지션’이었다. 
거문고를 뜯고, 경(磬·타악기)도 치며, 노래도 잘 불렀으니까. 제나라 음악을 배울 때는 3개월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런 공자는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음악은 매우 음탕해서 반드시 추방해야 한다”(<논어> ‘위령공’)고 비판했다. 어떤 음악이었기에 그랬을까. 춘추시대 오나라 정치가·외교가인 계찰은 “정풍(鄭風), 즉 정나라 노래는 매우 가냘퍼서 백성들이 견디지 못할 것이니 가장 먼저 망하는 나라가 될 것”(<사기> ‘오태백 세가’)이라고 경고했다. 공자와 계찰 등에 따르면 말초적이고 음란한 음악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말세의 음악이다. 음악으로 나라의 흥망을 점친 것이다.

대가야 음악가 우륵은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곳 각 지방의 특성을 살린 12곡을 작곡했다. 가실왕은 음악을 통하여 대가야의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가야의 쇠락을 막지 못했다. 우륵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신라 진흥왕(540~576)에게 망명했다.(522)

■노래 만으로 작곡자 맞춘 공자
역시 공자가 거문고를 배울 때의 일이다. 거문고 스승인 사양자가 5번을 가르치고, 그 때마다 “이제 됐으니 새로운 것을 배우라”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아직 때가 아니다”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참 뒤에야 공자가 말했다. 
“이제야 노래를 지은 이의 풍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오한 사상, 낙관적 성격, 원대한 안목을 가진 사람이니 분명 이 곡을 지은 이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일 것입니다.”
사양자가 “맞습니다. 우리가 학습한 것이 바로 ‘문왕조(文王操)’입니다.”라 대답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문왕조’는 주나라의 실질적인 창업주인 문왕이 작곡한 악곡명을 가리킨다. 공자가 마침내 작곡자가 ‘덕치(德治)의 롤모델’인 주나라 문왕(기원전 1106~1056)임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우륵은 진흥왕이 보낸 3명의 제자를 대상으로 오디션을 거친 후 각각에게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쳤다. 그러나 우륵의 제자인 계고와 법지, 만덕은 우륵의 12곡을 두고 “이것은 번잡하고 음란하니, 바르다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우륵의 12곡을 5곡으로 줄였다. 스승 우륵은 분기탱천했지만 편곡된 5곡을 듣고는 곧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 하다. 너희는 왕 앞에서 그것을 연주하라.”고 허락했다.

공자 역시 ‘음악=정치’로 본 것이다. 중국 뿐인가. 아니다. <삼국사기> ‘잡지·악(樂)’편에서 현금(玄琴·거문고)을 이렇게 설명했다.
“길이 석자 여섯치 여섯푼은 366일을 상징…너비 여섯 치는 천지와 사방을 뜻하며 위가 둥글고 아래가 네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본받은 것…”
가야금은 어떤가. <삼국사기>는 “가야금의 12줄은 사시(四時), 기둥의 높이 3촌은 삼재(三才), 즉 천(天)·지(地)·인(人)을 뜻한다”고 했다.
아니 이렇게 심오한 뜻이…. 일례를 들어보자. 

신하들은 “이것은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이라고 경고했다. 진흥왕은 “가야 가실왕이 음란해서 그런거지 음악이 무슨 죄냐”고 두둔해주었다.

■연습생 키운 우륵
대가야의 유명한 음악가 중에 우륵이 있었다. 우륵은 가실왕(421~451)의 명에 따라 12곡을 작곡했다. 12곡인 이유가 있었다,
가실왕은 ‘제국의 방언이 서로 다른데 어찌 음악이 같을 수가 있느냐’고 했다. 즉 가실왕은 악성 우륵에게 하나가 아닌 12개 지역에 해당하는 12곡을 짓게 한 것이다. 가실왕은 음악을 통하여 대가야의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가야의 쇠락을 막지 못했다. 우륵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신라 진흥왕(540~576)에게 망명했다.(522)
우륵의 음악에 감명 받은 진흥왕은 계고와 법지, 만덕 등 3명을 우륵에게 보내 음악을 배우도록 했다. 연습생 3명을 우륵이라는 기획자에게 보낸 것이다. 우륵은 일종의 오디션을 통해 이들의 재능을 알아본 다음 계고에게는 가야금,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악기(계고), 보컬(법지), 댄스(만덕) 등을 겸비한 아이돌 그룹 같다. 마침내 치열한 연습생 생활을 거쳐 신라 그룹이 탄생했다.

1997년 광주 신창동에서 출토된 현악기(왼쪽)와 찰음악기(오른쪽). 현악기는 10현금으로 보인다. 찰음악기는 각목에 새겨진 ‘톱니 무늬’를 마찰해서 소리를 내게 하는 타악기다.

■신라판 그룹사운드
우륵은 진흥왕 앞에서 데뷔 공연을 열었다. 
공연을 관람한 진흥왕은 “내가 우륵에게 들었던 음악과 다르지 않다”고 칭찬했다. 성공적인 데뷔였다.
그러나 우륵을 사사한 계고와 법지, 만덕은 천생 신라 사람들이었다. 세 사람은 우륵이 기왕에 작곡한 12곡을 듣고는 “이것은 번잡하고 음란하니, 바르다고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우륵의 12곡을 5곡으로 줄였다. 아니 제자들이 스승의 곡을 멋대로 편곡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우륵은 분기탱천했다. 그러나 우륵이 이 축약된 5곡을 듣고는 곧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 하다. 너희는 왕 앞에서 그것을 연주하라.”
아마도 제자 3명은 우륵의 전체 12곡이 신라에서는 통할 수 없음을 알고 5곡으로 줄였을 것이다. 
진흥왕이 편곡된 5곡을 감상하고는 “매우 잘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조심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이것은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입니다. 신라가 취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러나 진흥왕은 “가야 가실왕이 음란해서 그런거지 음악이 무슨 죄냐”고 두둔해주고는 이것을 신라의 공식 대악으로 삼았다.
역시 음악을 나라의 흥망과 연결시킨 것이다.(<삼국사기> ‘잡지1·음악’)

바가지 모양으로 깎아 만든 통형 나무 제품은 북일 가능성이 크다. 통형 나무에 가죽을 씌워 리듬감있게 두들겼을 것이다. 청동방울의 부속품인 탁설과 토제 방울. 2000년전 악기로 추정된다.

■신창동 오케스트라

그러니 발굴조사에서 확인되는 악기 한 점 한 점을 허투루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번 부여 관북리 뿐 아니라 악기가 출토된 사례가 종종 보인다. 1997년 7월 기원 전후에 조성된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발굴된 악기 세트가 그것이다. 그중 현악기는 벚나무로 제작되었다. 
반쯤 쪼개진채 확인된 이 현악기는 현(絃)을 고정하는 머리부분과, 현이 올려져 작음(作音)기능을 발휘하는 탄음부(彈音部·떨림부), 현을 거는 구멍(현공·絃孔)이 있는 현미부(絃尾部)로 돼있었다. ‘현을 거는 구멍’은 현미부의 일부를 V자형으로 파낸 뒤 그 내부를 직경 0.3㎝ 정도의 둥근 원으로 뚫었다. 남아있는 구멍이 6개지만 전체 규모와 형태를 감안해보면 10개로 추정된다. ‘10현금’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현악기의 출토로 신창동 발굴단은 ‘유레카’를 외쳤다. 이전 발굴에서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유물이 속속 악기로 특정됐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면서 땅을 밟고 (몸을) 굽혔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는데 손과 발의 동작이 서로 조응한다”고 전했다. BTS를 비롯한 K팝 그룹의 ‘칼 군무’가 연상된다. 2000년의 시공을 초월하는, 정말 못말리는 DNA인 것 같다.

단적인 예로 1995년 발굴에서 ‘용도 불명’으로 분류했던 나무제품이 ‘찰음악기’로 분류됐다. 이 찰음악기는 각목에 새겨진 ‘톱니 무늬’를 마찰해서 소리를 내게 하는 타악기였다. 마찰봉의 형태와 마찰의 속도에 따라, 혹은 각목의 깊이와 간격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냈을 것이다. 
또 바가지 모양으로 깎아 만든 통형 나무 제품은 북일 가능성이 크다. 통형 나무에 가죽을 씌워 리듬감있게 두들겼을 것이다. 
중국 상나라 시대부터 청동 북과 함께 등장한 청동방울의 부속품인 탁설(흔들면 소리나는 방울알)과, 사람얼굴이 새겨진 토제방울 또한 악기로 쓰였을 것이다. 현악기와 함께 찰음악기-북-청동 및 토제 방울까지…. 현악기의 출토가 이토록 발굴단의 시야를 넓혀준 것이다.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329점의 목간 중 가장 주목을 끈 ‘功四爲小將軍刀足二(공사위소장군도족이)’ 명문 목간. 그 해석을 두고 연구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다.❘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제공

■2000년전 K팝 공연
이 대목에서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를 다시 들춰보자. 
“…제사 후 모여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는데, 그 가락이 마치 탁무(鐸舞·목탁을 갖고 추는 춤)와 같다…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이 있다…소도(蘇塗)에 큰 나무를 세우고(立大木) 방울과 북을 매달아(懸鈴鼓) 귀신을 섬긴다.” 
파종이나 추수 후 제사장(천군)이 주도한 대대적인 제천행사와 함께 며칠 밤낮으로 그 마을 공동체의 집단 연희가 열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창동에서도 최소 5종의 악기(현악기·찰음악기·통형 목제 가죽북·청동방울·흙방울)가 동원된 2000년전 K팝 공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이 보인다.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면서 땅을 밟고 (몸을) 굽혔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는데 손과 발의 동작이 서로 조응한다”는 내용이다. 어떤가. 요즘 BTS를 비롯한 K팝 그룹의 ‘칼 군무’가 연상되지 않은가.
2000년의 시공을 초월하는, 정말 못말리는 DNA가 아닐 수 없다. 또하나 사마천의 말씀도 기억해야겠다. ‘음악은 정치다’라고 한 말씀이다.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