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비운의 인종'이 ‘절친’ 신하에 그려준 ‘묵죽도’ 목판엔 어떤 뜻이…

이기환기자 2021. 2. 5. 17:42

“…굳은 돌, 벗의 정신이 깃들었네. 조화를 바라시는 임금의 뜻을 이제 깨닫노니….”
비운의 왕 인종(1515~1545·재위 1544~1545)이 절친이자 스승인 신하에게 ‘정표’로 내린 ‘묵죽도’ 목판이 도난 15년만에 회수됐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서울 경찰청 지능수사대는 공조수사를 통해 2006년 2월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모셨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서원)으로 등재된 필암서원(전남 장성)에서 도난된 ‘하서 유묵 묵죽도판’(전남 유형문화재 216호) 3점을 회수했다고 1일 밝혔다.

2006년 도난당한 하서 김인후의 ‘묵죽도판’ 3점를 회수하는 모습. 인종이 스승이자 벗인 김인후에게 친히 그려 하사한 ‘묵죽도’를 유통시키기 위해 목판에 새긴 것이다. 문화재청 사범 단속반·서울시경찰청 지능수사대 제공


■도난문화재 34점 회수
사범단속반은 이 과정에서 1980년 도난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창 선운사 소장 ‘석씨원류’ 1점(전북 유형문화재 14호)과 2008년 도난된 충북 보은 선병국 가옥(국가민속문화재 134호)의 ‘무량수각 현판’ 등까지 모두 34점을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공조수사팀이 “(2006년 2월 도난당한) ‘묵죽도판’이 거래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은 2019년 5월이었다. ‘묵죽도판’을 문화재 매매업자 백모씨로부터 구입하려던 모 대학교수가 수사팀에 ‘확인을 요청’해온 것이다.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은 “‘도난 신고된 문화재의 매매’는 문화재보호법 92조(손상 또는 은닉 등의 죄)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게 된다”고 전했다. 공조수사팀은 “백모씨의 집과 사무실, 은닉장소 등 3곳을 압수수색한 결과 ‘묵죽도판’ 외에도 시·도지정문화재를 포함, 상당수 문화재가 불법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을 적발했다”고 전했다. 지정문화재 외에 충남 무량사 목조불좌상(2점)과 원각경 목판(1점), 청음선생 연보 목판(2점), 괴헌집 목판(3점), 성오당선생문집부록 목판(1점), 기자지 목판(1점), 하려선생문집 목판(4점), 동연학칙 목판(4점) 등이다. 이중에는 개인은 물론 박물관으로 흘러들어간 문화재도 있었다. 적발된 백씨 등은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인종이 김인후에게 친히 그려 하사한 ‘묵죽도’.


■어수지계(魚水之契)
이번에 회수된 문화재 중 ‘하서 묵죽도판’ 3점은 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를 새긴 목판이다. 1568년(선조 1년)과 1770년(영조 46년) 새긴 것이다. 흔히들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물고기(신하)가 좋은 물(임금)을 만나 마음껏 헤엄친다’는 뜻에서 ‘어수지계(魚水之契)’라 한다. 이와 같은 인종-김인후의 군신관계를 널리 알린다는 뜻에서 ‘묵죽도’ 그림을 나무판에 새겨 유통한 것이다.
김인후는 어릴 적부터 인종의 벗이자 스승이 될 운명이었던 것 같다. 1518년(중종 13년) 9살인 김인후를 만나본 홍문관 교리 기준(1492~1521)은 “이 소년은 후일에 마땅히 세자(인종)를 모시는 신하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으니 말이다. 과연 그랬다.
31살 때인 1540년(중종 35년) 대과에 급제한 김인후는 기준의 예언대로 세자(훗날 인종) 교육기관인 세자시강원의 설서(정7품)가 됐다. 세자와는 5살 차이였지만 곧 절친이 됐다. 인종은 태어난 지 7일만에 친모(장경왕후·1491~1515)를 산후증으로 잃고, 1520년(중종 15년) 책봉 이후 세자 신분으로만 25년간이나 살았다. 새어머니 문정왕후(1501~1565)에게도 아들(경원대군·훗날 명종)이 있었다. 문정왕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옥좌에 올려놓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인종의 세자 생활은 늘 위태로웠다.

인종의 ‘묵죽도’ 선물에 하서 김인후가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썼다. 대나무는 세자(인종), 돌덩이는 변함없이 충성스러운 신하를 각각 상징한다.


■세가지 선물
그런 세자의 버팀목이 되어준 이가 바로 김인후였다. 세자가 김인후에게 하사한 ‘3가지 선물’이 인구에 회자됐다. 먼저 세자가 김인후에게 싱싱한 배 3개를 준 일이었다. 김인후는 이중 한 개는 맛을 보고, 나머지 두 개는 보자기에 잘 싸서 간수했다.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올리고, 그 씨는 받아두었다가 밭에 심었다. 자손 대대로 그 배나무를 보호했다.
또 하나 선물은 김인후에게만 특별 하사했다는 <주자대전> 한 질이다. 세자가 숙직실까지 친히 왕림해 김인후에게 글을 질문하고, <주자대전> 한 질을 선물한 것이다. 성리학의 전범인 <주자대전>은 1543년(중종 38년) 수입된 신간이었다. 인종은 ‘훗날 내가 옥좌 위에 오르면 국가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해석을 그대에게 맡기려 한다’는 뜻을 <주자대전> 선물에 담았을 것이다. 김인후는 “주묵(붉은 색 먹)으로 구절구절 표점까지 찍으며 읽었다”고 밝혔다.
세번째 선물이 바로 ‘묵죽도’였다. 세자는 김인후를 불러 비단 위에 손수 대나무를 그려 하사했다. 대나무가 애곡(涯谷·절벽과 골짜기) 사이에서 솟아나 곧게 하늘을 떠받드는 형세였다. 김인후는 이 ‘묵죽도’에 충성을 맹세하는 시를 남겼다.
“뿌리, 가지, 마디와 잎새, 모두 정미하다(根枝節葉盡精微)/ 굳은 돌, 벗의 정신이 깃들었네(石友精神在範圍)/ 조화를 바라시는 임금의 뜻을 이제 깨닫노니(始覺聖神모造化)/ 천지에 한결 같으신 뜻을 어길 수 없도다(一團天地不能違).”
대나무는 세자(인종), 돌덩이는 충성스러운 신하를 상징한다. 훗날 송시열(1607~1689)은 “인종은 김인후의 도덕과 학문의 훌륭함을 알아 성심으로 예우했고, 김인후 선생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남을 알아 장차 요순의 정치를 펼 것으로 여겼다”며 “두 사람의 만남이 날로 더욱 짙어지고 기대도 날로 더욱 높아졌다”고 했다.

하서 김인후를 모신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호남 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곡절있는 인종의 서거
그러나 성군의 자질을 받았다는 인종의 치세는 8개월 단명으로 끝나고 만다. 인종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지나친 효도 때문에 얻은 병’으로 알려져 있다. 1544년(중종 39년) 중종이 병에 걸려 결국 서거하자 세자(인종)는 곡기를 끊고 다섯달 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세자의 몸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결국 인종이 승하하자(7월1일) “이제야 태평시대를 열겠구나”라고 기대했던 백성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궐 밖은 대성통곡하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런데 인종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여론이 퍼졌다. 아닌게 아니라 문정왕후와 왕후의 오라비인 윤원로(?~1547)·윤원형(?~1565) 형제가 인종을 해코지 하려고 갖은 술수를 썼다. 특히 윤원형 등은 남산에 올라 손수 향을 피워놓고는 “제발 임금이 빨리 죽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등 요망한 방술을 자행했다. 1543년 1월 세자가 기거하는 동궁에서 일어난 화재의 배후로 윤원로와 윤원형을 지목되기도 했다.
김인후도 이런 수상한 기미를 감지했다. 김인후는 인종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던 1545년(인종 1년) 4월 스승의 자격을 내세워 가슴을 치면서 “약제의 처방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묵살당했다. 김인후가 “그렇다면 전하를 제발 다른 궁궐로 옮겨야 한다. 다른 곳에서 건강을 돌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지만 그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문정왕후를 의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질에 시달린 인종에게 이질과 상극인 닭죽을 매번 바쳤으며, 독이 든 떡을 먹게 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난생 처음 살갑게 대하는 계모(문정왕후)가 먹어보라고 준 떡을 덥석 받아먹었다는 설까지….

인종과 부인인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무덤이다. 경기 고양 서삼릉에 있다,


■해마다 7월1일만 되면
인종이 서거한 뒤 지인으로부터 승하의 자초지종을 들은 김인후는 놀라 울부짖었다. 뭔가 곡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김인후가 남긴 시(‘유소사·有所思’)가 심금을 울린다.
“님(인종)의 나이 바야흐로 30이요, 내 나이도 서른하고도 여섯이로세(君年方向立 我年欲三紀)/ 새 정을 반도 다 못누렸는데 이별은 화살과 같구나(新歡未渠央 一別如弦矢)/ 내 마음은 변할 줄 모르는데, 세상일은 동편으로 흘러가는 물이로다(我心不可轉 世事東流水)”.
김인후는 술과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특히 해마다 인종의 기일(7월1일)이 다가오면 실성한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울부짖었다.
“김인후는 항상 6월 그믐 이전부터 7월 그믐까지 술을 실컷 마시고 몹시 취해 정신 잃고 말았다. 때로는 통곡하며 슬퍼하여 스스로를 이기지 못했다.”(<명신록>)
정철(1536~1593)은 인종의 기일이 되면 산중에 올라 통곡하는 김인후를 위해 “해마다 7월이 되면(年年七月日)/ 만산중에서 통곡한다(痛哭萬山中)”는 시를 남겼다. 송시열은 김인후의 친구인 정황(1512~1560)의 묘갈에서 “김인후가 당시 어의의 처방을 살펴보겠다고 자청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송시열도 인종의 죽음에 의문부호를 표했던 것이다.
이후 김인후는 여러번 명종(1545~1567)의 부름을 받았지만 발에 습종(붓는 병)이 났니 어떠니 하면서 끝내 응하지 않았다. 1553년(명종 8년) 명종은 김인후를 홍문관 교리로 임명해버렸다. 김인후는 임금의 명을 마냥 거절할 수 없어 일단 “명을 받든다”면서 수임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10여 일을 술 한잔씩 마시며 길바닥에서 보냈고, 술이 다 떨어지자 “병이 났다”면서 발길을 돌렸다. “(인종 때의 마지막 벼슬인) 옥과(전라 곡성) 현감 이후의 관직은 절대 거론하지 말라”는 김인후의 유언이 심금을 울린다.
명종 때 문정왕후·윤원형·정난정(?~1565) 등 국정농단 세력이 내린 벼슬(성균관 전적·정6품, 홍문관 교리·정5품, 성균관 직강·정5품)은 거부한다는 강력한 뜻을 전한 것이다.
 


■너무나도 짧은 만남
김인후는 정조 때인 1796년(정조 20년) 호남 지방에서 유일하게 문묘(공자 사당)에 배향됐다. 정조는 이때 “김인후는 비 갠 뒤의 맑은 달과 밝고 부드러운 바람(光風霽月) 같은 기상과, 순결하고 온향한 품성(精金美玉)에 문장까지 겸비해서 선비들의 모범이 됐다”고 극찬했다. 정조는 이어 “정몽주(1337~1392)가 처음 제창하고, 조광조(1482~1519)가 크게 드날린 (조선 성리학의) 맥이 중간에 도가 막혀 실낱같이 아슬아슬했지만 호남에 공(김인후)이 나타났다”고 했다. 김인후를 모신 필암서원은 바로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원 9곳 중 한곳이다.
조선 중기 문신 신흠(1560~1628)은 ‘묵죽도’ 발문에서 인종과 김인후의 기구한 만남을 애달파했다.
“인종대왕은 하늘이 낸 성인이다…하서 김인후의 어짊으로 인종대왕을 만난 것은 천재일우였다. 그러나 한 해를 못 넘기고 인종대왕을 잃은 애통을 만났으니….”
신흠은 두 사람의 짧고 애통한 만남을 두고 “천명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진짜 천명은 어디 있다는 말이냐”고 한탄했다.
한편 ‘하서 묵죽도판’과 함께 회수된 ‘고창 선운사 석씨원류 목판’은 석가의 일대기와 불법이 중국에 전래된 이후 원나라까지 유통된 사실을 글과 그림으로 제작한 뒤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석씨원류 목판’은 1488년(성종 17)에 왕명으로 새겼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사명대사(1544~1610)가 일본에서 구해온 <석씨원류> 1질을 모본으로 하여 1648년(인조 26) 복간했다. 회수된 ‘석씨원류’ 판각은 조선시대 삽화의 걸작 중 걸작이며 판화 조각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경향신문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