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비췄더니 ‘염촉=이차돈의 본명' 보였다…순교비서 79자 새로 읽었다
“79자를 새로 판독하고, 64자를 고쳐 읽었습니다.”
8월11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이차돈순교비’를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판독문이 발표됐다.
817~818년(헌덕왕 10) 조성한 ‘이차돈 순교비’의 비문을 ‘RTI 촬영(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으로 읽어낸 결과물이었다. ‘RTI’는 360도 각도에서 빛을 쏘아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순간을 읽어내는 첨단 기법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신라관에 상설전시 중인 ‘이차돈 순교비’는 일반인 눈썰미로는 10자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마멸된 명문 비석이다. 그런데 세상이 좋아져서 첨단기법으로 79자나 새롭게 구별·판독해내고, 그동안 형태를 잘못 표기했거나(오기·誤記) 다른 글자로 잘못 읽은(오독·誤讀) 64자까지 고치는 성과를 이뤘다는 것이 아닌가.
■79자를 새로 읽어냈다
물론 ‘흥분하지 마라’고 찬물을 끼얹는 이도 있을 것 같다.
왜냐면 이차돈 순교의 전모를 밝힌 비석의 전반적인 내용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을 통해 이미 소개됐다. 또 순교비의 명문이 잘 보일 때 뜬 탁본을 토대로 내용을 베껴 목판본으로 찍어낸 글씨첩이 몇 있다.
예컨대 조선시대에 제작된 <원화첩>과 <흥인군신각김생서>가 그것이다.
또 1832년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1793~1852)의 <해동금석원>에도 이차돈 순교비의 탁본자료(‘당신라백률사당·唐新羅栢栗寺幢’)가 들어있다. 명문 내용이 모두 판독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차돈 순교’의 전모를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차돈순교비>의 가치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신라의 불교 공인 과정에서 벌어진 격렬한 갈등을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극복해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서술했다.
무엇보다 이 비석이 이차돈 순교와 관련된 1차 사료라는 데 그 의미가 크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등 다른 사료에 비해 이 비석은 817~818년 신라인에 의해 제작됐다.
‘흰 피가 솟았다’, ‘꽃비가 내렸다’는 따위의 내용이 후대에 가공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일러준다. 신라인들이 수백년동안 이차돈의 순교를 역사적인 사실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순교 중 빨간 피 대신 흰 젖이 솟구치는 장면을 한 장의 삽화로 표현한 것도 돋보이는 기획력이다. 이밖에 이차돈이 입은 옷 역시 신라시대 ‘옷의 꾸밈새(복식)’을 연구하는 데도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염촉, 이차돈의 본 이름
그러나 ‘이차돈순교비’의 ‘유일한 약점’이 있다. 극심한 마멸 때문에 읽어낼 수 있는 글자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탁본(<해동금석원>)과 판각자료(<원화첩> 등), 또한 2차사료(<삼국유사> 등)을 참고로 ‘추정 판독’해왔다.
심한 비유인지 몰라도 ‘짝퉁’으로 ‘원조’를 설명해온 격이다. 그러니 ‘원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첨단 판독 기법이 개발된 덕분에 143자를 새로(79자), 혹은 고쳐(64자)를 더 확실하게 구별해냈다.
이로써 총 875자(7행 25줄 5면 추정) 가운데 73.4%인 642자(신규판독 79자 포함)를 읽어내는 성과를 얻어냈다.
이번 판독의 핵심은 비문의 첫머리에 해당되는 ‘건립연대’ 부분이다. 지금까지 순교비의 건립연대는 ‘원화13년(818)무술 8월’로 알려져 있었다. 잘 보일 때의 탁본자료를 판각한 <원화첩> 등이 소개한 연대였다.
그러나 막상 순교비에서 ‘원화 13년~’ 구절을 찾기 어려웠다. 워낙 마멸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RTI 판독 과정에서 극적으로 찾았다. 2면 맨 오른쪽 행 중간 부분에서 ‘십삼(十三)’이 보인 것이다. ‘13’은 <원화첩> 등에 등장하는 비문의 첫머리, 즉 ‘원화13년(818)’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원화 13년~’ 앞에는 어떤 글자들이 있을까. 물론 100% 단정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RTI로 읽어낸 비문의 첫단어는 ‘염촉(厭촉)’이었다. ‘염촉’은 <삼국유사>가 소개한 이차돈의 본이름이 아닌가.
또 한자 건너 ‘당기(幢記)’로 보였다. ‘당기’란 무엇인가. ‘이차돈 순교비’는 다른 이름으로 ‘석당기(石幢記)’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당(幢)’은 사찰(법당) 입구에 세운 기둥에 다는 의식용 깃발이다.
그 중 8각 돌기둥에 불경 등을 새긴 것이 ‘석당(石幢)’이다. ‘이차돈 순교비’가 바로 ‘육각형 석당’(깃발)이다.
그렇다면 ‘□당기(□幢記)’의 ‘□’은 ‘석(石)’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이차돈 순교비의 첫머리에 해당되는 행은 다음과 같이 나열할 수 있다.
‘염촉□당기…원화13년(818년·헌덕왕 13) 무술 8월 일에 부처…(厭촉□幢記…元和十三秊戊戌八月日 佛…)’
그러니까 <이차돈순교비>는 ‘염촉(이차돈)의 석당기…(운운)…818년 8월 부처…’로 시작된다는 것을 이번 RTI 판독으로 비로소 파악할 수 있었다. 순교비가 오랜만에 ‘원조’ 구실을 해낸 것이다.
■“저를 죽인다면…”
신라 사람들에게 ‘이차돈의 순교’와 ‘순교비’는 어떤 의미일까.
<이차돈 순교비>와 <삼국유사>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은 디테일에서 다소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스토리는 비슷하다. ‘이차돈의 순교’ 드라마를 재구성해보자.
527년 법흥왕(514∼540)이 불교를 받아들일 작정으로 첫번째 사찰인 흥륜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소신료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임금이 “나와 동반할 자가 누구냐”고 탄식하자 손 들고 나선 이가 있었다.
법흥왕의 측근인 사인(17관등 중 12~13등) 박 염촉(이차 혹은 이차돈)이었다. 당시 22살(혹은 26살)이었던 염촉은 “‘왕명을 잘못 전했다’고 꾸짖고 신의 머리를 벤다면 만민이 복종할 것”(<삼국유사>)이라고 순교를 자처했다.
물론 법흥왕은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고 고개를 내저었지만 염촉(이차돈)은 순교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대는 베옷을 입었지만 뜻은 비단을 품었구나. 생각은 백성에 있고, 마음은 왕에 □하구나.”(순교비 명문)
법흥왕은 무장한 무사들을 사방에 배치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뒤 대소신료들을 불러모았다.
법흥왕은 “너희는 내가 불법을 믿으려 사찰을 짓는다고 여겨 반역을 꾀하느냐”고 호통쳤다.
이에 대소신료들은 “절대 반역할 뜻이 없다”고 앞다퉈 맹서했다. 이 대목에서 순교비의 판독이 다소 불분명하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은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삼국유사>는 “‘사찰을 조성하라’는 왕명을 고의로 늦춰 전달했다’는 이유로 염촉의 책임을 물었다”고 전했다.
반면 <삼국사기>는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염촉(이차돈)과, 절대 안된다는 신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법흥왕이 고심 끝에 이차돈에게 죄를 묻는 모양새를 갖췄다”고 했다. <해동고승전>은 “염촉이 극렬하게 반대하는 대소신료 앞에서 ‘왕명을 사칭해서 사찰을 지었다’는 죄목을 자처했다”고 소개했다.
아무튼 화의 근원으로 지목된 염촉(이차돈)이 끌려나온다. 사형집행관이 모자를 벗기고 손을 뒤로 묶은 다음 참수 명령을 내렸다.(순교비 그림은 죽음을 맞이한 염촉이 관을 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다. 문자자료와 달리 시각효과가 큰 그림에서는 순교장면을 미화·신성시했다) 이때 염촉이 심상치않은 유언을 남긴다.
염촉이 “부처님께서 만약 신통력이 있으시다면 내가 죽은 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했다. 과연 그랬다.
“염촉의 목이 떨어지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白乳一丈) 이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天雨名花) 땅이 여섯번이나 흔들렸다.(地爲六躍)”(<순교비> 등)
염촉의 순교는 당대 신라인들에게 가없는 충격과 슬픔으로 다가왔다. <이차돈순교비>는 “사람과 물건이 애통해 했고, 동식물이 불안해했다. 길에는 곡소리가 이어졌고 우물과 방앗간엔 발길이 끊어졌다.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흰젖이 왜 나왔을까
왜 염촉, 즉 이차돈의 참수된 목에서 피대신 젖이 흘러나왔다는 스토리가 등장했을까.
<부법장인연전> ‘사자비구전’(472)은 “불교를 탄압한 계빈국 왕이 사자비구의 목을 베자 정수리에서 젖이 나왔다”고 했다. <현우경> ‘찬제파리품’(445)은 “바라내국의 왕이 대선사 찬제파리의 사지를 잘랐는데 피가 젖이 되고 몸이 되살아났다”고 했다. 조선 천주교의 도입시기에도 염촉의 순교와 같은 ‘흰젖’ 이야기가 나온다.
1801년(순조1)에 일어난 신유박해의 순교자인 윤점혜와 문영인이 그 주인공이다.
윤점혜는 조선 최초의 수도회인 ‘동정녀 공동체’를 결성한 인물이다. 그는 신유박해 때 온갖 혹독한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는데 잘린 목에서 흘린 피가 우윳빛이었다고 전해진다. 궁녀출신 천주교인인 문영인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모진 고문에 시달린다. 그때 이적이 일어난다. 고문으로 찢긴 다리에서 솟구친 피가 금방 꽃으로 변해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어 참수형을 당해 머리가 떨어졌을 때 흰 피가 흘러내렸다.
불교나 천주교나 왜 순교 때 빨간 피 대신 흰젖(우유)이 흘렀다는 스토리가 등장할까.
피는 죽음과 절망을, 젖는 생명을 각각 상징한다. 순교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재생의 의미를 강렬하게 전해주고 있다. 또 순교자 한사람 만의 부활이요 재생이 아니다. 젖(혹은 우유)은 고통받는 중생과 민중을 살리는 자양분을 상징한다.
염촉(이차돈)의 순교가 그랬다. 그의 희생을 자양분 삼아 신라 불교는 삼국통일을 견인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염촉(이차돈)은 신라인들에게 불심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삼국유사>는 “이후 염촉을 위해 예를 올리면 대대로 영화를 얻고, 사람마다 도를 닦으면 마땅히 불법의 이익을 깨닫게 되었다”고 전했다.
■“나를 왜 홀대하는가”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염촉(이차돈)에 대한 추모열기가 사그러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염촉(이차돈)이 순교한지 290여년이 지난 헌덕왕 연간(809~826)에 추모분위기가 되살아난다.
염촉의 순교 덕분에 조성된 흥륜사 금당에 10명의 불교성인을 진흙으로 빚은 상을 모셨다. 이때 염촉(이차돈)이 아도·혜숙·안함·의상 등 다른 고승과 함께 당당히 동쪽에 배치했다.
또 흥륜사에서는 매달 5일(염촉의 기일) 신도들이 모여 염촉을 기리는 법회를 열었다.
817~918년 사이에는 대대적인 염촉 추모 이벤트가 벌어졌다. 불교관직 중 최고위직인 국통 혜륭(생몰년 미상) 등 불교계 고위인사를 총동원하여 염촉(이차돈)의 옛 무덤을 고치고 그 앞에 큰 비석을 세운 것이다. 이것이 ‘이차돈 순교비’이다.
일부 판독된 <순교비>에만 그때의 분위기를 어렴풋 전한다.
“…한 무덤에서 유혼(幼魂·어린 혼백)이 나타났다. 노백(老魄·늙은 혼백)이 ‘마치 꿈에 본 내 아들의 혼 같다’며 조문했다. 그러자 유혼은 ‘옛날에 어떤 왕이 불법을 일으키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소. 나는 염촉(이차돈)이오’라 소개했다.”
290여년이 지난 후 잊혀진 존재가 된 염촉(이차돈)의 혼백이 나타나 ‘나를 잊었냐’고 꾸짖었다는 것이다.
■이차돈순교비는 왜 비지정문화재인가
<이차돈 순교비>를 이야기할 때 놀랄 수밖에 없는 대목이 있다. 이 중요한 기념비가 비지정문화재라는 것이다.
2014년 문화재위원회가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중인 <이차돈순교비>를 보물로 지정예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때 경주 백률사측이 소유권 문제를 제기함으로 슬그머니 ‘보류처리’됐다 ‘소유권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보류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818년 조성된 ‘순교비’는 몽골의 침략기(1238년 무렵) 등을 거치면서 실전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차돈순교비>는 ‘경주 백률사 석당기’로 알려져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단적인 예로 청나라 유희해의 <해동금석원>(1832)에도 <이차돈 순교비문>의 탁본을 ‘백률사 석당기’로 소개했다.
1910년대 비석을 찾아내 1914년 경주고적보존회(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긴 일본인들도 대체로 ‘순교비를 백률사 근처의 숲속이나 덤불속에서 찾았다’고 증언했다.
또 <삼국유사>는 “염촉(이차돈)을 북산(경주 소금강산·해발 177m)의 서쪽에 장사 지내고 길지를 정해 자추사(刺楸寺)를 조성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이를 두고 경주 지역에서는 ‘자추=백률’로 동일시했다.
‘자추’의 뜻이 ‘가시(刺)가 있는 호두(楸)’이고, 그것인 곧 ‘밤(栗)’이니 ‘백률’과도 통한다는 것이었다.
■흰 젖이 나온 이의 무덤
그런데 최근들어 이차돈 순교비와 백률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학계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이차돈 순교비>내용도 그렇고, <삼국유사>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 모든 사료를 통틀어봐도 ‘이차돈 순교비=백률사 소유’라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추=백률’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김태형 송광사 성보박물관 학예실장)
즉 ‘자목(刺木)’은 구지뽕 나무, ‘추목(楸木)’은 가래나무로 각각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지뽕나무(刺木)’는 잎이나 줄기를 자르면 하얀 액체가 흘러나온다.
염촉의 목에서 흘러나온 흰젖이 연상된다. 또 ‘가래나무(楸木)’는 무덤가에 많이 심는 나무이다. 그래서 조상의 산소에 성묘하는 것을 ‘추행(楸行)’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떻까.
‘자추사’는 ‘흰 젖을 뿌린 염촉, 즉 이차돈의 무덤과 사당’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차돈순교비? 염촉순교비?
어쨌거나 경주 북산(소금강산) 등의 입지를 고려하고, 유력후보지에서 노출 혹은 출토되고 있는 유물을 토대로 새롭게 이차돈의 무덤과 사당터를 추정하는 연구들이 나왔다.(김태형 실장·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차돈순교비>를 발견한 장소를 두고도 다른 주장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1927년 발행된 <만선고고행각>이 “<순교비>가 백률사 경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굴불사터 사면석불보다 전방 100여m에 쓰러져 있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한 연구자는 실제로 굴불사터 사면석불 남쪽 100m 지점에서 염촉, 즉 이차돈의 묘과 사당터로 추정되는 유구를 확인했다고 주장했다.(박방룡 원장)
다른 연구자는 염촉(이차돈)의 무덤 등이 조성된 북산의 위치가 지금의 소금강산 쪽이 아니라 그보다 1㎞ 북쪽의 168.5고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김태형 실장) 고고학적 확인이 필요하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생각이 든다. 염촉(이차돈)의 숭엄한 순교이야기를 담아놓은 비석을 그까짓 소유권 문제 때문에 보물 지정을 보류할 필요가 있을까. 순교비 그 자체의 가치만 생각하면 어떨까. 염촉, 즉 이차돈이 다시 1200년만에 ‘유혼’이 되어 나타나 ‘뭐하고 있냐’고 꾸짖을 것 같다.(이 기사를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이종숙 학예연구사와 이아름 연구원, 남동신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이은주 안동대 융합콘텐츠학과 교수, 김태형 송광사 성보박물관 학예실장, 이현태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이종숙·남동신·심경호·이은주, <이차돈순교비, 그 가치와 비면에 대한 새로운 탐구>, 국립문화재연구원, 2023
김태형, ‘이차돈 순교유적과 유물에 대한 고찰’, <불교미술사학> 제11집, 불교미술사학회, 2011
박방룡, ‘이차돈 사인 묘와 사당에 대한 단상’ <신라문화유산> 3호 별책, 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19
박방룡, ‘이차돈 순교비의 재검토’, <신라문화유산> 4호, 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20
최창익, ‘흰피 화소연구’, <한문학보> 37집, 우리한문학회, 2017
이도흠. ‘이차돈 관련 기사의 비교 분석 및 맥락적 해석’, <한국불교학> 제85집, 한국불교학회, 2018
강석근, ‘백률사 설화와 제영에 대한 연구-이차돈 순교 설화와 백률송순(栢栗松筍)을 중심으로’, <한국시가연구> 32권, 2012